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애호가, 티셔츠 수집가, 『음악을 입다』의 백영훈 작가가 들려주는 티셔츠와 랜덤 플레이 리스트. 무작위, 우연, 계획되지 않은 흐름에서 발생하는 사건, 랜덤은 그래서 예상치 못한 선물이 되기도 합니다. 오래전 LP와 카세트테이프에서, 아이팟에서, 콘서트에서 듣던 팝과 록과 재즈를 태연하게 오늘의 일상에 랜덤으로 가져다 놓습니다. 인생의 헤아릴 수 없는 고민, 반복된 잡념을 오늘의 티셔츠와 플레이리스트로 잊어 보시기를. 적당한 스타일은 덤입니다. |
올해 시월은 난데없는 장마로 한 달의 첫 절반가량이 흐릿하고 축축하게 젖어 버렸다. 온전하게 맑은 가을날의 정취를 누린다는 게 이리도 쉽지 않다니. 어쨌든 산책의 루틴을 이어가려고 우산을 쓰고 비에 젖은 동네 가로수 길을 걷는다. 지난해 이맘때만 해도 낙엽들이 어느 정도 쌓였는데, 지금은 낙엽 없이 사람들의 발길에 으깨진 덜 여문 은행들만 뒹굴고 있다. 길 위의 그 작고 노란 폭탄들을 피하는 발걸음에 듣는다. 캐논볼 애덜리(Cannonball Adderly)의 <Autumn Leaves>.
간결한 리듬의 피아노 도입부가 11분 대곡의 테이블을 깐다. 그리고 삐져나온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간결한 트럼펫. 그가 이 익숙한 선율을 먼저 끌고 간다. 그리고 사람 좋게 둥그스름한 캐논볼 애덜리의 알토 색소폰이 주 선율을 이어서 술술 풀어나간다. 예의 깍쟁이같이 빈틈없는 마일스가 또 리더로 그걸 받아, 냉탕과 온탕을 오간다. 캐논볼의 색소폰이 만들어내는 따뜻한 호흡은 가을의 양지와 닮아 있고, 마일스 데이비스의 트럼펫은 그 위로 서늘하게 내려앉는 가을 공기 같다.
예전에는 무심하게 넘겼는데, 행크 존스의 건반 연주에 무심할 수가 없다. ‘이야, 이 곡의 피아노가 이랬단 말인가?’ 뒤에서 에너지를 꽉꽉 눌러가며 받쳐주는 아트 블래키의 드럼 터치는 또 어떻고. ‘스탠다드’라고 하는 게 바로 이런 거로구나 싶다.

이 곡이 첫 번째 트랙으로 수록된 캐논볼 애덜리의 앨범 <Somethin’ Else>는 재즈 팬들에겐 너무나 잘 알려진 교과서이자 클래식이다. 요즘 말로 당대 재즈계의 ‘사기캐’ 다섯 명 연주자들이 ‘어벤저스, 어셈블!’ 하여 만들어진 걸작이다. 다섯 명 퀸텟의 조화가 뽑아내고 있는 건, 느긋한 템포와 여백의 미학이다. 재즈 장르 안에서 따지자면 하드밥과 쿨, 하드 펑크가 하나로 어우러졌다고, 앨범의 해설 노트는 그렇게 설명한다. 기교를 뽐내는 식의 빠른 솔로나 화려한 손놀림 대신, 절제된 리듬과 긴 호흡, 무언가 농익은 맛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AI를 주제로 한 회사의 글로벌 행사 출장이 며칠 앞으로 다가오다 보니 머릿속이 ‘AI와 데이터 혁신’이라는 온갖 기술 메시지들로 어질어질하다. 그 중에 AI를 통해 DIY 음악 작곡 서비스를 해주는 기술 스타트업의 사례가 있어 그 회사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이거 신세계다. 무료로 회원가입을 하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내가 원하는 주제의 곡을 단지 몇 분 만에 뚝딱 만들 수 있다. 이것이 과연 우리 앞날의 ‘뉴노멀’에 대한 힌트일까?
그리 반갑지만은 않은 어떤 신호들을 애써 떨쳐 내고 나는 다시 캐논볼 애덜리나 마일스 데이비스를 떠올린다. 현기증 나는 속도로 삐까뻔쩍 그럴듯한 아웃풋을 뚝딱 내는 풍경을 마주했다면 이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항상 새로운 음악을 도모했다고 알려져 있는 그들에게, 절제와 긴 호흡이 속도와 모양보다 더 중요했던 그들에게, 뉴노멀은 힌트였을까? 그렇지 않다고 믿고 싶다, 나는.
AI의 화두가 잠식한 어느 시월에 비를 맞으며 낙엽 없는 이상한 거리를 그런 생각으로 걷는다. <Autumn Leaves>가 주는 감상이 제격이다. 그래, 천천히 걸어가도 괜찮다.
2년 전 8월, 14년 만에 찾아온 슈퍼 문(super moon)을 맞이하자며 지인들과 함께 저녁 아차산 정상에 올랐다. 사진을 찾아본다. 그때 무슨 생각에서였는지는 잘 기억나진 않지만, 이 <Somethin’ Else> 앨범 커버가 프린트된 검정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유니클로가 블루노트 레이블과 협업해 출시했던 UT 티셔츠다. 이 앨범 커버의 디자인은 텍스트와 기본 폰트, 그리고 몇 안 되는 컬러로만 이루어져 있지만 재즈 장인들의 연주 마냥 그 자체만으로 세련됐다. 그러한 경지를 가슴에 품고, 누가 봐도 충만한 슈퍼 문을 지켜봤다. 한 손에는 유난히 맛나게 먹어치운 초당 옥수수의 앙상한 잔여물을 쥐고 있었다.

글/사진 백영훈

1990년대의 팝과 록에 어지러이 매혹당하며, 장래 희망으로 FM 라디오 DJ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어렸을 적 바람과는 달리 글로벌 IT기업에서 25년 이상 일을 해오고 있다. 전업의 시간 이편에서는 팝을 비롯한 대중문화 딜레탕트로서의 삶을 즐기며, 여전히 팝 키드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음악을 입다』가 있다.
· 도서 정보 : 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935274
음악 애호가, 티셔츠 수집가, 『음악을 입다』의 백영훈 작가가 들려주는 티셔츠와 랜덤 플레이 리스트.
무작위, 우연, 계획되지 않은 흐름에서 발생하는 사건, 랜덤은 그래서 예상치 못한 선물이 되기도 합니다.
오래전 LP와 카세트테이프에서, 아이팟에서, 콘서트에서 듣던 팝과 록과 재즈를
태연하게 오늘의 일상에 랜덤으로 가져다 놓습니다.
인생의 헤아릴 수 없는 고민, 반복된 잡념을 오늘의 티셔츠와 플레이리스트로 잊어 보시기를.
적당한 스타일은 덤입니다.
올해 시월은 난데없는 장마로 한 달의 첫 절반가량이 흐릿하고 축축하게 젖어 버렸다. 온전하게 맑은 가을날의 정취를 누린다는 게 이리도 쉽지 않다니. 어쨌든 산책의 루틴을 이어가려고 우산을 쓰고 비에 젖은 동네 가로수 길을 걷는다. 지난해 이맘때만 해도 낙엽들이 어느 정도 쌓였는데, 지금은 낙엽 없이 사람들의 발길에 으깨진 덜 여문 은행들만 뒹굴고 있다. 길 위의 그 작고 노란 폭탄들을 피하는 발걸음에 듣는다. 캐논볼 애덜리(Cannonball Adderly)의 <Autumn Leaves>.
간결한 리듬의 피아노 도입부가 11분 대곡의 테이블을 깐다. 그리고 삐져나온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간결한 트럼펫. 그가 이 익숙한 선율을 먼저 끌고 간다. 그리고 사람 좋게 둥그스름한 캐논볼 애덜리의 알토 색소폰이 주 선율을 이어서 술술 풀어나간다. 예의 깍쟁이같이 빈틈없는 마일스가 또 리더로 그걸 받아, 냉탕과 온탕을 오간다. 캐논볼의 색소폰이 만들어내는 따뜻한 호흡은 가을의 양지와 닮아 있고, 마일스 데이비스의 트럼펫은 그 위로 서늘하게 내려앉는 가을 공기 같다.
예전에는 무심하게 넘겼는데, 행크 존스의 건반 연주에 무심할 수가 없다. ‘이야, 이 곡의 피아노가 이랬단 말인가?’ 뒤에서 에너지를 꽉꽉 눌러가며 받쳐주는 아트 블래키의 드럼 터치는 또 어떻고. ‘스탠다드’라고 하는 게 바로 이런 거로구나 싶다.
이 곡이 첫 번째 트랙으로 수록된 캐논볼 애덜리의 앨범 <Somethin’ Else>는 재즈 팬들에겐 너무나 잘 알려진 교과서이자 클래식이다. 요즘 말로 당대 재즈계의 ‘사기캐’ 다섯 명 연주자들이 ‘어벤저스, 어셈블!’ 하여 만들어진 걸작이다. 다섯 명 퀸텟의 조화가 뽑아내고 있는 건, 느긋한 템포와 여백의 미학이다. 재즈 장르 안에서 따지자면 하드밥과 쿨, 하드 펑크가 하나로 어우러졌다고, 앨범의 해설 노트는 그렇게 설명한다. 기교를 뽐내는 식의 빠른 솔로나 화려한 손놀림 대신, 절제된 리듬과 긴 호흡, 무언가 농익은 맛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AI를 주제로 한 회사의 글로벌 행사 출장이 며칠 앞으로 다가오다 보니 머릿속이 ‘AI와 데이터 혁신’이라는 온갖 기술 메시지들로 어질어질하다. 그 중에 AI를 통해 DIY 음악 작곡 서비스를 해주는 기술 스타트업의 사례가 있어 그 회사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이거 신세계다. 무료로 회원가입을 하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내가 원하는 주제의 곡을 단지 몇 분 만에 뚝딱 만들 수 있다. 이것이 과연 우리 앞날의 ‘뉴노멀’에 대한 힌트일까?
그리 반갑지만은 않은 어떤 신호들을 애써 떨쳐 내고 나는 다시 캐논볼 애덜리나 마일스 데이비스를 떠올린다. 현기증 나는 속도로 삐까뻔쩍 그럴듯한 아웃풋을 뚝딱 내는 풍경을 마주했다면 이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항상 새로운 음악을 도모했다고 알려져 있는 그들에게, 절제와 긴 호흡이 속도와 모양보다 더 중요했던 그들에게, 뉴노멀은 힌트였을까? 그렇지 않다고 믿고 싶다, 나는.
AI의 화두가 잠식한 어느 시월에 비를 맞으며 낙엽 없는 이상한 거리를 그런 생각으로 걷는다. <Autumn Leaves>가 주는 감상이 제격이다. 그래, 천천히 걸어가도 괜찮다.
2년 전 8월, 14년 만에 찾아온 슈퍼 문(super moon)을 맞이하자며 지인들과 함께 저녁 아차산 정상에 올랐다. 사진을 찾아본다. 그때 무슨 생각에서였는지는 잘 기억나진 않지만, 이 <Somethin’ Else> 앨범 커버가 프린트된 검정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유니클로가 블루노트 레이블과 협업해 출시했던 UT 티셔츠다. 이 앨범 커버의 디자인은 텍스트와 기본 폰트, 그리고 몇 안 되는 컬러로만 이루어져 있지만 재즈 장인들의 연주 마냥 그 자체만으로 세련됐다. 그러한 경지를 가슴에 품고, 누가 봐도 충만한 슈퍼 문을 지켜봤다. 한 손에는 유난히 맛나게 먹어치운 초당 옥수수의 앙상한 잔여물을 쥐고 있었다.
글/사진 백영훈
1990년대의 팝과 록에 어지러이 매혹당하며, 장래 희망으로 FM 라디오 DJ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어렸을 적 바람과는 달리 글로벌 IT기업에서 25년 이상 일을 해오고 있다. 전업의 시간 이편에서는 팝을 비롯한 대중문화 딜레탕트로서의 삶을 즐기며, 여전히 팝 키드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음악을 입다』가 있다.
· 도서 정보 : 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9352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