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이 씨가 선물한 여정][라이프] 강릉에서 맞이한 뜻밖의 시간

2025-12-26


봉이 씨가 선물한 여정 #4


원주를 끝으로 집으로 돌아갈지 잠시 고민했지만, 여전히 집으로 돌아가 봉이 씨가 없는 공간을 마주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몇 년 전 출간한 내 책을 입고해 준 강릉에 있는 책방, ‘강다방 이야기공장’이 떠올랐다. 책 말고도 볼 수 있는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에 여전히 책방을 꾸려가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독자이기도 하고 작가이기도 한 나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더구나 내 책을 입고한 책방의 사장님이라면, 어떻게든 내 책을 독자에게 닿게 하려고 누구보다 애쓴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마음 한편에 늘 감사한 마음이 있어 강원도에 온 김에 강릉에 들러 그 마음을 전하고 싶어졌다.


간단히 점심을 먹고 강릉으로 출발했다. 여름 휴가철이어선지 길이 제법 막혔다. 숙소에 들러 짐만 간단히 풀고 곧장 책방으로 향했다. 책방에 들어서자, 사장님의 다소 건조한 인사가 들려왔다. 책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다양한 독립출판물과 책이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었고, 곳곳에 사장님이 적어둔 듯한 짧은 문장이 눈에 띄었다. 그러다 손님이 두고 간 휴지에 적어둔 글귀 하나를 발견했다. 무미건조한 인사 속에 이런 해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겠거니 싶어 혼자 피식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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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드는 책 한 권을 집어 계산대로 향했다. 책방에서 책의 저자임을 밝히는 순간은 언제나 조금 긴장되면서도 설렌다. 『할 말은 하고 살게 1, 2』를 입고한 작가라고 하자, 사장님은 어색한 몸짓으로 반가움을 표하며 차 한 잔을 내어주었다. 마침, 저녁 시간이라 근처 맛집을 물었더니 사장님이 조심스럽게 저녁 식사를 같이하자는 제안을 했다. 책방을 찾는 저자에게 종종 식사를 대접한다며 혹여 내가 부담을 느낄까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평소라면 낯가림 때문에 망설였을 텐데, 그날만큼은 그 제안이 반가웠다. 그간 내 책을 소중히 다뤄준 것에 대한 고마움과 책방 사장님에 대한 궁금함이 일었기 때문이다. 마감 시간을 기다리며 책방 프로그램 중 하나인 ‘1년 후에 받는 편지’를 썼다. 펜을 잡으니 또 봉이 씨 생각이 밀려와 한동안 눈물을 훔쳤다. 그럼에도 내년의 나는 이 슬픔을 조금 더 단단하게 겪어내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편지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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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과 저녁 메뉴를 고민하던 중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강릉에는 중앙아시아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가 많아 러시아 음식점이 곳곳에 있다는 것이었다. 강릉에서 러시아 음식이라니 조금 뜬금없었지만, 색다른 음식을 시도하는 걸 즐기는 터라 러시아 음식을 먹어보기로 했다. 식당 문을 열자, 바깥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손님 대부분이 중앙아시아 사람이라 오히려 내가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다. 식사를 하며 서로 좋아하는 책을 추천하고, 강릉에 책방을 열게 된 계기와 책방을 운영하며 겪는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 등을 나누었다. 책과 책방이라는 매개체 덕분에 조금은 어색했지만,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다. 게다가 사장님은 잘 먹는 나를 보며, 맛있는 러시아 만두를 포장해 주겠다고 다른 러시아 음식점에도 데리고 갔다. 비록 사장님은 지금 나의 사정은 알지 못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글을 쓰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응원이 느껴져 마음이 뭉클해졌다. 감사함을 전하러 왔다가 더 큰 따뜻함을 안고 돌아온 저녁이었다.


다음 날은 바다 요가를 위해 새벽부터 몸을 일으켰다. 피곤한 마음에 괜히 신청했나 했던 마음은 고요한 강릉 앞바다를 마주하자 잦아들었다. 제주에 머물던 시절, 아침 바다를 바라보면서 하루하루의 내 기분을 살피곤 했다. 바다는 매일 그저 흐르고 있는데 내 마음은 날마다 변화무쌍했다. 그날도 아침 해가 떠오르는 바다를 가만히 보고 있는데 다시 봉이 씨 생각이 나를 붙들었다. 상실로 인한 당연한 슬픔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 슬픔이 계속해서 나를 짓누르지는 않을까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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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 수련 도중에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것은 단순한 상실감만은 아니었다. 그리움과 봉이 씨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그리고 나에 대한 화가 번갈아 올라왔다. 수련을 마친 뒤 시원한 오미자차로 차담 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요가 안내자가 내 눈물을 알아챘는지 조심스레 이유를 물었다. 봉이 씨가 떠난 이야기를 꺼내자, 처음 만난 사람들임에도 다정한 위로를 건넸다. 그때 문득 이 여정을 기록하고 싶어졌다. 어쩌면 서울부터 시작한 이 여정은 봉이 씨가 떠나면서 내게 남긴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자기는 떠났지만, 대신 내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라고 보내준 시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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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장 카페로 향해 한동안 바다를 바라보며 그간의 이야기를 조금씩 적어 내려갔다. 점심으로는 강릉 토속 음식인 감자옹심이를 먹었다. 우습게도 슬픈 감정은 음식 앞에서는 잠시 온데간데없어진다. 그럴 때면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봉이 씨는 떠나고 없는데 나만 이렇게 즐거워도 되는 걸까 하고. 오후에는 강릉 시내를 발길이 닿는 대로 쏘다녔다. 편집숍과 책방을 오가며 수십 곳의 문을 여닫았지만, 무엇을 보았는지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사람이 북적이는 공간을 피해 다녔겠지만, 그날만큼은 익명의 사람들로 분주한 곳에 있어야 마음이 편했다. 


그러다 고래책방에 들어가 『상실』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몇 페이지를 읽자마자 눈물이 터져 나왔다. 결국 책을 사서 책방 한쪽에 앉아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정신없이 읽어 내려갔다. 종종 인생에서 마주하는 막막한 순간에는 곁에 있는 사람의 위로에서 힘을 얻기도 하지만, 때로는 책이 건네는 위로가 마음을 헤아려준다는 걸 다시 한 번 경험했다. 한참 동안 책을 읽고 나오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었다. 새벽부터 몸을 움직인 탓에 피곤함이 몰려왔다. 간단히 저녁을 때우고, 숙소로 돌아와 기진맥진해 쓰러졌다. 돌아보면 평소 여행은 늘 혼자가 익숙했다. 하지만 봉이 씨가 떠나고 난 후 홀로 여행하는 건 전혀 달랐다. 세상에 덩그러니 남겨진 채 완벽한 혼자가 된 듯했다. 특히 며칠간 사람들 곁에 머물다 다시 혼자 여행하니 그 감각은 더욱 선명해졌다. 지워지지 않는 공허한 빈자리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라 잠시라도 머물 곳을 찾아 분주히 움직였던 하루가 아니었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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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황주(chant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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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집을 옮겨 다니며 삽니다. 글을 쓰고, 요가를 하며 호기심 많은 할머니로 늙고 싶습니다. 『할 말은 하고 살게 1』, 『 할 말은 하고 살게 2』 , 『 네가 좋은 집에 살면 좋겠어(공저)』 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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