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음악을 입다][음악] 봄날 호주식 카페 라떼 한 잔, 테임 임팔라 <The Less I Know The Better>
2026-04-03
애호가, 티셔츠 수집가, 『음악을 입다』의 백영훈 작가가 들려주는 티셔츠와 랜덤 플레이 리스트.
무작위, 우연, 계획되지 않은 흐름에서 발생하는 사건, 랜덤은 그래서 예상치 못한 선물이 되기도 합니다.
오래전 LP와 카세트테이프에서, 아이팟에서, 콘서트에서 듣던 팝과 록과 재즈를
태연하게 오늘의 일상에 랜덤으로 가져다 놓습니다.
인생의 헤아릴 수 없는 고민, 반복된 잡념을 오늘의 티셔츠와 플레이리스트로 잊어 보시기를.
적당한 스타일은 덤입니다.
재택근무가 잦아지다 보니, 동네 주변에서 괜찮은 카페를 찾아내고 단골로 삼는 일이 그야말로 중대사가 되었다. 당연하지만 커피 맛이 우선이고, 한두 시간 정도 일하거나 책을 읽을 수 있는 적당한 분위기여야 한다. 주인장과 점원의 친절함도 중요하고, 다른 주변 손님들의 대화 소리 데시벨도 적당한 수준이면 좋다. 여기에 흘러나오는 음악이 삼삼하면 더할 나위 없다.
지난겨울, 새로운 단골 카페를 텄다. 몇 달 동안 자주 드나들면서 데면데면 했던 카페주인장과 인사말도 나누게 되었고, 요즘은 커피를 주제로 제법 긴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커피의 정수는 산미인가, 혹은 진한 쓴맛에 있는가’부터 카페 라떼란 모름지기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라떼는 말이지”에 대한 원칙론까지 나누기에 이르렀다. 주인장은 호주 멜버른에서 수년간 커피를 배워온 고수임에도, 커피 딜레탕트인 단골의 어설픈 취향 이야기를 너그러이 들어준다.
3월의 어느 한 낮, 평소처럼 카페 라떼 한 잔을 시켰는데 주인장이 블라인드 테스트라며 두 잔을 주었다. 평소의 레시피로 제조한 것과 새로운 블렌딩의 비교 평가를 듣고 싶다는 것이었다. 단골 부심으로 신경을 기울이며 음미했다. 둘 다 균형 잡힌 가운데 각각의 풍미가 두드러졌다. 그녀가 만드는 커피는 호주식 커피다. 사실 호주는 이탈리아 이민자들의 에스프레소 자부심 위에, 스페셜티 커피의 실험 정신을 가장 선구적으로 입힌 곳이다. 정보를 찾아보니, 호주식 커피의 핵심은 주로 산미 있는 원두를 중심으로 ‘라이트 로스팅(약배전)’을 통해 원두 본연의 특성을 살리면서도, 우유의 질감을 좀 더 섬세하게 살리는 기술에 있다고 한다. 호주 바리스타의 이름을 건, 우리에게 익숙한 그 프랜차이즈 브랜드의 커피만 마셔 봐도 이런 설명에 수긍을 하게 된다.
라떼 두 잔을 번갈아 마시면서 스트리밍 음악채널을 켜는데 테임 임팔라(Tame Impala)의 <The Less I Know The Better>가 흘러나왔다. 이 곡이 발표된 2015년의 가을, 나는 커피 맛 좋기로 정평이 난 샌프란시스코의 미션 디스트릭트에 있는 한 커피숍에 앉아 카페 라떼를 마시고 있었고, 그때도 이 곡이 넓은 매장 안에 흘러나왔었다. 이런 절묘한 오버랩이라니.
테임 임팔라는 호주 퍼스(Perth) 출신의 케빈 파커가 만든 원맨밴드다. 글로벌 팝과 록씬에서 꾸준히 중량감 있는 스타들을 내는 곳이 호주다. 나는 케빈 파커를 볼 때마다 그의 천재연 하는 태도와 외모, 옷차림 등의 행색이 어쩐지 커트 코베인을 좇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다듬지 않은 금발과, 부스스한 모습에 면도도 제대로 하지 않은 한량 스타일. 미국에선 이들을 ‘슬래커(slacker)’라 부른다. 한량의 모습으로 트렌드 따위 초연하겠다는 자세 같은데, 그게 또 “이런 나를 남들과 다르게 봐주세요”라는 식으로 짐짓 포지셔닝하고자 하는 것 같이 보여서 재미있는 구석이 있다.
<The Less I Know The Better>가 발표된 지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기타에 이펙터를 걸어 베이스 기타처럼 연주하는 육감적 리프와 멜로디 충만한 케빈 파커의 팔세토식 보컬라인은 여전히 세련되며, 그루브도 매력적으로 넘실댄다. 전혀 구리지 않고 생생하다. 이 곡이 수록된 앨범 <Currents>를 듣고 있노라면, “그래 케빈 파커, 너는 충분히 천재연해도 돼. 정말 천재니까.” 인정하게 만다. 음악 팬들과 평단 사이에서 그는 실제 종종 “현대 사이키델릭(팝)의 커트 코베인(Kurt Cobain of Modern Psych)”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곡은 연인의 변심과 그 과정을 지켜보는 고통을 다룬다. 화자는 예전의 여자 친구가 다른 남자와 만나는 것을 목격한 후 그녀를 잊으려 애쓰고 다른 사람을 만나보려 하지만, 결국 그녀의 소식을 듣지 않는 것이 차라리 마음 편하다는 상심을 가사에 담고 있다. 고릴라와 틴에이지 로맨스, 성적 표현이 재치 있게 버무려진 이 곡의 뮤직 비디오도 또 다른 시각적 재미를 준다.
두 잔의 라떼를 다 마셔갈 때쯤, 주인장이 에스프레소 한 잔을 또 내왔다. 최근에 들여 온 산미 가득한 원두로 만들어 봤다고. 봄 날 한 낮의 예상치 못한 카페인 세례에 정신이 맑게 깨어났다. 예전에는 산미 있는 커피라면 손사래를 칠 정도였는데, 요즘은 그게 다 원두의 산미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던 이들이 만든 것만 마셔봐서 그러지 않았나 싶다. 호주는 이탈리아의 커피 유산에 산미를 제대로 다스리는 것으로 승부를 보는 것 같다.
나에게는 홍대 거리 어느 레코드숍에서 득템한 <Currents> 앨범 커버가 프린트된 셔츠가 하나 있다. 뮤지션이자 앨범 아트 전문가인 로버트 비티(Robert Beatty)가 디자인한 이 앨범 아트워크는 유체역학의 ‘와류 현상’을 시각화했다고 한다. 직선으로 흐르던 액체가 금속 구체라는 장애물을 만나 뒤엉키고 소용돌이치는 모습. 이 디자인은 피터 사빌(Peter Saville)이 작업한 조이 디비전(Joy Division)의 <Unknown Pleasures>을 연상하게 한다. 파동을 선으로 시각화했던 사빌의 차가운 미니멀리즘이 포스트 펑크의 허무를 상징했다면, 비티의 소용돌이는 시대 조류에 파동을 주는 어떤 사건이나 변종의 등장을 상징하는 듯싶다.
3월의 벚꽃나무에 조금씩 분홍빛 팝콘이 움트기 시작했다. 다음 주 정도면 만개할 것 같다. 중동 전쟁의 여파로 커피 수급에 영향이 미치기 시작했다는 카페 주인장의 우려에도 봄의 와류는 어김없이 이어지고 있다. “많이 알아서 좋을 것 없다”는 노래의 그루브에 제대로 다스린 산미 원두의 카페 라떼를 마시며, 가장 잔인한 달, 4월로 들어선다. 곧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워야 하건만, 2026년의 봄을 둘러싼 세상은 그럴 기미 없는 황무지다.
글/사진 백영훈
1990년대의 팝과 록에 어지러이 매혹당하며, 장래 희망으로 FM 라디오 DJ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어렸을 적 바람과는 달리 글로벌 IT기업에서 25년 이상 일을 해오고 있다. 전업의 시간 이편에서는 팝을 비롯한 대중문화 딜레탕트로서의 삶을 즐기며, 여전히 팝 키드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음악을 입다』가 있다.
재택근무가 잦아지다 보니, 동네 주변에서 괜찮은 카페를 찾아내고 단골로 삼는 일이 그야말로 중대사가 되었다. 당연하지만 커피 맛이 우선이고, 한두 시간 정도 일하거나 책을 읽을 수 있는 적당한 분위기여야 한다. 주인장과 점원의 친절함도 중요하고, 다른 주변 손님들의 대화 소리 데시벨도 적당한 수준이면 좋다. 여기에 흘러나오는 음악이 삼삼하면 더할 나위 없다.
지난겨울, 새로운 단골 카페를 텄다. 몇 달 동안 자주 드나들면서 데면데면 했던 카페주인장과 인사말도 나누게 되었고, 요즘은 커피를 주제로 제법 긴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커피의 정수는 산미인가, 혹은 진한 쓴맛에 있는가’부터 카페 라떼란 모름지기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라떼는 말이지”에 대한 원칙론까지 나누기에 이르렀다. 주인장은 호주 멜버른에서 수년간 커피를 배워온 고수임에도, 커피 딜레탕트인 단골의 어설픈 취향 이야기를 너그러이 들어준다.
3월의 어느 한 낮, 평소처럼 카페 라떼 한 잔을 시켰는데 주인장이 블라인드 테스트라며 두 잔을 주었다. 평소의 레시피로 제조한 것과 새로운 블렌딩의 비교 평가를 듣고 싶다는 것이었다. 단골 부심으로 신경을 기울이며 음미했다. 둘 다 균형 잡힌 가운데 각각의 풍미가 두드러졌다. 그녀가 만드는 커피는 호주식 커피다. 사실 호주는 이탈리아 이민자들의 에스프레소 자부심 위에, 스페셜티 커피의 실험 정신을 가장 선구적으로 입힌 곳이다. 정보를 찾아보니, 호주식 커피의 핵심은 주로 산미 있는 원두를 중심으로 ‘라이트 로스팅(약배전)’을 통해 원두 본연의 특성을 살리면서도, 우유의 질감을 좀 더 섬세하게 살리는 기술에 있다고 한다. 호주 바리스타의 이름을 건, 우리에게 익숙한 그 프랜차이즈 브랜드의 커피만 마셔 봐도 이런 설명에 수긍을 하게 된다.
라떼 두 잔을 번갈아 마시면서 스트리밍 음악채널을 켜는데 테임 임팔라(Tame Impala)의 <The Less I Know The Better>가 흘러나왔다. 이 곡이 발표된 2015년의 가을, 나는 커피 맛 좋기로 정평이 난 샌프란시스코의 미션 디스트릭트에 있는 한 커피숍에 앉아 카페 라떼를 마시고 있었고, 그때도 이 곡이 넓은 매장 안에 흘러나왔었다. 이런 절묘한 오버랩이라니.
테임 임팔라는 호주 퍼스(Perth) 출신의 케빈 파커가 만든 원맨밴드다. 글로벌 팝과 록씬에서 꾸준히 중량감 있는 스타들을 내는 곳이 호주다. 나는 케빈 파커를 볼 때마다 그의 천재연 하는 태도와 외모, 옷차림 등의 행색이 어쩐지 커트 코베인을 좇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다듬지 않은 금발과, 부스스한 모습에 면도도 제대로 하지 않은 한량 스타일. 미국에선 이들을 ‘슬래커(slacker)’라 부른다. 한량의 모습으로 트렌드 따위 초연하겠다는 자세 같은데, 그게 또 “이런 나를 남들과 다르게 봐주세요”라는 식으로 짐짓 포지셔닝하고자 하는 것 같이 보여서 재미있는 구석이 있다.
<The Less I Know The Better>가 발표된 지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기타에 이펙터를 걸어 베이스 기타처럼 연주하는 육감적 리프와 멜로디 충만한 케빈 파커의 팔세토식 보컬라인은 여전히 세련되며, 그루브도 매력적으로 넘실댄다. 전혀 구리지 않고 생생하다. 이 곡이 수록된 앨범 <Currents>를 듣고 있노라면, “그래 케빈 파커, 너는 충분히 천재연해도 돼. 정말 천재니까.” 인정하게 만다. 음악 팬들과 평단 사이에서 그는 실제 종종 “현대 사이키델릭(팝)의 커트 코베인(Kurt Cobain of Modern Psych)”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곡은 연인의 변심과 그 과정을 지켜보는 고통을 다룬다. 화자는 예전의 여자 친구가 다른 남자와 만나는 것을 목격한 후 그녀를 잊으려 애쓰고 다른 사람을 만나보려 하지만, 결국 그녀의 소식을 듣지 않는 것이 차라리 마음 편하다는 상심을 가사에 담고 있다. 고릴라와 틴에이지 로맨스, 성적 표현이 재치 있게 버무려진 이 곡의 뮤직 비디오도 또 다른 시각적 재미를 준다.
두 잔의 라떼를 다 마셔갈 때쯤, 주인장이 에스프레소 한 잔을 또 내왔다. 최근에 들여 온 산미 가득한 원두로 만들어 봤다고. 봄 날 한 낮의 예상치 못한 카페인 세례에 정신이 맑게 깨어났다. 예전에는 산미 있는 커피라면 손사래를 칠 정도였는데, 요즘은 그게 다 원두의 산미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던 이들이 만든 것만 마셔봐서 그러지 않았나 싶다. 호주는 이탈리아의 커피 유산에 산미를 제대로 다스리는 것으로 승부를 보는 것 같다.
나에게는 홍대 거리 어느 레코드숍에서 득템한 <Currents> 앨범 커버가 프린트된 셔츠가 하나 있다. 뮤지션이자 앨범 아트 전문가인 로버트 비티(Robert Beatty)가 디자인한 이 앨범 아트워크는 유체역학의 ‘와류 현상’을 시각화했다고 한다. 직선으로 흐르던 액체가 금속 구체라는 장애물을 만나 뒤엉키고 소용돌이치는 모습. 이 디자인은 피터 사빌(Peter Saville)이 작업한 조이 디비전(Joy Division)의 <Unknown Pleasures>을 연상하게 한다. 파동을 선으로 시각화했던 사빌의 차가운 미니멀리즘이 포스트 펑크의 허무를 상징했다면, 비티의 소용돌이는 시대 조류에 파동을 주는 어떤 사건이나 변종의 등장을 상징하는 듯싶다.
3월의 벚꽃나무에 조금씩 분홍빛 팝콘이 움트기 시작했다. 다음 주 정도면 만개할 것 같다. 중동 전쟁의 여파로 커피 수급에 영향이 미치기 시작했다는 카페 주인장의 우려에도 봄의 와류는 어김없이 이어지고 있다. “많이 알아서 좋을 것 없다”는 노래의 그루브에 제대로 다스린 산미 원두의 카페 라떼를 마시며, 가장 잔인한 달, 4월로 들어선다. 곧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워야 하건만, 2026년의 봄을 둘러싼 세상은 그럴 기미 없는 황무지다.
글/사진 백영훈
1990년대의 팝과 록에 어지러이 매혹당하며, 장래 희망으로 FM 라디오 DJ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어렸을 적 바람과는 달리 글로벌 IT기업에서 25년 이상 일을 해오고 있다. 전업의 시간 이편에서는 팝을 비롯한 대중문화 딜레탕트로서의 삶을 즐기며, 여전히 팝 키드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음악을 입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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