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애호가, 티셔츠 수집가, 『음악을 입다』의 백영훈 작가가 들려주는 티셔츠와 랜덤 플레이 리스트. 무작위, 우연, 계획되지 않은 흐름에서 발생하는 사건, 랜덤은 그래서 예상치 못한 선물이 되기도 합니다. 오래전 LP와 카세트테이프에서, 아이팟에서, 콘서트에서 듣던 팝과 록과 재즈를 태연하게 오늘의 일상에 랜덤으로 가져다 놓습니다. 인생의 헤아릴 수 없는 고민, 반복된 잡념을 오늘의 티셔츠와 플레이리스트로 잊어 보시기를. 적당한 스타일은 덤입니다. |
“그 소리는 음악이 늘 그곳에 존재했을 것만 같은, 시간을 초월한 품위와 느낌이었으며, 음들을 넘어서고 싶은 동경, 우리가 늘 도달해서 손끝으로 만지고 싶은 조용한 욕망과도 같은 것이었다.” - 피터 페팅거, 『빌 에반스 – 재즈의 초상』(황덕호 역) 중에서
최근 1년간 가장 자주 들었던 음반은 빌 에반스 트리오의 <Waltz for Debby>와 <Sunday at the Village Vanguard>다. 내란으로 인해 일상의 평화까지 어지럽혀졌던 지난겨울에는 정상의 복원만을 희망하며 <You Must Believe in Spring>을 ‘새겨’ 들었다. 요즘은 재즈평론가 황덕호 씨가 번역한 빌 에반스의 자서전을 읽고 있다. 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어김없이 내 주변을 정화시켜주는 빌 에반스 선생에 대해 기본 예의라도 갖추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 두꺼운 책이 재밌기까지 하다.
빌 에반스가 들려주는 음악, 그 연주의 미덕에 대한 수사는 자서전의 저자 피터 페팅거가 책의 서문에서 깔끔하게 정리하고 있어서, 그에 붙이거나 뺄 말이 없다. ‘늘 그곳에 존재’하는 ‘시간을 초월한 품위’, 그리고 ‘조용한 욕망’이라니, 빌 에반스의 음악을 들으면서 항상 느껴왔던 나의 감흥을 어쩌면 이렇게나 근사하고도 적확하게 묘사했단 말인가.

빌 에반스를 처음 들었을 때 받았던 인상은, 티끌 하나 허용할 수 없는 결벽증에 가까운 완벽주의자의 깔끔한 연주였다. 그런데 지난 1년간 수없이 들어오면서 <Waltz for Debby>와 <Sunday at the Village Vanguard>앨범의 잔잔하고 멀끔한 수면 밑에 휘감아 도는 스윙과 열정의 노래가 있음을 조금씩 알아채 나가고 있다. ‘재즈 막귀’임에도 빌 에반스 미학에 한 발 더 다가선 것 같아 기쁘다. 요즘은 특히<Sunday at the Village Vanguard>를 더 많이 듣는다. 1961년 6월 25일 일요일, 뉴욕의 재즈클럽 ‘빌리지 뱅가드’ 공연 실황을 담은 앨범이다. 두 번째 수록곡 <My Man’s Gone Now>을 듣고 나면 새삼 리플레이를 누른다.
<My Man’s Gone Now>는 뮤지컬 <포기와 베스>에서 남편의 죽음을 비탄하는 아리아로, 조지 거쉰이 만든 곡이다. 이 곡에선 특히 스콧 라파로의 베이스가 슬픔을 격정적으로 토로한다. 번쩍 귀가 쏠린다. 이어 빌 에반스는 “그래, 그 슬픔은 이러하지”라는 듯, 다시 건반으로 시간을 더듬고 주제를 다듬는다. 폴 모티언의 브러쉬는 빌과 스콧이 하는 대화의 톤을 지켜보며 약속한 시간의 박자를 지켜낸다. 세상을 떠난 내 님 때문에 꺼이꺼이 우는 비탄의 정념이 “이제 비단옷 입고 부디 좋은 곳 가소”라며, 남은 이rmf들이 상복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곱게 명복을 비는 심상이다.
이 앨범이 녹음된 그 일요일의 공연이 있고 열하루 뒤, 스콧 라파로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돌이켜보면, 곡의 비탄이 자기 예언적인 비극으로 이어지게 된 정말 잔인한 거짓말이 실제로 일어난 셈이다. 빌 에반스는 크게 상심하여 이후 수개월간 연주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비극적 운명에 맞물려 나온 결과물이 ‘마스터피스’로 남게 되는 것을 우리는 곧잘 지켜본다.
앨범의 제작자이자 대표적인 재즈 레이블 리버사이드(Riverside)의 설립자 오린 킵뉴스는 1961년의 이 공연에서 했던 빌 에반스 트리오의 공연 녹음으로 이듬 해 빌 에반스 트리오의 간판 앨범 <Waltz for Debby>를 발표한다. 그리고 빌리지 뱅가드 일요일 공연에서 연주됐던 모든 곡들을 1981년 첫 번째 리마스터링 앨범으로, 2005년에는 <The Complete Village Vanguard Recordings, 1961>라는 리 이슈 CD 박스세트를 내놓았다. 오린은 공연 당시 빌리지 뱅가드 클럽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던 관객들의 두런거리는 대화 소리, 먹고 마시느라 식기와 잔이 쟁그렁 거리는 실내 소음을 외려 더 또렷하게 증폭하여 리마스터링을 했는데, 이게 참으로 절묘한 작업이었다.

세상에 더 없을 조합으로 사랑과 비탄의 노래를 완벽하게 연주하고 있는 재즈 삼인조의 무대,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의 123석 남짓한 좁은 지하의 한 클럽 공간에 앉아 연주를 들으며 그래도 먹을 건 먹으며 잡담은 해야겠다는 일상의 평범한 관객들, 이 성(聖)과 속(俗)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긴 이 앨범을 서울시 동쪽변의 어느 한강 공원을 거닐며 듣고 있다. 내 품속에서 10년 넘게 겨울을 함께 나고 있는 건반 앞 빌 에반스의 모습이 프린트된 두툼한 스웨트셔츠 차림과 함께.
글/사진 백영훈

1990년대의 팝과 록에 어지러이 매혹당하며, 장래 희망으로 FM 라디오 DJ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어렸을 적 바람과는 달리 글로벌 IT기업에서 25년 이상 일을 해오고 있다. 전업의 시간 이편에서는 팝을 비롯한 대중문화 딜레탕트로서의 삶을 즐기며, 여전히 팝 키드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음악을 입다』가 있다.
· 도서 정보 : 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935274
“그 소리는 음악이 늘 그곳에 존재했을 것만 같은, 시간을 초월한 품위와 느낌이었으며, 음들을 넘어서고 싶은 동경, 우리가 늘 도달해서 손끝으로 만지고 싶은 조용한 욕망과도 같은 것이었다.” - 피터 페팅거, 『빌 에반스 – 재즈의 초상』(황덕호 역) 중에서
최근 1년간 가장 자주 들었던 음반은 빌 에반스 트리오의 <Waltz for Debby>와 <Sunday at the Village Vanguard>다. 내란으로 인해 일상의 평화까지 어지럽혀졌던 지난겨울에는 정상의 복원만을 희망하며 <You Must Believe in Spring>을 ‘새겨’ 들었다. 요즘은 재즈평론가 황덕호 씨가 번역한 빌 에반스의 자서전을 읽고 있다. 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어김없이 내 주변을 정화시켜주는 빌 에반스 선생에 대해 기본 예의라도 갖추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 두꺼운 책이 재밌기까지 하다.
빌 에반스가 들려주는 음악, 그 연주의 미덕에 대한 수사는 자서전의 저자 피터 페팅거가 책의 서문에서 깔끔하게 정리하고 있어서, 그에 붙이거나 뺄 말이 없다. ‘늘 그곳에 존재’하는 ‘시간을 초월한 품위’, 그리고 ‘조용한 욕망’이라니, 빌 에반스의 음악을 들으면서 항상 느껴왔던 나의 감흥을 어쩌면 이렇게나 근사하고도 적확하게 묘사했단 말인가.
빌 에반스를 처음 들었을 때 받았던 인상은, 티끌 하나 허용할 수 없는 결벽증에 가까운 완벽주의자의 깔끔한 연주였다. 그런데 지난 1년간 수없이 들어오면서 <Waltz for Debby>와 <Sunday at the Village Vanguard>앨범의 잔잔하고 멀끔한 수면 밑에 휘감아 도는 스윙과 열정의 노래가 있음을 조금씩 알아채 나가고 있다. ‘재즈 막귀’임에도 빌 에반스 미학에 한 발 더 다가선 것 같아 기쁘다. 요즘은 특히<Sunday at the Village Vanguard>를 더 많이 듣는다. 1961년 6월 25일 일요일, 뉴욕의 재즈클럽 ‘빌리지 뱅가드’ 공연 실황을 담은 앨범이다. 두 번째 수록곡 <My Man’s Gone Now>을 듣고 나면 새삼 리플레이를 누른다.
<My Man’s Gone Now>는 뮤지컬 <포기와 베스>에서 남편의 죽음을 비탄하는 아리아로, 조지 거쉰이 만든 곡이다. 이 곡에선 특히 스콧 라파로의 베이스가 슬픔을 격정적으로 토로한다. 번쩍 귀가 쏠린다. 이어 빌 에반스는 “그래, 그 슬픔은 이러하지”라는 듯, 다시 건반으로 시간을 더듬고 주제를 다듬는다. 폴 모티언의 브러쉬는 빌과 스콧이 하는 대화의 톤을 지켜보며 약속한 시간의 박자를 지켜낸다. 세상을 떠난 내 님 때문에 꺼이꺼이 우는 비탄의 정념이 “이제 비단옷 입고 부디 좋은 곳 가소”라며, 남은 이rmf들이 상복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곱게 명복을 비는 심상이다.
이 앨범이 녹음된 그 일요일의 공연이 있고 열하루 뒤, 스콧 라파로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돌이켜보면, 곡의 비탄이 자기 예언적인 비극으로 이어지게 된 정말 잔인한 거짓말이 실제로 일어난 셈이다. 빌 에반스는 크게 상심하여 이후 수개월간 연주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비극적 운명에 맞물려 나온 결과물이 ‘마스터피스’로 남게 되는 것을 우리는 곧잘 지켜본다.
앨범의 제작자이자 대표적인 재즈 레이블 리버사이드(Riverside)의 설립자 오린 킵뉴스는 1961년의 이 공연에서 했던 빌 에반스 트리오의 공연 녹음으로 이듬 해 빌 에반스 트리오의 간판 앨범 <Waltz for Debby>를 발표한다. 그리고 빌리지 뱅가드 일요일 공연에서 연주됐던 모든 곡들을 1981년 첫 번째 리마스터링 앨범으로, 2005년에는 <The Complete Village Vanguard Recordings, 1961>라는 리 이슈 CD 박스세트를 내놓았다. 오린은 공연 당시 빌리지 뱅가드 클럽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던 관객들의 두런거리는 대화 소리, 먹고 마시느라 식기와 잔이 쟁그렁 거리는 실내 소음을 외려 더 또렷하게 증폭하여 리마스터링을 했는데, 이게 참으로 절묘한 작업이었다.
세상에 더 없을 조합으로 사랑과 비탄의 노래를 완벽하게 연주하고 있는 재즈 삼인조의 무대,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의 123석 남짓한 좁은 지하의 한 클럽 공간에 앉아 연주를 들으며 그래도 먹을 건 먹으며 잡담은 해야겠다는 일상의 평범한 관객들, 이 성(聖)과 속(俗)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긴 이 앨범을 서울시 동쪽변의 어느 한강 공원을 거닐며 듣고 있다. 내 품속에서 10년 넘게 겨울을 함께 나고 있는 건반 앞 빌 에반스의 모습이 프린트된 두툼한 스웨트셔츠 차림과 함께.
글/사진 백영훈
1990년대의 팝과 록에 어지러이 매혹당하며, 장래 희망으로 FM 라디오 DJ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어렸을 적 바람과는 달리 글로벌 IT기업에서 25년 이상 일을 해오고 있다. 전업의 시간 이편에서는 팝을 비롯한 대중문화 딜레탕트로서의 삶을 즐기며, 여전히 팝 키드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음악을 입다』가 있다.
· 도서 정보 : 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9352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