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애호가, 티셔츠 수집가, 『음악을 입다』의 백영훈 작가가 들려주는 티셔츠와 랜덤 플레이 리스트. 무작위, 우연, 계획되지 않은 흐름에서 발생하는 사건, 랜덤은 그래서 예상치 못한 선물이 되기도 합니다. 오래전 LP와 카세트테이프에서, 아이팟에서, 콘서트에서 듣던 팝과 록과 재즈를 태연하게 오늘의 일상에 랜덤으로 가져다 놓습니다. 인생의 헤아릴 수 없는 고민, 반복된 잡념을 오늘의 티셔츠와 플레이리스트로 잊어 보시기를. 적당한 스타일은 덤입니다. |
올해 가을에도 미국 출장은 찾아왔다. 일도 일이지만, 일 년 중 내밀하게 사심을 채우는 시간이다. 라스베가스에서의 출장 일정을 마치면 곧장 귀국하는 동료들과 달리, 나는 짧은 휴가를 내어 인근의 LA나 샌프란시스코로 떠난다. 팝과 록의 참새들을 꾀어내는 각종 방앗간들이 즐비한 그곳으로 말이다.
서울로 돌아가는 동료들과 공항에서 인사를 나눈 직후 나 혼자 다른 게이트로 돌아서는 순간이면 늘 영화 한 장면이 떠오른다. <유주얼 서스펙트>의 마지막 씬. 경찰서에서 풀려난 케빈 스페이시가 절름발이 연기를 벗고 멀쩡한 걸음으로 거리를 유유히 빠져나가는 장면 말이다. 출장자를 벗어나 음악 순례자로 변하는 내 모습이, 그 장면의 그와 묘하게 닮았다.
올해 시월의 LA행엔 특히 설렘이 컸다. 베타 밴드(The Beta Band)가 20여 년 만에 재결성 투어를 시작했고, 그 첫 북미 공연이 하필 내가 묵을 헐리우드 인근에서 열린다는 정보를 봤기 때문이다. 출장 일정이 확정되자마자 나는 ‘광클’을 시작했고, 운 좋게 티켓을 손에 넣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이 밴드는, 내게 오래전부터 영화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High Fidelity)> 속 장면으로 각인된 이름이었다. 존 쿠색이 연기한 레코드숍 주인 롭이 턴테이블에 한 장의 음반을 올리며 직원 딕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부터 베타 밴드의 앨범 ‘The Three E.P.’s’를 팔 거야.”
그리고 흘러나오는 곡, ‘Dry the Rain.’ 기타 루프가 매장을 채우고, 손님이 묻는다.
손님 : 이게 누구 곡이야?
롭: 베타 밴드.
손님: 좋네.
롭: 알고 있어.
음악 덕후라면 익숙한 이런 식의 짧은 대화. 바로 그런 순간이 살면서 작은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나 역시 그 장면을 수없이 되돌려보며, 그들의 음악과 함께 내 청춘의 일부를 보냈다.
공연장은 헐리우드 대로 한복판에 자리한 폰다 극장(Fonda Theatre). 1920년대 개관한 고풍스러운 건물로, 톰 요크의 DJ 세트와 악틱 몽키스나 킬러스(The Killers)의 초기 무대를 품었던 곳이다. 공연이 열린 주말 밤, 나를 포함한 관객들이 기다리는 극장 안팎은 묘한 설렘이 감돌았다. 문 앞에선 히스패닉 아주머니가 핫도그를 굽고 있고, 거리에선 대마초 냄새가 풍겼다.
베타 밴드의 연주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기운차고 밀도 있었다. 특히 보컬과 기타를 맡고 있는 프론트맨 스티브 메이슨의 음악적 내공과 기운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팀이 뽑아내는 사운드도 독창적이었으며, 그럴 경우 대개의 팀이 빠질 수 있는 어떤 매너리즘 때문에 호감이 떨어질 우려 따위도 없었다. 그러니 이들의 레퍼토리를 꿰차고 있지 않았어도 충분히 즐거운 경험이었다.
몇 곡의 예열을 거쳐 드디어 그 노래가 시작된다. <Dry the Rain.> 관객 수백 명이 일제히 후렴을 따라 부르며 극장이 커다란 합창의 공간으로 변했다.
“If there’s something inside that you want to say, say it out loud, it’ll be OK. I will be your light.”
당신이 안에 품고 얘기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크게 외쳐봐. 괜찮을 거야. 내가 당신의 빛이 되어줄 테니까.
그 장면에서 문득 생각했다. 이 곡은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속 레코드숍 ‘챔피언십 바이닐’에서 늘 “깔쌈한” 음반을 찾던 ‘음악 속물(music snobs)’들의 찬가이자, 그들이 우울할 때 꺼내 듣기 딱 맞는 자기 위로의 주문 같은 곡이라는 걸. “내리는 비를 말려주겠다”는 그 결기는 여전히 중독적이었다.
두 시간 남짓한 공연이 끝난 뒤, 로비의 머천다이즈 부스. 빈티지 샹들리에가 비추는 조명 아래, 포스터와 배지, LP, 티셔츠들이 팬들을 유혹했다. 나야 뭐 말해 뭐해, 그 유혹에 항상 먼저 다가가는 불나방이었다.
결국 ‘Banger’ 일러스트 티셔츠를 집어 들었다. 핫핑크 컬러의 밴드명이 인상적인, 다이너마이트 그래픽이 폭발하듯 박힌 티셔츠. 가격은 여느 티셔츠보다 다소 비쌌지만, 이곳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단 한 번의 밤의 증거였다. 화장실에서 셔츠를 갈아입은 후 거리를 나섰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도보로 10분 남짓. 치안 걱정에 챗GPT에게 조언을 구하니 “이어폰 착용은 금하고, 사람들이 많은 대로로 움직이세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차마 첫 번째 조언은 따를 수 없었다. 나는 이어폰을 꼽고 <Dry the Rain>을 들으며 잰걸음을 걸었다.
음악에 취한 중년의 팝 키드에게 LA의 밤거리는 그저 한적한 무대였다. 누군가가 나를 불러 세웠어도, 무시하고 그냥 걸었을 것이다. 비를 걷어내듯, 시간과 거리와 나이를 걷어내듯, 그냥 걸었고, 그 밤, 모든 게 괜찮았다. 정말로 괜찮았다.
글/사진 백영훈

1990년대의 팝과 록에 어지러이 매혹당하며, 장래 희망으로 FM 라디오 DJ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어렸을 적 바람과는 달리 글로벌 IT기업에서 25년 이상 일을 해오고 있다. 전업의 시간 이편에서는 팝을 비롯한 대중문화 딜레탕트로서의 삶을 즐기며, 여전히 팝 키드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음악을 입다』가 있다.
· 도서 정보 : 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935274
무작위, 우연, 계획되지 않은 흐름에서 발생하는 사건, 랜덤은 그래서 예상치 못한 선물이 되기도 합니다.
오래전 LP와 카세트테이프에서, 아이팟에서, 콘서트에서 듣던 팝과 록과 재즈를
태연하게 오늘의 일상에 랜덤으로 가져다 놓습니다.
인생의 헤아릴 수 없는 고민, 반복된 잡념을 오늘의 티셔츠와 플레이리스트로 잊어 보시기를.
적당한 스타일은 덤입니다.
올해 가을에도 미국 출장은 찾아왔다. 일도 일이지만, 일 년 중 내밀하게 사심을 채우는 시간이다. 라스베가스에서의 출장 일정을 마치면 곧장 귀국하는 동료들과 달리, 나는 짧은 휴가를 내어 인근의 LA나 샌프란시스코로 떠난다. 팝과 록의 참새들을 꾀어내는 각종 방앗간들이 즐비한 그곳으로 말이다.
서울로 돌아가는 동료들과 공항에서 인사를 나눈 직후 나 혼자 다른 게이트로 돌아서는 순간이면 늘 영화 한 장면이 떠오른다. <유주얼 서스펙트>의 마지막 씬. 경찰서에서 풀려난 케빈 스페이시가 절름발이 연기를 벗고 멀쩡한 걸음으로 거리를 유유히 빠져나가는 장면 말이다. 출장자를 벗어나 음악 순례자로 변하는 내 모습이, 그 장면의 그와 묘하게 닮았다.
올해 시월의 LA행엔 특히 설렘이 컸다. 베타 밴드(The Beta Band)가 20여 년 만에 재결성 투어를 시작했고, 그 첫 북미 공연이 하필 내가 묵을 헐리우드 인근에서 열린다는 정보를 봤기 때문이다. 출장 일정이 확정되자마자 나는 ‘광클’을 시작했고, 운 좋게 티켓을 손에 넣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이 밴드는, 내게 오래전부터 영화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High Fidelity)> 속 장면으로 각인된 이름이었다. 존 쿠색이 연기한 레코드숍 주인 롭이 턴테이블에 한 장의 음반을 올리며 직원 딕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부터 베타 밴드의 앨범 ‘The Three E.P.’s’를 팔 거야.”
그리고 흘러나오는 곡, ‘Dry the Rain.’ 기타 루프가 매장을 채우고, 손님이 묻는다.
손님 : 이게 누구 곡이야?
롭: 베타 밴드.
손님: 좋네.
롭: 알고 있어.
음악 덕후라면 익숙한 이런 식의 짧은 대화. 바로 그런 순간이 살면서 작은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나 역시 그 장면을 수없이 되돌려보며, 그들의 음악과 함께 내 청춘의 일부를 보냈다.
공연장은 헐리우드 대로 한복판에 자리한 폰다 극장(Fonda Theatre). 1920년대 개관한 고풍스러운 건물로, 톰 요크의 DJ 세트와 악틱 몽키스나 킬러스(The Killers)의 초기 무대를 품었던 곳이다. 공연이 열린 주말 밤, 나를 포함한 관객들이 기다리는 극장 안팎은 묘한 설렘이 감돌았다. 문 앞에선 히스패닉 아주머니가 핫도그를 굽고 있고, 거리에선 대마초 냄새가 풍겼다.
베타 밴드의 연주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기운차고 밀도 있었다. 특히 보컬과 기타를 맡고 있는 프론트맨 스티브 메이슨의 음악적 내공과 기운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팀이 뽑아내는 사운드도 독창적이었으며, 그럴 경우 대개의 팀이 빠질 수 있는 어떤 매너리즘 때문에 호감이 떨어질 우려 따위도 없었다. 그러니 이들의 레퍼토리를 꿰차고 있지 않았어도 충분히 즐거운 경험이었다.
몇 곡의 예열을 거쳐 드디어 그 노래가 시작된다. <Dry the Rain.> 관객 수백 명이 일제히 후렴을 따라 부르며 극장이 커다란 합창의 공간으로 변했다.
그 장면에서 문득 생각했다. 이 곡은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속 레코드숍 ‘챔피언십 바이닐’에서 늘 “깔쌈한” 음반을 찾던 ‘음악 속물(music snobs)’들의 찬가이자, 그들이 우울할 때 꺼내 듣기 딱 맞는 자기 위로의 주문 같은 곡이라는 걸. “내리는 비를 말려주겠다”는 그 결기는 여전히 중독적이었다.
두 시간 남짓한 공연이 끝난 뒤, 로비의 머천다이즈 부스. 빈티지 샹들리에가 비추는 조명 아래, 포스터와 배지, LP, 티셔츠들이 팬들을 유혹했다. 나야 뭐 말해 뭐해, 그 유혹에 항상 먼저 다가가는 불나방이었다.
결국 ‘Banger’ 일러스트 티셔츠를 집어 들었다. 핫핑크 컬러의 밴드명이 인상적인, 다이너마이트 그래픽이 폭발하듯 박힌 티셔츠. 가격은 여느 티셔츠보다 다소 비쌌지만, 이곳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단 한 번의 밤의 증거였다. 화장실에서 셔츠를 갈아입은 후 거리를 나섰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도보로 10분 남짓. 치안 걱정에 챗GPT에게 조언을 구하니 “이어폰 착용은 금하고, 사람들이 많은 대로로 움직이세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차마 첫 번째 조언은 따를 수 없었다. 나는 이어폰을 꼽고 <Dry the Rain>을 들으며 잰걸음을 걸었다.
음악에 취한 중년의 팝 키드에게 LA의 밤거리는 그저 한적한 무대였다. 누군가가 나를 불러 세웠어도, 무시하고 그냥 걸었을 것이다. 비를 걷어내듯, 시간과 거리와 나이를 걷어내듯, 그냥 걸었고, 그 밤, 모든 게 괜찮았다. 정말로 괜찮았다.
글/사진 백영훈
1990년대의 팝과 록에 어지러이 매혹당하며, 장래 희망으로 FM 라디오 DJ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어렸을 적 바람과는 달리 글로벌 IT기업에서 25년 이상 일을 해오고 있다. 전업의 시간 이편에서는 팝을 비롯한 대중문화 딜레탕트로서의 삶을 즐기며, 여전히 팝 키드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음악을 입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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