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음악을 입다][음악] 이곳에 머물러, 늘 기억하지 못한 채로, 브라이언 이노 <By This River>

2026-04-24


애호가, 티셔츠 수집가, 『음악을 입다』의 백영훈 작가가 들려주는 티셔츠와 랜덤 플레이 리스트.
무작위, 우연, 계획되지 않은 흐름에서 발생하는 사건, 랜덤은 그래서 예상치 못한 선물이 되기도 합니다.
오래전 LP와 카세트테이프에서, 아이팟에서, 콘서트에서 듣던 팝과 록과 재즈를
태연하게 오늘의 일상에 랜덤으로 가져다 놓습니다.
인생의 헤아릴 수 없는 고민, 반복된 잡념을 오늘의 티셔츠와 플레이리스트로 잊어 보시기를.
적당한 스타일은 덤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주제로 한 『하루키를 말할 때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 전시회에 다녀왔다. 생각보다 관객이 많지 않았는데, 문득 요즘 젊은 독자들에게 하루키의 글이 어떻게 다가가고 있나 궁금해졌다. 90년대부터 풍미한 이른바 ‘하루키 월드’의 감성이 동시대에 여전히 볼거리로 이어지고 있다니, 그의 작품들이 점차 고전으로 가는 문턱을 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그러다 전시장을 나서는데, 문득 떠오르는 곡이 있었다. 작가가 애정하는 스탄 겟츠나 셀로니어스 몽크, 혹은 비치보이스나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곡은 아니었다.   

 

머릿속을 떠돈 음악은 <By This River>, 브라이언 이노(Brian Eno)의 곡이다. 음악 팬들에게 익숙한 브라이언 이노는 70년대 영국의 록 그룹 ‘록시뮤직(Roxy Music)’의 멤버이자, 신디사이저를 사용해 공간감과 분위기 조성에 집중하는 ‘앰비언트(Ambient)’ 음악의 선도자다. 그는 데이빗 보위, U2, 콜드플레이 등과 같은 거물 아티스트들의 프로듀서로도 잘 알려져 있다. 어쨌든 전시를 보고 나오며 1977년에 발표된, 미니멀하고 휑한 심상이 남는 이 짧은 곡을 찾아 듣게 된 건, 하루키가 발표한 두 번째 장편 소설 『양을 쫓는 모험 (1982)』의 마지막 문단이 내 기억의 서랍 속에서 툭 튀어 나왔기 때문이다.        


 

“나는 강을 따라서 하구까지 걸어가 마지막으로 남은 50미터 정도 되는 모래사장에 앉아 두 시간 동안 울었다. 난생 처음 그렇게 울어 보았다. 두 시간 동안 울고 나서 겨우 일어설 수가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나는 일어서서 바지에 묻은 모래를 털었다. 날은 완전히 저물었고, 걷기 시작하자 등뒤에서 파도 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하루키의 소설 문장과 묘사는 그의 작품 제목 마냥 대개 “쿨하고 와일드” 하며,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 가까운데, 언급한 마지막 문장이 여전히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다. 이는 그가 작품 속 주인공을 통해서 잘 드러내는 법이 없는 격정이 의외로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줄거리와 서사는 지면 관계로 생략하지만, 이 구절은 하루키 장편 소설의 전매 특허 같은 주인공 자아의 정체성을 둘러싼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초현실적 모험과 상실, 자각의 실마리, 그리고 계속 나아감으로 이어지는 플롯 구조를 유난히 극적으로 맺었다고 본다. <양을 쫓는 모험>을 처음 읽었던 이십 대의 나는 이 구절을 마주하며 ‘이것 참 친절한데?’라고 생각했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 다시 읽는다면 과연 어떤 느낌이 들까.

 

어쨌든 전시회를 본 후에 <양을 쫓는 모험>의 주인공이 앉아 두 시간 동안 울었던 그 강변이 떠올랐고, 이는 브라이언 이노가 덤덤하게 노래한 “이 강변”으로 이어지게 된, 그러니까 오늘 발생한 랜덤 팝송의 연쇄 작용 메커니즘이었던 것이다. <By This River>의 노랫말은 이렇다. 

 

여기 우리, 이 강가에 멈춰 서 있네
너와 나, 끝없이 무너져 내리는 하늘 아래서
떨어지네, 또 떨어지네, 또 끝없이 내려앉고 있어
하루를 건너며, 마치 바다 위에 떠 있는 듯
이곳에 머물러, 늘 기억하지 못한 채로
왜 우리가 왔는지, 왔는지, 또
왜 왔는지 궁금해져.

 

『양을 쫓는 모험』의 주인공 ‘나’에게 있어 소설의 마지막에 나오는 강변의 모래사장에 앉기 전과 아마도 실컷 울고 난, 그 두 시간 후의 모습은 실로 아득한 간극이 있어 보인다. 그에게 친한 친구였던 ‘쥐’는 사라졌고, 아내와는 헤어졌으며, 그의 이십대는 지나갔다. “난생 처음 그렇게 울어” 본 그의 두 시간 전은 그에게 온전히 남아서 기억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에 <By This River>의 노랫말 중 “이곳에 머물러, 늘 기억하지 못한 채로”를 곱씹어보게 된다. 우리가 이곳에 왜 오게 됐는지 ‘기억하는 행위 자체를 잊었다(forgot remembering)’는 체념이 아니라, 어떻게든 기억해 보려 애쓰지만 번번이 좌절되고 마는 ‘시도(failing to remember)’에 가깝다. 무언가 기억해 보고자 애를 쓰는데 안 된다는 것이다. 과연 ‘나’의 상처와 상실은 눈물로 싸악 씻겨 나갔을까? 그래서 그런 카타르시스가 내 앞에 놓인 시간과 삶의 동력이 될 것인가?  

 

그러나 세상의 비의는 여전히 불가해하고, 우리 삶은 복잡계에 불어대는 삭풍 속에서 계속 흔들리는 연약한 촛불이다. 쇼츠 영상과 밈, 초거대 언어모델과 그 조수(assistant) 도구들이 빚어내는 이 AI의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 시대에 비의와 복잡계는 점점 두꺼운 틀로 우리를 무언가의 본질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하루키가 맺어준 브라이언 이노의 곡을 듣다가 이주호 작가의 노자 도덕경 탐구 에세이 『사뿐사뿐, 노자가 걸어왔다』를 펼쳐본다. 작가는 도덕경의 통찰을 몸으로 익혀 풀어내고 있는데, 그가 서울 종로구의 수성동 계곡에서 고된 산책 여정의 마무리를 묘사하는 구절에서 어떤 위안을 구하게 된다.      

 “이 계곡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게 놀랍고도 안심이 됩니다. 계곡은 오랜 세월 자신을 감춰 왔고, 저는 어느 밤 계곡 아래 숨어들어 낮 동안 세상에 숨겨 왔던 제 말과 생각을 꺼내 봅니다. 내 목숨 어디로 흘러갈까, 어디까지 흘러갈까. 말간 얼굴을 실은 종이배가 어느 들판 달 아래를 떠갑니다. 어디에 닿고 싶다는 바람은 없습니다. 인생은 닿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다 불현듯 멈춰 서는 거니까요. 오늘 무사했으니 할 일을 다 했네요.”


오늘 새삼, 내가 하루키의 소설과 브라이언 이노의 곡에 이어 『사뿐사뿐, 노자가 걸어왔다』를 읽으며 얻는 위안은 이 쉼 없이 몰아치는 여전한 삶과 세상의 이해되지 않음을 몸으로 다시 한 번 진정 열심히 겪어낸 후, 격정이나 울화를 치워내고 다시 숨을 고르며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무아의 경지, 그 친절하고 덤덤한 전언(傳言)들의 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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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 4초, <By This River>를 듣는 그 시간 동안엔 그 어떤 생각이라도 들게 마련이다. 그만큼 백지장 같은 곡인데다, 이 곡이 수록된 앨범 <Before and After Science>의 아트워크 또한 담백하다. 아티스트의 포트레이트가 검정색 실루엣으로 프린트됐는데, 독일 표현주의 예술 같은 느낌도 준다. 나는 이 앨범 커버 디자인이 프린트된 흰색 티셔츠를 L.A.의 한 플리마켓에서 거의 새 것과 다름없는 빈티지 상태로 구매했다. 당시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시장에 온 내가 좀 측은하게 보였는지, 판매자가 꽤 저렴한 가격에 자비를 베풀어준 기억이 생생하다.




글/사진 백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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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의 팝과 록에 어지러이 매혹당하며, 장래 희망으로 FM 라디오 DJ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어렸을 적 바람과는 달리 글로벌 IT기업에서 25년 이상 일을 해오고 있다. 전업의 시간 이편에서는 팝을 비롯한 대중문화 딜레탕트로서의 삶을 즐기며, 여전히 팝 키드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음악을 입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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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정보 : 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935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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