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음악을 입다][음악] 공간에 수놓는 꿈결 같은 사이키델릭, 신윤철 <내 맘은 끝없는 우주를 향해>

2026-01-09


음악 애호가, 티셔츠 수집가, 『음악을 입다』의 백영훈 작가가 들려주는 티셔츠와 랜덤 플레이 리스트.
무작위, 우연, 계획되지 않은 흐름에서 발생하는 사건, 랜덤은 그래서 예상치 못한 선물이 되기도 합니다.
오래전 LP와 카세트테이프에서, 아이팟에서, 콘서트에서 듣던 팝과 록과 재즈를
태연하게 오늘의 일상에 랜덤으로 가져다 놓습니다.
인생의 헤아릴 수 없는 고민, 반복된 잡념을 오늘의 티셔츠와 플레이리스트로 잊어 보시기를.
적당한 스타일은 덤입니다.


연말이면, ‘모름지기 한 해의 마무리는 연말 콘서트지!’라는 조건반사가 일어난다. 2025년 말에도 어김없이 발동된 조건반사로 공연 예약 사이트에 뜬 리스트를 쭉 훑어보다가 한 팀에 시선이 꽂혔다. ‘서울전자음악단’. 다른 선택을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바로 예매 버튼을 눌렀고, 운 좋게 앞쪽 자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들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2005년 쌈지사운드페스티벌이었으니, 20년 만의 재회였다.


12월의 마지막 주말, 홍대의 작은 공연장은 이들의 팬들로 가득 찼다. 서울전자음악단의 마스터 신윤철이 무대로 나왔다. 그간 유튜브 채널에서 보아왔던 모습보다 조금 야윈 인상이었다. 비틀즈 멤버들의 얼굴 일러스트가 프린트된 흰색 셔츠가 이 날 그의 무대 의상이었다. 그와 친분이 있는 한 뮤지션 지인이 내게 했던 말이 순간 떠올랐다.

 

“윤철이 형은 폴 매카트니 사망 음모론을 제법 굳게 믿고 있어요.”


그 음모론이란, 폴 매카트니가 비틀즈 활동 중반이던 1966년에 사망했고 이후 ‘윌리엄 캠벨’ 혹은 ‘빌리 시어즈’라는, 그와 닮은 대역이 활동을 이어갔다는, 한때 널리 퍼졌던 도시전설이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신윤철이 별나다기보다 비틀즈에 대한 애정이 유난히 두터운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날 공연의 첫 곡은 <Ghost Writers>였다. 공교롭게 느껴진 이유가 있었다. 비틀즈, 특히 존 레논의 작법과 톤에서 영감을 받은 듯 들렸기 때문이다. 이 곡은 비틀즈 특유의 기복 있는 화성 감각과 대중적 선율 아이디어를 신윤철식 사이키델릭으로 풀어낸 모던 록이자 팝송이다. 영국발 비틀즈 사운드가 신윤철이라는 한국의 토양을 만나 또 다른 독창적 감성으로 다시 피어난 듯싶었다. 이 창조적 변주, 참으로 근사하다. 듣는 귀는 대개 비슷한가 보다. 이 곡은 2023년 11월 디지털 싱글로 발표된 뒤, 2024년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우수 록 노래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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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서 지켜본 서울전자음악단의 연주는 싱싱하고 탄탄했다. 신윤철이라는 기타 장인이자 록의 ‘오퇴르(auteur)’가 수십 년 다져온 음악적 뚝심이 가장 큰 비결일 것이다. 여기에 동료들의 색깔이 밀도를 더한다. 드럼을 맡은 강태희는 ‘홍대 어벤저스’라 불리는 밴드 ABTB의 리듬 장인답게 쉴 새 없이 다양한 결의 터치를 뿜어냈다. 그 위에서 베이스 김 엘리사의 연주는 리듬의 백업을 넘어 격정적인 무대 매너와 화성으로까지 무대를 받쳐줬다. 멤버 중 ‘록 스피릿’을 담당하고 있다 해도 무방할 정도다. 세컨 기타 최준하의 신중하고 꼼꼼한 연주 역시, 리더 신윤철이 그리고자 하는 사운드 스케이프의 캔버스를 성실하게 채색했다. 공연의 6할가량을 연주곡으로 채운 구성도 충분히 납득되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스쳤다.


‘오늘날의 장인이란, 방망이 깎는 노장처럼 홀로 뒷방에 틀어박힌 은둔자가 아닐 것이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여러 모양의 조각을 만들어보고, 그것을 들고 기꺼이 더 큰 장터를 찾아 나서는 호기심 많은 노련함을 지닌 이가 아닐까. 그런 거장을 믿고 함께 질주하는 후배들과의 합이라니.’


공연에서 연주하지 않아 아쉬웠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신윤철의 곡은 <내 맘은 끝없는 우주를 향해>이다. 이 곡에서는 인디 밴드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의 조웅이 보컬을 맡았다. 곡을 듣고 있노라면, 빼어난 음악이 만들어내는 공간의 온기가 느껴진다. 말 그대로다. 공간감이 감싸안는 온기. 그는 이렇게 노래한다.


“구름 같은 눈으로 날 바라보네
내 맘은 두둥실 하늘을 날고
사탕 같은 입술로 내게 속삭이네
내 맘은 끝없는 우주로 향해”


듣는 이의 마음을 ‘우주로 향하게’ 하는 데에는 조웅의 기교 없이 부드러운 보컬이 큰 몫을 한다. 평소 과묵하기로 알려진 신윤철이, 어려운 수사 없이 쉬운 낱말들로 꾹꾹 눌러 쓴 로망의 시를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낭만적인 서정시의 주된 화자는 사실 신윤철의 기타다. 멜로디의 반주로 수를 놓다가, 곡의 종반부는 그의 바랜 기타가 퍼즈(fuzz) 톤을 통해 사이키델릭 솔로로 절창(絕唱)한다.


이 기타, 그의 애장 모델인 1982년산 펜더 골드 스트라토캐스터다. 아버지이자 한국 록의 대부인 신중현에게 중학생 시절 물려받은 기타로 알려져 있다. 45년이 훌쩍 넘은 세월 탓에 ‘골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빛은 바랬지만, 록 팬들은 안다. 거장이 다뤄온 빈티지에서만 나는 소리가 있다는 것을. 록의 대부와 이미 또 다른 일가를 이루며 정상에 선 그의 두 기타리스트 아들, 신대철과 신윤철. 어쩌면 ‘아버지 이름에 혹시 생채기라도 나면’ 하는 일종의 무의식적 두려움을 달고 지내오지 않았을까? 그래서 음악의 완성도에 남다르게 애쓰는 동시에 또 한편으론 다른 음악을 다져온 궤적을 상상해 본다. 그래도 이들을 우러러 보는 청자가 떨치기 쉽지 않은 단상. ‘과연 DNA의 힘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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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전자음악단의 공연에서는 다행히 MD 후디를 판매하고 있었다. 서슴없이 지갑을 열었다. 이들의 지속 가능성에 겨자씨만 한 도움이라도 보태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내 티셔츠 컬렉션의 다양성이 중요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화려한 그래픽이 아닌 밴드명만 새겨진 디자인이지만, 서울전자음악단의 로고는 평소에 이들의 음악 색깔을 잘 표현하고 있다 여겨왔으니 충분하다. 그리고 조금 비싸도 좋으니, 우리 밴드들, 감각 있는 티셔츠 MD 제작에 조금 더 신경써주시길 바란다. 키링이나 스티커 들도 마찬가지다. 그저 입거나 차거나 붙이거나 하고서, 새해에도 계속 되어야 할 여러분의 그 공연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글/사진 백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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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의 팝과 록에 어지러이 매혹당하며, 장래 희망으로 FM 라디오 DJ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어렸을 적 바람과는 달리 글로벌 IT기업에서 25년 이상 일을 해오고 있다. 전업의 시간 이편에서는 팝을 비롯한 대중문화 딜레탕트로서의 삶을 즐기며, 여전히 팝 키드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음악을 입다』가 있다.
· 도서 정보 : 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935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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