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음악을 입다][음악] 지금은 지금, 다음은 다음, 니나 시몬 <Feeling Good>

2025-12-05


음악 애호가, 티셔츠 수집가, 『음악을 입다』의 백영훈 작가가 들려주는 티셔츠와 랜덤 플레이 리스트.
무작위, 우연, 계획되지 않은 흐름에서 발생하는 사건, 랜덤은 그래서 예상치 못한 선물이 되기도 합니다.
오래전 LP와 카세트테이프에서, 아이팟에서, 콘서트에서 듣던 팝과 록과 재즈를
태연하게 오늘의 일상에 랜덤으로 가져다 놓습니다.
인생의 헤아릴 수 없는 고민, 반복된 잡념을 오늘의 티셔츠와 플레이리스트로 잊어 보시기를.
적당한 스타일은 덤입니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뒤늦게야 봤다. 보고 나니 극장에서 보지 못했던 게 너무 아쉬웠다. 도쿄 시부야의 공중 화장실 청소부 ‘히라야마’를 연기한 야쿠쇼 코지의 모습,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그가 짓는 표정들이 여전히 잔상에 남는다. 몇 분에 걸친 그 엔딩 씬, 히라야마의 얼굴엔 복잡한 감정이 스쳐가고, 내내 충혈되어 있던 그의 두 눈엔 미소와 눈물이 겹쳐진다. 차 안에서 그가 틀어 놓은 음악은 니나 시몬의 <Feeling Good>. 이 영화의 모든 장면은 TV가 아닌 극장에서 봐야 온전했을 것이다.


“이제 새로운 새벽이 밝았고, 새 날이 왔고, 내게 새로운 삶이 왔어. 그리고 난 기분이 좋아.  (It’s a new dawn, it’s a new day, it’s a new life for me. And I’m feeling good.)


니나 시몬 특유의 미묘한 떨림이 깃든 노래의 도입부는 관악과 현악이 한껏 드라마틱하게 받쳐주며 이어지고, 히라야마가 맞게 될 ‘완벽한 날들’을 축복하듯 흐른다. 영화를 연출한 빔 벤더스는 처음부터 이 곡을 마지막 곡으로 정해 놓고 시나리오를 썼다고 한다. 그만큼 주인공의 처지와 감정에 딱 들어맞는다. 영화 전반에 묘사된 일상의 잔잔했던 진폭이 니나 시몬의 노래를 통해 격정이자 카타르시스로 터지는 장면이다. 이를 지켜보는 관객인 나의 얼굴도 어쩌면 야쿠쇼 코지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나 싶다.


장년의 과묵한 이 화장실 청소노동자는 아침의 햇살에 미소로 인사하고, 오후의 햇살에 위로를 느낀다. 꼼꼼하고 고된 오전의 노동을 마치면, 주변의 작은 신사(神社)안 벤치에 앉아 편의점 샌드치위로 점심을 해결한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본다. 높은 나무, 그 위의 무성한 푸른 나뭇잎들과 그 사이로 비추이는 햇빛을 낡은 올림푸스 필름 자동카메라로 담는다. 



신사 안의 큰 나무 밑에서 작고 연약한 나뭇잎과 그 줄기를 거둬 방안에 키우며, 카세트 테이프 컬렉션으로 갖춰 놓은 올드팝을 틀어 하루의 톤을 정한다. 도쿄 스카이트리 타워를 등뒤로 흘깃 살펴보며 자전거를 타고, 단골 식당과 주점에서 들러 밥을 먹고 츄하이(일본의 희석식 소주)를 한 잔 한다. 주변 사람들이 던지는 일상의 말들은 마치 반사체로 받는다. 주말이면 중고 책방에 들르고, 잠자리에 누워 윌리엄 포크너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를 읽는다. 이 모든 일상의 잔영과 사건들은 변함없이 그가 꾸는 꿈에서 햇살과 나뭇잎, 바람에 움직이는 잔영으로 재현된다.


어느 날 그의 집으로 가출한 조카가 찾아온다. 오랫동안 보지 못한 여동생의 딸이다. 똘똘하고 감수성이 높은 사춘기 소녀가 며칠 동안 삼촌의 생활을 함께한다. 삼촌의 컬렉션에서 밴 모리슨 앨범을 꺼내 <Brown eyed Girl>을 듣고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을 읽는다. 이 둘은 함께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다리 위에서 강을 내려다본다. 조카가 말한다.

“이 강은 바다로 이어지죠? 그럼 우리도 가봐요.”

히라야마가 잠시 생각하다 답한다. 

“다음에.”

조카가 묻는다. 

“그 ‘다음’이 언제에요?”

그가 답한다.

“지금은 지금, 다음은 다음.”


영화는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즈음에 ‘코모레비(木漏れ日)’라는 말을 띄워준다.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이 만드는 일회적인 무늬‘라는 뜻으로, 영화의 각주를 친절하게 달아준 셈이다. 이는 히라야마가 조카에게 전하고 둘이 함께 즐겁게 복창한 “지금은 지금, 다음은 다음”과 닮아 있다. “현재를 즐겨라”라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식 서양식 경구(驚句)에 대해 잔잔한 일상에서 다른 결의 아름다움을 찾는 일본식 탐미주의가 깃든 일종의 대구처럼도 보인다. 히라야마의 하루는 그렇게 순간순간의 햇살과 나뭇잎, 바람이 빚어내는 순간 역학의 아름다움으로 조용히 정리된다.

 

그의 세계는 그 빛의 리듬 안에서 유지된다. 그리고 그 패턴 위에서 애니멀스의 <House of the Rising Sun>과 오티스 레딩의 <(Sittin’ on) the Dock of the Bay>를 튼다. 패티 스미스의 <Redondo Beach>를 마음에 들어 한 젊은 아가씨가 남긴 볼 뽀뽀의 여운에 미소 짓는다. 그날의 오후, 푸근한 햇살이 들어온 방에 누워 루 리드의 <Perfect Day>를 들으며 ‘완벽한 날‘을 완성한다. 


<퍼펙트 데이즈>에는 배우 야쿠쇼 코지만이 줄 수 있을 것만 같은 공기가 존재한다. 신사의 풍모, 채색을 기다리고 있는 백지와도 같은 이미지에 더해지는 주옥같은 올드팝의 모음. 영화 속 히라야마의 착장인 데님 셔츠와 넉넉한 치노 팬츠 차림으로 타는 자전거, 독서등 아래서 읽는 문고판 소설. 미장센이 주는 조합이 참으로 멋스럽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서둘러 유니클로 매장으로 향했다. UT ‘Peace for All’ 프로젝트로 최근에 출시된 야쿠쇼 코지 티셔츠를 익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티셔츠에는 자전거를 타는 히라야마의 모습과 “지금은 지금, 다음은 다음”이라는 대사가 프린트돼 있다. 새해 봄 히라야마가 도쿄 스카이트리를 바라보던 것처럼, 그 셔츠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집 근처 광진교를 건너며 롯데월드타워를 바라볼 것이다. 내쳐 한강의 서쪽 반대편에 있는 일산 쪽 행주대교까지 라이딩을 해야 할 터이지만, 지금은 우선 성산대교 정도까지가 최선이다. 그 너머는 다음을 기약한다. 체력 탓만은 아니라는 점을 밝혀둔다.





글/사진 백영훈

1990년대의 팝과 록에 어지러이 매혹당하며, 장래 희망으로 FM 라디오 DJ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어렸을 적 바람과는 달리 글로벌 IT기업에서 25년 이상 일을 해오고 있다. 전업의 시간 이편에서는 팝을 비롯한 대중문화 딜레탕트로서의 삶을 즐기며, 여전히 팝 키드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음악을 입다』가 있다.
· 도서 정보 : 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935274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