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음악을 입다][음악] 보드라운 마음, 불안하고 거친 파도를 헤쳐 가는 이에게, 본 이베어 <Perth>

2026-04-17


애호가, 티셔츠 수집가, 『음악을 입다』의 백영훈 작가가 들려주는 티셔츠와 랜덤 플레이 리스트.
무작위, 우연, 계획되지 않은 흐름에서 발생하는 사건, 랜덤은 그래서 예상치 못한 선물이 되기도 합니다.
오래전 LP와 카세트테이프에서, 아이팟에서, 콘서트에서 듣던 팝과 록과 재즈를
태연하게 오늘의 일상에 랜덤으로 가져다 놓습니다.
인생의 헤아릴 수 없는 고민, 반복된 잡념을 오늘의 티셔츠와 플레이리스트로 잊어 보시기를.
적당한 스타일은 덤입니다.


본 이베어(Bon Iver)의 <SPEYSIDE>가 흘러 나온다. 어제 오후에는 크루앙빈(Khruangbin)의 음악을 노동요처럼 들려주던 스트리밍 서비스가 오늘 알고리즘 선곡으로 선택한 곡은 본 이베어다. 이 곡은 지난 해 발표된 앨범 <SABLE, fABLE>에 수록된 곡인데, 어쿠스틱 기타와 비올라 연주 위로 이 팀의 프론트맨 저스틴 버논의 보컬이 구성지게 흐른다. 전자 사운드의 결을 여러 겹 쌓았던 전작의 방식에서 벗어난 원형적인 포크 음악이다. 이런 음악적 변화 시도를 통해 오롯이 전하는 담백한 감성이 인상적이었는지, 많은 이들이 본 이베어의 이 새 앨범을 ‘2025년의 최고 앨범’중 하나로 꼽았다.


‘참, 몇 년 전에 내가 본 이베어의 내한 공연을 갔었지. 언제였지?’ 공연에 대한 기억은 대개 시간보다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는 듯하다. 나는 서울 광진구의 강변에 있는, 그 동안 이름이 몇 차례 바뀐 그 공연홀 2층의 한 발코니석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곳에서 상반신을 한껏 웅크린 채 무대를 바라보는 내 모습을 어렵지 않게 그려본다. 누구와 함께 갔던가, 혼자 갔었나? 기억나지 않는다. 사람(들)에 대한 기억도 쉬이 바스러져 간다. 찾아보니 2020년 1월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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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 사진함을 열어 당시에 찍었던 사진들을 뒤져본다. 앨범의 사운드스케이프를 현장감 있게 제대로 들려주고 보여주겠다는 의지가 그 날의 무대 위 세팅에 드러나 있었다. 투어 밴드의 멤버 수에 맞춰 구성된 여섯 개의 포디움과 음악 전개에 맞춘 조명의 극적인 역동. 공연 후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무대 사진들과 함께 다음과 같은 인상평을 인스타그램에 남겼다. 


“산골 오두막에서 석 달 동안 앨범의 곡들을 썼다는 저스틴 버논. 소닉 플레져(sonic pleasure). 전자음으로 재기 있게 버무린 이들의 음악을 들으며 에코(ecology)를 떠올리는 건, 내가 본 이베어의 평소 이미지에 맞춰 어떤 그림을 먼저 떠올리고 있어서인가, 아니면 이 팀이 만든 소닉 플레져, 즉 사운드의 즐거움이 자연스레 나를 향하기 때문인가. 멍하니 듣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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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6년 넘은 시간이 흘렀고, 본 이베어는 그 동안 단 하나의 앨범인 <SABLE, fABLE>로 새롭게 나아갔지만, 나는 여전히 이들이 2011년 발표한 두 번째 앨범이자 가장 대중적으로 성공했던 앨범 <Bon Iver>의 세계에 머물고 있다. 6년 전 공연 직후 소셜미디어에 남긴 감상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도 든다. 즉 자연과 생태, 순환을 그리는 저스틴 버논의 음악적 중심에 이들의 매력이 제대로 담겨 있다고 여긴다. 앨범 수록곡의 제목을 열 곳의 지명으로 삼은 것도 그런 감상을 돕는다.

 

나는 <Perth>라는 곡을 특히 좋아하는데, 이 곡이 배우 히스 레저를 추모하며 쓴 곡이라는 걸 최근에야 알았다. 호주의 퍼스는 히스 레저의 고향이자 작고한 그의 묘지가 있는 곳이다. 저스틴 버논은 뮤직비디오 감독이자 친구인 맷 아마토(Matt Amato)와 함께 작업을 하던 중, 그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히스 레저가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접했다. 저스틴은 “나는 그(맷 아마토)를 아주 오랫동안 안아주었다. 그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고, 나는 그 옆에서 그의 슬픔을 함께 겪어야 했다. 히스가 자라온 호주 퍼스에 대한 맷의 기억과 추억들이 나에게 영감을 주었다.”며 이 곡이 준비하는 앨범 <Bon Iver>의 첫 번째 곡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고 한다. 


상실에서 시작된 이 곡은 자연과 순환의 사이클을 그린다. 



아직 깨지 못한 채, 나는 일어서려 합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 속에, 여전히 살아있음을
여전히 살아있음을
여전히 살아있음을
어머니의 품에서, 혹은 찰나(moth)의 순간 밖으로
부드러운 안식을 위해 숲을 헤치며
내가 높은 곳으로 인도되었음을 알아야 하기에
이제 당신의 이야기.


<Holocene>과 <Beth/Rest>를 이어 듣는다. <Perth> 못지않게 좋아하는 수록곡들이다. 그리고는 문득 히스 레저의 모습이 생각나 그가 출연한 영화의 명장면들을 유튜브에서 다시 찾아본다. <다크 나이트 (2008)>에서 그가 연기한 조커는 정말이지, 사람이 겪을 법한 모든 종류의 트라우마를 한 몸에 다 받아낸 후 냉소와 허무주의만 남은, 마치 탈색된 광대 같았다고나 할까. 그저 ‘빌런’으로만 칭하기에는 부족한, 굉장히 모순된 이미지의 아우라가 있다. 한없이 불안한 자아가 자신의 안위 따위 괘념치 않는다. 끊임없는 위험에 노출된 유약함의 조합이 빚어낸 불균형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가 연기한 조커가 외부를 향해 혼돈을 쏟아내는 인물이었다면,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 (2006)> 에서 연기한 카우보이 에니스 델 마는 거대한 슬픔과 억압을 내면으로 삼키는 인물이다. 그는 영화 내내 입술을 거의 떼지 않고 웅얼거리듯 말한다. 하고 싶은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캐릭터다. 그는 좀처럼 울거나 소리치지 않는데, 연인 잭 트위스트(제이크 질렌할 분)와 헤어진 후 골목길에서 벽에 머리를 찧으며 오열하는 단 한 번의 분출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보드랍고 유약하기 그지없던 자아는 불안함을 상수로 깔아두기 마련이다. 그리고 불안은 언제든 사회와 주변인들의 요구와 압박에 맞서 그들이 어쩔 수 없이 두르고 있던 여러 꺼풀의 외피에 불을 지필 수 있다. 곧 휘발되고 마는 자아. 우리가 종종 접하는 예술가들의 마지막 모습이 그러했다. 평소 즐겨 들어왔던 본 이베어의 최애곡이 그런 모습 끝에 세상을 떠나 간 히스 레저를 추모하는 메시지였다니. 그럼에도 여전히 그가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 마음에 살아있음을 전하는 순환의 풍경을 그리는 노래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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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내한공연에서 장만해 옷장에 모시고 있던 본 이베어의 티셔츠를 꺼내어 펼쳐본다. 네 번째 정규 앨범 <i,i> 시기의 아트워크가 프린트된 티셔츠다. 앞면엔 뒤집혀진 노란색 스마일 밑으로 PEACE라고 쓰인 깃발이 있고, 나뭇잎이 그것을 받치고 있다. 이 셔츠를 범상치 않게 만드는 건 뒷면인데, 빨강, 노랑, 파랑으로 겹쳐진 얼굴 형상과 태양, 숫자 ‘999’와 밴드명이 조악해 보이면서도 강렬하다. 반전주의자 내지 히피 예술가, 혹은 유사 종교 집단의 표식같아 보이기도 한다. 처음엔 꽤나 특이하다 생각했었는데, 갈수록 끌리는 구석이 있다. 에릭 티모시 칼슨(Eric Timothy Carlson)이라는 아티스트의 작품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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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가 부쩍 일찍 찾아온 2026년 4월 중순 어느 한 낮, 나는 이 티셔츠를 입고 동네를 한 바퀴 돈다. 그리고 본 이베어의 두 번째 앨범 <Bon Iver>를 다시 한 번 정주행한다. 어제 찾아본, 퍼스에 있다는 히스 레저의 묘지에 새겨진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구절을 떠올리다 어쩌면 어떤 삶은, 아니 어떤 죽음은 마침표를 찍은 뒤에야 비로소 진정한 첫 문장을 써 내려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잠깐 해본다.     


“산 정상에 올랐을 때에야 비로소 당신은 진정한 오르기(비상)를 시작할 것이다.  대지가 당신의 육신을 거두어갈 때에야 비로소 당신은 진정으로 춤추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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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백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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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의 팝과 록에 어지러이 매혹당하며, 장래 희망으로 FM 라디오 DJ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어렸을 적 바람과는 달리 글로벌 IT기업에서 25년 이상 일을 해오고 있다. 전업의 시간 이편에서는 팝을 비롯한 대중문화 딜레탕트로서의 삶을 즐기며, 여전히 팝 키드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음악을 입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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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정보 : 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935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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