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음악을 입다][음악] 감히 내게 이십 년 동안의 지루함을 선고하다니, 제니퍼 원스 <First We Take Manhattan>
2026-04-10
애호가, 티셔츠 수집가, 『음악을 입다』의 백영훈 작가가 들려주는 티셔츠와 랜덤 플레이 리스트. 무작위, 우연, 계획되지 않은 흐름에서 발생하는 사건, 랜덤은 그래서 예상치 못한 선물이 되기도 합니다. 오래전 LP와 카세트테이프에서, 아이팟에서, 콘서트에서 듣던 팝과 록과 재즈를 태연하게 오늘의 일상에 랜덤으로 가져다 놓습니다. 인생의 헤아릴 수 없는 고민, 반복된 잡념을 오늘의 티셔츠와 플레이리스트로 잊어 보시기를. 적당한 스타일은 덤입니다.
요즘엔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베이시스트 플리 (Flea)가 발표한 솔로 신작앨범 <Honora>를 집중해서 듣고 있다. 플리가 화제가 될 때마다 하는 말이지만, 그리스인 조르바가 록스타로 현신(現身)하면 딱 플리가 아닐까 싶다.
그는 베이스와 트럼펫 연주를 오가며 재즈의 자유가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지점에 가 닿는다. 특히 <A Plea>에서 그가 지르는 사자후는 지금 세상에 울림이 크다. “사방에 증오가 느껴져. 그건 해결책이 아니야. 단 한 번도 해결책이었던 적 없지. 자, 내 말 들려? 그게 뭔지 우리 다 알잖아. 다리를 놓아, 빛을 밝혀!”
랜덤 플레이는 이 곡에 이어 레너드 코헨의 <Ain't No Cure for Love>를 점지해 준다. 코헨의 2009년 런던 공연 실황 앨범에 담긴 버전인데, 그는 노래를 부르기에 앞서 관객에게 다음과 같은 농담을 한다. “이 런던 무대에 다시 서기까지 15년이 걸렸네요. 그때 전 예순 살, 그저 무모한 꿈을 가진 꼬마였을 뿐입니다. 그동안 온갖 종류의 항우울제를 복용했고 철학과 종교를 공부했지만, 그럼에도 ‘명랑함(cheerfulness)’이 자꾸만 비집고 나오더군요.”
어수선하고 암울한 2026년 봄, 호주 출신 미국 훵크록의 조르바와 작고한 캐나다 출신의 음유 시인이 들려주는 두 가지 다른 결의 음악이 작은 위안을 준다. 지금, 가짜 뉴스와 탈 진실의 시대를 헤쳐가기 위해서 플리와 같은 자유와 용기가, 레너드 코헨의 우울함을 “자꾸만 비집고 나오”는 명랑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플레이리스트는 나를 <Ain't No Cure For Love>에 이어 제니퍼 원스(Jennifer Warnes)가 부르는 <First We Take Manhattan>로 데려간다. 그녀가 레너드 코헨의 곡들로 만든 걸작 앨범 <Famous Blue Raincoat (1987)>에 수록된 첫 번째 곡이다. 나는 이 곡이 코헨이 기성 체제에 대해 쓴 저항의 시 중 가장 빼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곡의 버전은 코헨의 것보다 제니퍼 원스가 부른 것이 더 빼어나다고 여긴다.
곡은 어느 기차역 플랫폼에서 들려오는 독일어 안내 방송으로 시작된다. 노래 전반은 블루스 기타 레전드 스티비 레이 본(Stevie Ray Vaughan)의 연주에 휘감긴다. 이 곡에서 그의 연주는 평소의 끈끈한 블루스가 아닌, 면도날 같은 예리한 프레이징이다. 그 위로 제니퍼 원스의 보컬이 얹히고, 예의 낭랑하고 청아한 비음 속에 섞인 나른한 뉘앙스가 기타와 어우러져 3분 46초간 이어진다.
가사는 서늘하다. “내부에서 시스템을 바꾸려 했다는 혐의로 지루함 이십 년 형을 선고받았다”로 시작되는 고백은 시인 코헨의 것이기도 하지만, 당시 제니퍼 원스의 상황과도 맞물린다. 평단은 그녀를 늘 ‘린다 론스타트의 하위 버전’이라는 좁은 평가의 틀에 가두고 2등 가수의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그녀는 이 곡으로 그 지루한 평가의 틀을 부수고 나왔다. 먼저 자본과 유행을 상징하는 뉴욕 맨해튼을 정복하고, 이제 당시 이념과 갈등을 상징했던 도시 베를린을 점령하겠다는 기개 어린 선언의 메시지다.
감히 내게 20년 동안의 지루함이라는 낙인을 찍고 틀에 가둔 세상의 호사가들에게 고하고 싶다. 나의 시와 그림, 노래는 당신들의 잣대를 넘어서는 다른 곳에 있다고. 젊은 시절의 나는 그 무의미한 선고들 때문에 약물에 의존해야 할 만큼 흔들렸지만, 이제 이 노래를 부르며 깨닫는다고. 타인이 내게 내린 판결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곡의 노랫말을 나는 대략 그렇게 받아들인다.
제니퍼 원스는 이 앨범으로 ‘2등 가수’의 낙인을 완전히 씻어내고 그녀만의 음악적 위상을 지닌 아티스트로 우뚝 섰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보컬이 나오기도 전, 스티비 레이 본이 들려주는 전주의 기타 프레이징부터 이미 그 지루한 인정 게임은 끝났다고 본다. 나른한데 맑은 보컬과 깍쟁이같이 날카롭지만 블루지한 그루브의 조합. 물론 이어지는 앨범의 다른 수록곡들, 예컨대 <Bird On A Wire>나 <Famous Blue Raincoat>, <Joan of Arc> 같은 곡에 가선 다른 매력으로 홀리게 되지만.
내가 이 앨범을 유독 아끼는 또 다른 이유는 그 근사한 아트워크에 있다. 침대 위에 무심하게 던져진 여성의 푸르디 푸른 레인코트, 그리고 그 밑에 놓인 구겨진 담뱃갑과 꽁초들. 보헤미안이면서도 체제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이미지는, 서울의 한 월급쟁이 회사원에게 묘한 낭만과 심리적 대리만족을 준다. 그동안 이 디자인이 새겨진 티셔츠를 뒤졌으나, 찾지 못했다. 결국 최근에 여러 개의 AI툴을 동원해 뚝딱뚝딱 씨름한 끝에, 나만의 티셔츠를 제작하고야 말았다. 이미지 제작용 프롬프트는 다음과 같았다.
“제니퍼 원스의 <Famous Blue Raincoat> 앨범 커버를 모티브로 한 티셔츠 디자인을 해줘. 침대 시트의 은은한 광택과 푸른 코트의 질감이 자연스럽게 티셔츠 원단 색상과 섞이도록 부드러운 그라데이션 처리를 해줘. 코트 옆의 담배꽁초 디테일은 빈티지한 느낌으로 살려줘.”
기대했던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앨범 분위기를 적당히 살릴 만큼의 티셔츠는 만들어진 것 같다. 사실 이미지 그라디이에션 작업에 실패해 배경에 격자무늬가 남은 티셔츠 한 벌이 남았지만, 이 또한 내겐 기념이 될 만하다. 저항의 노래와 시가 풍미했던 시대의 노래와 뮤지션들을 기념하고, 그들의 우울과 좌절을 음악으로 전해듣는 경험은 여전히 소중하다.
글/사진 백영훈
1990년대의 팝과 록에 어지러이 매혹당하며, 장래 희망으로 FM 라디오 DJ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어렸을 적 바람과는 달리 글로벌 IT기업에서 25년 이상 일을 해오고 있다. 전업의 시간 이편에서는 팝을 비롯한 대중문화 딜레탕트로서의 삶을 즐기며, 여전히 팝 키드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음악을 입다』가 있다.
애호가, 티셔츠 수집가, 『음악을 입다』의 백영훈 작가가 들려주는 티셔츠와 랜덤 플레이 리스트.
무작위, 우연, 계획되지 않은 흐름에서 발생하는 사건, 랜덤은 그래서 예상치 못한 선물이 되기도 합니다.
오래전 LP와 카세트테이프에서, 아이팟에서, 콘서트에서 듣던 팝과 록과 재즈를
태연하게 오늘의 일상에 랜덤으로 가져다 놓습니다.
인생의 헤아릴 수 없는 고민, 반복된 잡념을 오늘의 티셔츠와 플레이리스트로 잊어 보시기를.
적당한 스타일은 덤입니다.
요즘엔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베이시스트 플리 (Flea)가 발표한 솔로 신작앨범 <Honora>를 집중해서 듣고 있다. 플리가 화제가 될 때마다 하는 말이지만, 그리스인 조르바가 록스타로 현신(現身)하면 딱 플리가 아닐까 싶다.
그는 베이스와 트럼펫 연주를 오가며 재즈의 자유가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지점에 가 닿는다. 특히 <A Plea>에서 그가 지르는 사자후는 지금 세상에 울림이 크다. “사방에 증오가 느껴져. 그건 해결책이 아니야. 단 한 번도 해결책이었던 적 없지. 자, 내 말 들려? 그게 뭔지 우리 다 알잖아. 다리를 놓아, 빛을 밝혀!”
랜덤 플레이는 이 곡에 이어 레너드 코헨의 <Ain't No Cure for Love>를 점지해 준다. 코헨의 2009년 런던 공연 실황 앨범에 담긴 버전인데, 그는 노래를 부르기에 앞서 관객에게 다음과 같은 농담을 한다. “이 런던 무대에 다시 서기까지 15년이 걸렸네요. 그때 전 예순 살, 그저 무모한 꿈을 가진 꼬마였을 뿐입니다. 그동안 온갖 종류의 항우울제를 복용했고 철학과 종교를 공부했지만, 그럼에도 ‘명랑함(cheerfulness)’이 자꾸만 비집고 나오더군요.”
어수선하고 암울한 2026년 봄, 호주 출신 미국 훵크록의 조르바와 작고한 캐나다 출신의 음유 시인이 들려주는 두 가지 다른 결의 음악이 작은 위안을 준다. 지금, 가짜 뉴스와 탈 진실의 시대를 헤쳐가기 위해서 플리와 같은 자유와 용기가, 레너드 코헨의 우울함을 “자꾸만 비집고 나오”는 명랑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플레이리스트는 나를 <Ain't No Cure For Love>에 이어 제니퍼 원스(Jennifer Warnes)가 부르는 <First We Take Manhattan>로 데려간다. 그녀가 레너드 코헨의 곡들로 만든 걸작 앨범 <Famous Blue Raincoat (1987)>에 수록된 첫 번째 곡이다. 나는 이 곡이 코헨이 기성 체제에 대해 쓴 저항의 시 중 가장 빼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곡의 버전은 코헨의 것보다 제니퍼 원스가 부른 것이 더 빼어나다고 여긴다.
곡은 어느 기차역 플랫폼에서 들려오는 독일어 안내 방송으로 시작된다. 노래 전반은 블루스 기타 레전드 스티비 레이 본(Stevie Ray Vaughan)의 연주에 휘감긴다. 이 곡에서 그의 연주는 평소의 끈끈한 블루스가 아닌, 면도날 같은 예리한 프레이징이다. 그 위로 제니퍼 원스의 보컬이 얹히고, 예의 낭랑하고 청아한 비음 속에 섞인 나른한 뉘앙스가 기타와 어우러져 3분 46초간 이어진다.
가사는 서늘하다. “내부에서 시스템을 바꾸려 했다는 혐의로 지루함 이십 년 형을 선고받았다”로 시작되는 고백은 시인 코헨의 것이기도 하지만, 당시 제니퍼 원스의 상황과도 맞물린다. 평단은 그녀를 늘 ‘린다 론스타트의 하위 버전’이라는 좁은 평가의 틀에 가두고 2등 가수의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그녀는 이 곡으로 그 지루한 평가의 틀을 부수고 나왔다. 먼저 자본과 유행을 상징하는 뉴욕 맨해튼을 정복하고, 이제 당시 이념과 갈등을 상징했던 도시 베를린을 점령하겠다는 기개 어린 선언의 메시지다.
감히 내게 20년 동안의 지루함이라는 낙인을 찍고 틀에 가둔 세상의 호사가들에게 고하고 싶다. 나의 시와 그림, 노래는 당신들의 잣대를 넘어서는 다른 곳에 있다고. 젊은 시절의 나는 그 무의미한 선고들 때문에 약물에 의존해야 할 만큼 흔들렸지만, 이제 이 노래를 부르며 깨닫는다고. 타인이 내게 내린 판결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곡의 노랫말을 나는 대략 그렇게 받아들인다.
제니퍼 원스는 이 앨범으로 ‘2등 가수’의 낙인을 완전히 씻어내고 그녀만의 음악적 위상을 지닌 아티스트로 우뚝 섰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보컬이 나오기도 전, 스티비 레이 본이 들려주는 전주의 기타 프레이징부터 이미 그 지루한 인정 게임은 끝났다고 본다. 나른한데 맑은 보컬과 깍쟁이같이 날카롭지만 블루지한 그루브의 조합. 물론 이어지는 앨범의 다른 수록곡들, 예컨대 <Bird On A Wire>나 <Famous Blue Raincoat>, <Joan of Arc> 같은 곡에 가선 다른 매력으로 홀리게 되지만.
내가 이 앨범을 유독 아끼는 또 다른 이유는 그 근사한 아트워크에 있다. 침대 위에 무심하게 던져진 여성의 푸르디 푸른 레인코트, 그리고 그 밑에 놓인 구겨진 담뱃갑과 꽁초들. 보헤미안이면서도 체제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이미지는, 서울의 한 월급쟁이 회사원에게 묘한 낭만과 심리적 대리만족을 준다. 그동안 이 디자인이 새겨진 티셔츠를 뒤졌으나, 찾지 못했다. 결국 최근에 여러 개의 AI툴을 동원해 뚝딱뚝딱 씨름한 끝에, 나만의 티셔츠를 제작하고야 말았다. 이미지 제작용 프롬프트는 다음과 같았다.
“제니퍼 원스의 <Famous Blue Raincoat> 앨범 커버를 모티브로 한 티셔츠 디자인을 해줘. 침대 시트의 은은한 광택과 푸른 코트의 질감이 자연스럽게 티셔츠 원단 색상과 섞이도록 부드러운 그라데이션 처리를 해줘. 코트 옆의 담배꽁초 디테일은 빈티지한 느낌으로 살려줘.”
기대했던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앨범 분위기를 적당히 살릴 만큼의 티셔츠는 만들어진 것 같다. 사실 이미지 그라디이에션 작업에 실패해 배경에 격자무늬가 남은 티셔츠 한 벌이 남았지만, 이 또한 내겐 기념이 될 만하다. 저항의 노래와 시가 풍미했던 시대의 노래와 뮤지션들을 기념하고, 그들의 우울과 좌절을 음악으로 전해듣는 경험은 여전히 소중하다.
글/사진 백영훈
1990년대의 팝과 록에 어지러이 매혹당하며, 장래 희망으로 FM 라디오 DJ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어렸을 적 바람과는 달리 글로벌 IT기업에서 25년 이상 일을 해오고 있다. 전업의 시간 이편에서는 팝을 비롯한 대중문화 딜레탕트로서의 삶을 즐기며, 여전히 팝 키드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음악을 입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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