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애호가, 티셔츠 수집가, 『음악을 입다』의 백영훈 작가가 들려주는 티셔츠와 랜덤 플레이 리스트. 무작위, 우연, 계획되지 않은 흐름에서 발생하는 사건, 랜덤은 그래서 예상치 못한 선물이 되기도 합니다. 오래전 LP와 카세트테이프에서, 아이팟에서, 콘서트에서 듣던 팝과 록과 재즈를 태연하게 오늘의 일상에 랜덤으로 가져다 놓습니다. 인생의 헤아릴 수 없는 고민, 반복된 잡념을 오늘의 티셔츠와 플레이리스트로 잊어 보시기를. 적당한 스타일은 덤입니다. |
징글맞게 덥고 습했던 2025년의 여름도 결국 지나갔다. 한때는 ‘이제 정말 한국이 열대국이 되는 건가’ 싶어 불안했지만, 계절의 순환은 엄정하게 지켜졌다. 이제 반팔 티셔츠의 제철도 지나간다. 그래도 나는 가을과 겨울에도 입겠다는 집념으로 티셔츠를 남겨둔다. 아우터 안에 입기에도 좋으니까.
이번 주말 서랍 정리를 했다. 열댓 벌의 티셔츠를 골라냈다. 올여름에 입지 못했던 것들이 선택의 기준이다. 그중 옷더미 바닥에 깔려 있던 하나를 들어 올린다. 밴드 윌코(Wilco)의 ‘체리 귀신(Cherry Ghost)’ 티셔츠다.

6년 전 가을, 이 티셔츠 차림으로 설악산 케이블카를 타고 홀로 봉우리에 올랐다. 능선을 한참 둘러보다 한 일행의 단체 사진을 찍어주고 돌아서는 내게 그 일행의 연장자 한 분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강권했다. 그래서 남게 된 어정쩡한 사진 한 장. 흐릿한 운무와 어색한 표정이 섞여, 지금 보니 묘하게 재밌는 풍경이 됐다. 공교롭게도, 그 사진이 ‘6년 전 오늘’이라며 휴대폰 앨범 속에서 알림으로 떴다.
윌코의 체리 귀신은 2004년 앨범 <A Ghost Is Born>의 수록곡 <Theologians>에서 비롯된 문구다. “I’m a cherry ghost.” 한 줄에 불과하지만, 그 문장은 윌코 팬들 사이에서 아이콘처럼 자리 잡았다. 급기야 밴드 공식 스토어에서는 이 귀여운 유령과 체리를 엮은 티셔츠를 만들었고, 영국에선 아예 ‘Cherry Ghost’라는 밴드 이름까지 생겨났다. ‘체리 귀신’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질문에 윌코의 프론트맨 제프 트위디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가 살면서 지나쳤던 이들과의 좋은 추억을 상징한다.”
그 의도가 반영된 캐릭터는 체리와 비디오 게임 ‘팩맨’을 닮은 유령 이미지로 만들어졌다. 그 그림이 프린트된 티셔츠를 입고, 나는 2019년 가을 설악산 어느 봉우리에 서 있었다. 그날 숙소로 돌아와 들었던 윌코의 노래 중 유난히 다가왔던 곡은 <The Lonely 1>이었다.
1996년에 발표된 더블 앨범 <Being There>는 윌코가 컨트리 록의 껍질을 벗고 보다 넓은 사운드 스펙트럼으로 나아간 작품이었다. <The Lonely 1>은 대부분의 팬들이 ‘베스트 3’ 안에 꼽는 포크 록발라드로, 관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보는 팬의 시선을 담아낸다. 제프 트위디는 이 노래가 “록스타와 팬, 두 인물”을 그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루 리드의 ‘Perfect Day’를 떠올린다. 쓸쓸하게 말라 버린 하루의 끝, 그 감정의 질감이 닮아 있다. 한 록밴드의 팬이 공연을 보고 귀가해, 자신의 방에 누워 반추하는 공연의 열기. 온도는 이미 어느 정도 식어 있고, 자취엔 쓸쓸함만이 감돈다. 공연이 끝난 후, 팬이자 화자인 당신이 느끼는 감정은 외로움이다. 그리고 그 감정을 헤아리는 청자인 나 역시 같다. 그렇게 우리는 외로움의 연대를 맺는다.
트위디가 팬들에게 보내는 위로의 편지처럼 들리는 어쿠스틱 기타와 오르간, 어쩐지 외로움이 뫼비우스띠처럼 순환되고 있다.
I understand I am just a fan / I'm just a fan / When I get home
I turn off the alarm / I've checked the phone / No messages on
I play the ones from yesterday / I play your song
Just to hear you say that you / You're the lonely one
나는 내 자신이 단지 팬이라는 걸 알죠. 그저 한 명의 팬.
집에 들어오면 알람을 끄고 전화 메시지를 체크해요. 아무런 메시지도 없네요.
어제 들었던 곡들을 듣습니다. 당신의 곡을 틀죠.
그저 당신이 “너는 외로운 사람이야.”라고 노래하는 걸 들으려고요.
분위기를 바꿔보려 윌코의 다른 곡들을 들어본다. 영화 <보이후드>에서 철 들지 못한 아버지 에단 호크가 아들에게 들려준 <Hate It Here>, 노라 존스와 재패니즈 브렉퍼스트 같은 여성 아티스트들이 특히 애정하는 <Jesus, Etc.>.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 노래들 모두가 묘하게 외로움으로 향하는 것처럼 들린다. 윌코의 노래들은 외로움을 회피하지 않는다. 외로움 곁에 조용히 ‘체리 귀신’을 세워둔다. 그 작은 유령이 우리가 음악을 통해 맺는 또 다른 연대의 얼굴이다.

글/사진 백영훈

1990년대의 팝과 록에 어지러이 매혹당하며, 장래 희망으로 FM 라디오 DJ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어렸을 적 바람과는 달리 글로벌 IT기업에서 25년 이상 일을 해오고 있다. 전업의 시간 이편에서는 팝을 비롯한 대중문화 딜레탕트로서의 삶을 즐기며, 여전히 팝 키드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음악을 입다』가 있다.
· 도서 정보 : 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935274
음악 애호가, 티셔츠 수집가, 『음악을 입다』의 백영훈 작가가 들려주는 티셔츠와 랜덤 플레이 리스트.
무작위, 우연, 계획되지 않은 흐름에서 발생하는 사건, 랜덤은 그래서 예상치 못한 선물이 되기도 합니다.
오래전 LP와 카세트테이프에서, 아이팟에서, 콘서트에서 듣던 팝과 록과 재즈를
태연하게 오늘의 일상에 랜덤으로 가져다 놓습니다.
인생의 헤아릴 수 없는 고민, 반복된 잡념을 오늘의 티셔츠와 플레이리스트로 잊어 보시기를.
적당한 스타일은 덤입니다.
징글맞게 덥고 습했던 2025년의 여름도 결국 지나갔다. 한때는 ‘이제 정말 한국이 열대국이 되는 건가’ 싶어 불안했지만, 계절의 순환은 엄정하게 지켜졌다. 이제 반팔 티셔츠의 제철도 지나간다. 그래도 나는 가을과 겨울에도 입겠다는 집념으로 티셔츠를 남겨둔다. 아우터 안에 입기에도 좋으니까.
이번 주말 서랍 정리를 했다. 열댓 벌의 티셔츠를 골라냈다. 올여름에 입지 못했던 것들이 선택의 기준이다. 그중 옷더미 바닥에 깔려 있던 하나를 들어 올린다. 밴드 윌코(Wilco)의 ‘체리 귀신(Cherry Ghost)’ 티셔츠다.
6년 전 가을, 이 티셔츠 차림으로 설악산 케이블카를 타고 홀로 봉우리에 올랐다. 능선을 한참 둘러보다 한 일행의 단체 사진을 찍어주고 돌아서는 내게 그 일행의 연장자 한 분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강권했다. 그래서 남게 된 어정쩡한 사진 한 장. 흐릿한 운무와 어색한 표정이 섞여, 지금 보니 묘하게 재밌는 풍경이 됐다. 공교롭게도, 그 사진이 ‘6년 전 오늘’이라며 휴대폰 앨범 속에서 알림으로 떴다.
윌코의 체리 귀신은 2004년 앨범 <A Ghost Is Born>의 수록곡 <Theologians>에서 비롯된 문구다. “I’m a cherry ghost.” 한 줄에 불과하지만, 그 문장은 윌코 팬들 사이에서 아이콘처럼 자리 잡았다. 급기야 밴드 공식 스토어에서는 이 귀여운 유령과 체리를 엮은 티셔츠를 만들었고, 영국에선 아예 ‘Cherry Ghost’라는 밴드 이름까지 생겨났다. ‘체리 귀신’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질문에 윌코의 프론트맨 제프 트위디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가 살면서 지나쳤던 이들과의 좋은 추억을 상징한다.”
그 의도가 반영된 캐릭터는 체리와 비디오 게임 ‘팩맨’을 닮은 유령 이미지로 만들어졌다. 그 그림이 프린트된 티셔츠를 입고, 나는 2019년 가을 설악산 어느 봉우리에 서 있었다. 그날 숙소로 돌아와 들었던 윌코의 노래 중 유난히 다가왔던 곡은 <The Lonely 1>이었다.
1996년에 발표된 더블 앨범 <Being There>는 윌코가 컨트리 록의 껍질을 벗고 보다 넓은 사운드 스펙트럼으로 나아간 작품이었다. <The Lonely 1>은 대부분의 팬들이 ‘베스트 3’ 안에 꼽는 포크 록발라드로, 관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보는 팬의 시선을 담아낸다. 제프 트위디는 이 노래가 “록스타와 팬, 두 인물”을 그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루 리드의 ‘Perfect Day’를 떠올린다. 쓸쓸하게 말라 버린 하루의 끝, 그 감정의 질감이 닮아 있다. 한 록밴드의 팬이 공연을 보고 귀가해, 자신의 방에 누워 반추하는 공연의 열기. 온도는 이미 어느 정도 식어 있고, 자취엔 쓸쓸함만이 감돈다. 공연이 끝난 후, 팬이자 화자인 당신이 느끼는 감정은 외로움이다. 그리고 그 감정을 헤아리는 청자인 나 역시 같다. 그렇게 우리는 외로움의 연대를 맺는다.
트위디가 팬들에게 보내는 위로의 편지처럼 들리는 어쿠스틱 기타와 오르간, 어쩐지 외로움이 뫼비우스띠처럼 순환되고 있다.
I understand I am just a fan / I'm just a fan / When I get home
I turn off the alarm / I've checked the phone / No messages on
I play the ones from yesterday / I play your song
Just to hear you say that you / You're the lonely one
나는 내 자신이 단지 팬이라는 걸 알죠. 그저 한 명의 팬.
집에 들어오면 알람을 끄고 전화 메시지를 체크해요. 아무런 메시지도 없네요.
어제 들었던 곡들을 듣습니다. 당신의 곡을 틀죠.
그저 당신이 “너는 외로운 사람이야.”라고 노래하는 걸 들으려고요.
분위기를 바꿔보려 윌코의 다른 곡들을 들어본다. 영화 <보이후드>에서 철 들지 못한 아버지 에단 호크가 아들에게 들려준 <Hate It Here>, 노라 존스와 재패니즈 브렉퍼스트 같은 여성 아티스트들이 특히 애정하는 <Jesus, Etc.>.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 노래들 모두가 묘하게 외로움으로 향하는 것처럼 들린다. 윌코의 노래들은 외로움을 회피하지 않는다. 외로움 곁에 조용히 ‘체리 귀신’을 세워둔다. 그 작은 유령이 우리가 음악을 통해 맺는 또 다른 연대의 얼굴이다.
글/사진 백영훈
1990년대의 팝과 록에 어지러이 매혹당하며, 장래 희망으로 FM 라디오 DJ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어렸을 적 바람과는 달리 글로벌 IT기업에서 25년 이상 일을 해오고 있다. 전업의 시간 이편에서는 팝을 비롯한 대중문화 딜레탕트로서의 삶을 즐기며, 여전히 팝 키드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음악을 입다』가 있다.
· 도서 정보 : 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9352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