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다는 것][전시] 디스토피아 속에서 유토피아를 찾는 여정, <이불: 1988년 이후>

2025-11-10


본다는 것 #6


대지의 경계면을 따라 유리 벽면이 자연스럽게 흐르게 설계된 리움 미술관 M3관 입구. 내리막 진입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다 보면 높은 층고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은빛 비행선과 마주하게 된다. 이것은 길이 17m의 풍선으로 <취약할 의향–메탈라이즈드 벌룬>. 20세기 초 독일 기술 발전의 상징으로 인기를 누리다 화재로 전소한 체펠린(Zeppelin) 비행선을 모티브로 한 이불 작가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제목에서도 표현되었듯 이상(理想)을 향해 끝없이 나아가려는 인류의 열망과 함께 언제 터져 추락할지 모를 연약함을 동시에 상징하고 있다.

 

<취약할 의향–메탈라이즈드 벌룬>, 2015-2016/2020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이 전시관의 또 다른 독립적인 공간, ‘블랙박스’의 한쪽 면을 배경으로 서있는 마치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승리의 여신 니케와 닮은 조형물이 있다. 이 작품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입구 정면에 상설 전시된 이불 작가의 또 다른 대표작 <롱 테일 헤일로: CTCS #1> 연작의 일부로 멀리서 보면 니케의 아름답고 완벽한 곡선을 띠고 있는 듯하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기계의 파편이 서로 얽힌 듯 채워져 구분 지을 수 없는 불완전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롱 테일 헤일로: CTCS #1>, 2024


현재 리움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불: 1998년 이후>는 조각과 설치미술, 평면, 드로잉, 모형 등 작가 이불의 총 150여 점 작품을 한자리에 모은 대규모 서베이 전시이다. 지난 2021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이불의 개인전이 1980년대 후반부터 약 10년간의 초기 작업과 퍼포먼스를 집중적으로 다뤘다면 이번 전시는 90년대 후반 이후 30년간의 주요 작업을 총체적으로 조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불 작가의 확대된 세계를 한 단계 더 엿볼 수 있다. 


전시는 건물 내에서도 완전한 독립 공간을 이루는, 이름 그대로 빛이 들어가지 않는 미래의 공간 ‘블랙박스’에서부터 시작한다. 계단을 따라 어둠 속 블랙박스에 들어서면 벽과 바닥이 온통 거울과 그 조각들로 뒤덮인 대규모 설치 작업 〈태양의 도시 II, 2014〉와 마주하게 된다. 거울, 크리스털, 깨진 유리 조각이 만들어 내는 굴절과 반사는 LED 조명의 반짝이는 빛과 만나 마치 암흑의 우주 속 흩어진 별들 사이를 거니는 강렬함과 고요함을 선사한다. 그와 동시에 관람객이 지나다닐 수 있는 통로를 제외한 바닥 전면에 깔린 유리판 때문에 불안정함 또한 경험하게 된다. (그렇기에 ‘블랙박스’ 공간에서는 사진 촬영이 불가하다.)


자칫하면 건드리다 깨뜨릴 것만 같은 위태로움. 하필 그 유리판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우리가 흔히 음료를 포장할 때 사용하는 투명 플라스틱 컵이다. 


《이불: 1998년 이후》 (블랙 박스 전시 전경 사진: 전병철. 이미지/리움미술관)


〈태양의 도시 II〉 안에는 작가 초기 대표작인 〈사이보그 W6〉, 〈무제(아나그램 레더 #11 T.O.T.)〉,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소개된 노래방 작업 〈속도보다 거대한 중력 I〉, 그리고 근대 건축의 유토피아적 상징을 차용한 〈오바드〉가 함께 배치되어 있다. 


어둠 속 바닥에 깔린 유리판을 인지하며 조심스럽게 전시장을 둘러보다 보면 작품과 함께 거울에 비친 숱한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전면의 거울과 조명을 통해 만들어진 환영은 실재와 가상의 감각을 혼란스럽게 증폭시키고 빛나는 유토피아 속 충돌하는 어둠과 그로 인한 붕괴를 경험하게 한다. 반짝이는 빛은 환상을, 깨져버린 거울 파편들은 현실을 보여주는 듯하다. 〈태양의 도시 II〉는 분명 강렬하고 아름답지만 또한 외롭고 한없이 공허한 세계다.


블랙박스 전시장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그라운드 갤러리’로 내려가면 이번 전시의 중심 작품 중 하나인 <몽그랑레시>를 비롯해 공간 전체를 활용한 거대 설치 작품들과 마주하게 된다. 


그라운드 갤러리 전시 전경


<몽그랑레시>는 2005년부터 전개된 건축적 조각 설치 연작으로 건설되지 못한 채 폐허로 남은 설치물들로 유토피아를 향한 이상과 실패로 남은 모더니티를 표현한 작품이다. 작가는 오랜 시간 <몽그랑레시>를 위한 드로잉과 페인팅, 조각 습작을 통해 머릿속 디스토피아마저 구조화한다. 벽면 가득 채워진 그 작업 흔적들(<스튜디오 섹션>: 몽그랑레시를 위한 드로잉과, 페인팅, 모형 및 조각 습작)에서 작가가 가진 인류에 관한 지속적인 탐구와 그것들을 표현해 보이고자 하는 간절함을 엿볼 수 있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표현된 디스토피아는 그 자체만으로도 또 다른 유토피아다.


<몽그랑레시: 바위에 흐느끼다>, 2005 / <스튜디오 섹션>


 

<몽그랑레시를 위한 모형>, 2005


<오바드Ⅴ>, 2019 / <오바드Ⅴ를 위한 습작>, 2019


:: <이불: 1988년 이후> 전시 리뷰는 2편 이어서 읽기




글·사진 | 한수정

우아한 삶을 지향합니다. 그러나 관념과 현실을 분리시킨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해 혼자 떠나는 여행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규슈단편>을 함께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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