음악 애호가, 티셔츠 수집가, 『음악을 입다』의 백영훈 작가가 들려주는 티셔츠와 랜덤 플레이 리스트. 무작위, 우연, 계획되지 않은 흐름에서 발생하는 사건, 랜덤은 그래서 예상치 못한 선물이 되기도 합니다. 오래전 LP와 카세트테이프에서, 아이팟에서, 콘서트에서 듣던 팝과 록과 재즈를 태연하게 오늘의 일상에 랜덤으로 가져다 놓습니다. 인생의 헤아릴 수 없는 고민, 반복된 잡념을 오늘의 티셔츠와 플레이리스트로 잊어 보시기를. 적당한 스타일은 덤입니다. |
시 같은, 꿈 같은, 필연 같은
어젯밤 영화 <화양연화>를 봤다. 개봉 때 보고 처음 다시 보는 셈이니 25년 만이다. 최근 고화질로 리마스터링되어 재개봉된 후 OTT에 배급되어 편히 볼 수 있게 된 덕이다. 찜해 놓은 영화 썸네일들을 훑어보다가, 문득 양조위가 연기한 저 바보 같았던 남주인공 차우와 관능과 절제가 공존했던 ‘오, 나의 여신!‘ 장만옥이 다시 보고 싶어졌다.
사반세기 만에 본 소감이 어땠냐고? 처음 봤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니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때보다 훨씬 더 좋았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홀딱 반하고 말았다. 사랑과 인생에 대한 왕가위 감독만의 뽀대나는 폼, ‘미학적 잠언‘의 절정이자 결정(結晶)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특히나 장만옥이 연기했던 첸 부인, 그녀가 표현했던 그 복잡한 감정의 결들을 이제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재관람에서 느낀 감동의 정체가 바로 그거 아니었나 싶다. 어떤 시절에 다가 왔던 상황과 관계, 그 둘의 아귀가 맞지 않아 어긋나고 좌절되는 관계. 대체로 모순의 풍경에 대한 이해. 나이가 좀 드니, 뭐 그런 것들에 조금은 눈이 트이는 것일 수도 있겠다.

이 영화의 음악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유메지의 주제가(Yumeji’s Theme)’. 시게루 우메바야시라는 일본인 영화음악가의 작품이다. 이 곡의 처연한 선율이 영화 전반을 거쳐 주요 장면마다 서사에 서정을 더해준다. 그래서 일종의 코멘터리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 음악은 원래 일본의 거장 스즈키 세이준 감독의 영화 <유메지(Yumeji)>를 위해 만들어진 곡이다. ‘유메지’의 사전적 의미는 ‘꿈길(夢路)’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탐미적인 방식으로 미인을 그려낸 화가이자 시인, 타카히사 유메지를 지칭하기도 한다. 왕가위의 앵글에 담긴 차우와 첸 부인의 사랑과 시대 풍경은 타카히사 유메지가 그림으로 구현하려 했던 탐미적이고 몽환적인 세계와 닮아 있다. <유메지의 주제가>는 결과적으로 두 감독의 미학과 두 시대의 감성이 이어지는 연결 고리로 작용한다.
왕가위 감독은 여러 인터뷰에서 이 음악을 “그 자체가 시(詩)”라고 말한 바 있다. 극중 쉼 없이 바뀌는 첸 부인의 치파오 성장(盛裝)이 주는 미학, 그녀가 국수가 든 보온병을 들고 홍콩의 밤길을 걷는 장면, 사무실에 앉은 차우가 피워대는 자욱한 담배 연기, 붉은 커튼이 바람에 계속 흔들렸던 한 호텔의 ‘2046’호실, 그 안에서 둘이 설정극을 하며 감정을 분출하던 장면, 그 모습들 위로 <유메지의 주제가>가 흐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차우는 앙코르와트를 찾아가 사원의 어느 돌 벽에 난 작은 구멍 속에 자신만의 비밀을 속삭이듯 묻어둔다. 자의식 가득하며 매사에 신중한 나머지 실연을 피할 수 없던 남정네가 보여줄 수 있는 최후의 멋.
“그 시절은 끝났다. 그 시절에 속했던 모든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끝났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수 같은 내레이션. 한 때의 아름다운 정념은 꽃으로도 피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심스러운 비밀 구멍 속에 그 시절을 담아두고, 가끔씩 비밀의 속삭임으로만 불러본다. 화양연화.
영화와 음악 아트워크를 티셔츠나 소품으로 제작해 판매하는 호주의 한 온라인 마켓플레이스를 한참 뒤지고 나서야 <화양연화> 티셔츠를 찾아냈다. 홍콩의 좁은 아파트 방에 차우와 첸 부인이 앉아 있는 장면이 프린트된 짙은 남색의 이 셔츠는 관상용에 가깝다. 그래서 며칠 동안 방에 걸어두고만 있었다. 그 장면 속에서 첸 부인은 자기 앞을 불안하게 응시하고 있고, 차우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그리고 주저하며, 비밀로 덮어두었던 시절을 조심스레 꺼내보듯 티셔츠를, 유메지의 그림 한 장을, 우리들의 화양연화를 입어 본다.
글/사진 백영훈

1990년대의 팝과 록에 어지러이 매혹당하며, 장래 희망으로 FM 라디오 DJ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어렸을 적 바람과는 달리 글로벌 IT기업에서 25년 이상 일을 해오고 있다. 전업의 시간 이편에서는 팝을 비롯한 대중문화 딜레탕트로서의 삶을 즐기며, 여전히 팝 키드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음악을 입다』가 있다.
· 도서 정보 : 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935274
음악 애호가, 티셔츠 수집가, 『음악을 입다』의 백영훈 작가가 들려주는 티셔츠와 랜덤 플레이 리스트.
무작위, 우연, 계획되지 않은 흐름에서 발생하는 사건, 랜덤은 그래서 예상치 못한 선물이 되기도 합니다.
오래전 LP와 카세트테이프에서, 아이팟에서, 콘서트에서 듣던 팝과 록과 재즈를
태연하게 오늘의 일상에 랜덤으로 가져다 놓습니다.
인생의 헤아릴 수 없는 고민, 반복된 잡념을 오늘의 티셔츠와 플레이리스트로 잊어 보시기를.
적당한 스타일은 덤입니다.
시 같은, 꿈 같은, 필연 같은
어젯밤 영화 <화양연화>를 봤다. 개봉 때 보고 처음 다시 보는 셈이니 25년 만이다. 최근 고화질로 리마스터링되어 재개봉된 후 OTT에 배급되어 편히 볼 수 있게 된 덕이다. 찜해 놓은 영화 썸네일들을 훑어보다가, 문득 양조위가 연기한 저 바보 같았던 남주인공 차우와 관능과 절제가 공존했던 ‘오, 나의 여신!‘ 장만옥이 다시 보고 싶어졌다.
사반세기 만에 본 소감이 어땠냐고? 처음 봤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니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때보다 훨씬 더 좋았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홀딱 반하고 말았다. 사랑과 인생에 대한 왕가위 감독만의 뽀대나는 폼, ‘미학적 잠언‘의 절정이자 결정(結晶)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특히나 장만옥이 연기했던 첸 부인, 그녀가 표현했던 그 복잡한 감정의 결들을 이제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재관람에서 느낀 감동의 정체가 바로 그거 아니었나 싶다. 어떤 시절에 다가 왔던 상황과 관계, 그 둘의 아귀가 맞지 않아 어긋나고 좌절되는 관계. 대체로 모순의 풍경에 대한 이해. 나이가 좀 드니, 뭐 그런 것들에 조금은 눈이 트이는 것일 수도 있겠다.
이 영화의 음악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유메지의 주제가(Yumeji’s Theme)’. 시게루 우메바야시라는 일본인 영화음악가의 작품이다. 이 곡의 처연한 선율이 영화 전반을 거쳐 주요 장면마다 서사에 서정을 더해준다. 그래서 일종의 코멘터리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 음악은 원래 일본의 거장 스즈키 세이준 감독의 영화 <유메지(Yumeji)>를 위해 만들어진 곡이다. ‘유메지’의 사전적 의미는 ‘꿈길(夢路)’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탐미적인 방식으로 미인을 그려낸 화가이자 시인, 타카히사 유메지를 지칭하기도 한다. 왕가위의 앵글에 담긴 차우와 첸 부인의 사랑과 시대 풍경은 타카히사 유메지가 그림으로 구현하려 했던 탐미적이고 몽환적인 세계와 닮아 있다. <유메지의 주제가>는 결과적으로 두 감독의 미학과 두 시대의 감성이 이어지는 연결 고리로 작용한다.
왕가위 감독은 여러 인터뷰에서 이 음악을 “그 자체가 시(詩)”라고 말한 바 있다. 극중 쉼 없이 바뀌는 첸 부인의 치파오 성장(盛裝)이 주는 미학, 그녀가 국수가 든 보온병을 들고 홍콩의 밤길을 걷는 장면, 사무실에 앉은 차우가 피워대는 자욱한 담배 연기, 붉은 커튼이 바람에 계속 흔들렸던 한 호텔의 ‘2046’호실, 그 안에서 둘이 설정극을 하며 감정을 분출하던 장면, 그 모습들 위로 <유메지의 주제가>가 흐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차우는 앙코르와트를 찾아가 사원의 어느 돌 벽에 난 작은 구멍 속에 자신만의 비밀을 속삭이듯 묻어둔다. 자의식 가득하며 매사에 신중한 나머지 실연을 피할 수 없던 남정네가 보여줄 수 있는 최후의 멋.
“그 시절은 끝났다. 그 시절에 속했던 모든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끝났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수 같은 내레이션. 한 때의 아름다운 정념은 꽃으로도 피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심스러운 비밀 구멍 속에 그 시절을 담아두고, 가끔씩 비밀의 속삭임으로만 불러본다. 화양연화.
영화와 음악 아트워크를 티셔츠나 소품으로 제작해 판매하는 호주의 한 온라인 마켓플레이스를 한참 뒤지고 나서야 <화양연화> 티셔츠를 찾아냈다. 홍콩의 좁은 아파트 방에 차우와 첸 부인이 앉아 있는 장면이 프린트된 짙은 남색의 이 셔츠는 관상용에 가깝다. 그래서 며칠 동안 방에 걸어두고만 있었다. 그 장면 속에서 첸 부인은 자기 앞을 불안하게 응시하고 있고, 차우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그리고 주저하며, 비밀로 덮어두었던 시절을 조심스레 꺼내보듯 티셔츠를, 유메지의 그림 한 장을, 우리들의 화양연화를 입어 본다.
글/사진 백영훈
1990년대의 팝과 록에 어지러이 매혹당하며, 장래 희망으로 FM 라디오 DJ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어렸을 적 바람과는 달리 글로벌 IT기업에서 25년 이상 일을 해오고 있다. 전업의 시간 이편에서는 팝을 비롯한 대중문화 딜레탕트로서의 삶을 즐기며, 여전히 팝 키드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음악을 입다』가 있다.
· 도서 정보 : 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9352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