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딩 여행작가의 여행법][여행] 인생도 여행도 예측불허, 독일 바덴바덴

직딩 여행작가의 여행법 #6



독일 여행을 준비하면서 참 야무진 꿈을 꿨다. 처음에는 요즘 전 세계적으로 주목 받는 베를린에서 트렌디한 여행을 즐겨보려 했었다. 하지만 이번 여행 멤버의 연령대가 워낙 다양한지라 아무래도 모두가 좋아할 여행은 아닐 것 같았다. 게다가 독일에 대해 공부하면서 깨달은 바, 독일 땅은 생각보다 무척 컸다. 우리가 끊은 비행기는 독일 프랑크프루트 인아웃. 열흘도 안 되는 일정으로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 그리고 다른 도시까지 아우르며 뛰어다니기엔 체력적으로 무리라는 판단이 섰다.


여정을 달리 짜기 시작했다. 우선 베를린은 포기했다. 대신 프랑크푸르트에 아파트 한 채를 빌리고, 숙소를 옮기지 않은 채 매일 주변 소도시를 다녀오기로 했다. 독일 지도에 프랑크푸르트를 중심으로 한 방사형 여정이 완성되자 마침내 독일로 떠날 날이 다가왔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는 도시는 상당히 많았다. 와인과 케이블카의 도시 ‘뤼데스하임’, 20대 첫 배낭여행 때도 방문했던 동화 마을 ‘로텐부르크’, 훈제 맥주Rauchbier를 마시며 도시를 내려다볼 수 있는 ‘밤베르크’와 소박하지만 가장 독일다웠던 ‘젤리켄슈타트’. 거기에 운치 있는 대학도시 ‘하이델베르크’와 프랑켄 와인을 마시며 유유자적 즐길 수 있는 ‘뷔르츠부르크’까지. 하지만 이 모든 곳을 통틀어 나를 가장 감동시킨 곳은 바로 바덴바덴Baden-Baden이었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바덴바덴은 독일의 유명한 온천 마을이다. 오스 강을 끼고 있어 물이 좋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더 특별할 수도 있는 것이 IOC(국제 올림픽 위원회)가 바로 이곳 바덴바덴에서 제24회 올림픽 경기를 한국에서 개최한다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 올림픽이 바로 1988년 서울 올림픽이었다.


바덴바덴 행 기차를 타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다. 아침식사를 하고 온천욕을 위한 의상과 각종 준비물을 짐 가방에 챙겨 넣었다. 그런데 기차를 타고 가며 구글로 검색을 해보니 우리가 가려는 온천장 카라칼라 테르메(Caracalla Therme)가 쉬는 날이었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온천장으로 직접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현지 직원 왈, 오늘도 영업을 하고 있으니 걱정 말고 오란다. 무사히, 예정대로 온천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나는 전보다 더 들떴고, 기차에서 내려 버스를 갈아타고 온천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한없이 가볍기만 했다.


그러나 여행은 역시 예측불허! 입구에서부터 불길한 기운이 스물스물 올라왔다. 온천장은 대공사 중이었다. 충격과 분노로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던 나는 마침 지나가던 직원을 붙잡고 물었다. 정녕 온천장이 문을 닫은 거냐고. 그는 정문 앞에 붙여둔 플랜 카드를 보여주며 리노베이션 기간임을 확인해 주었다. 쿵….


문제의 카라칼라 테르메.


도대체 내 전화를 받은 그 직원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동양인 관광객을 골탕 먹이는 게 그리 즐거웠을까? 화도 나고 기운도 빠지고 배까지 고파져 일단 주변 중심가를 걷기 시작했다. 해산물 요리로 유명한 캐주얼 레스토랑 노르트제(Nordsee)에서 먹고 싶은 걸 이것저것 잔뜩 주문하고는 독일 생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사람 마음 참 간사하다고,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니 마음이 온화해지면서 불처럼 솟았던 화가 조금은 가라앉았다. 기차에 버스까지 몇 번을 갈아타며 온 곳인데 이대로 돌아가기에는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동네를 산책하기로 마음먹었다.



시내 중심가를 따라 걷다 보니 강가 산책로가 나왔다. 작은 고성 같은 호텔들이 강변에 줄줄이 이어져 있고, 호텔의 1층 정원에는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즐기는 어르신들이 가득했다. 여유롭고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우연히 돌린 발걸음 끝에 만난 아름다운 시냇물과 나무, 잔디와 벤치…. 그 모든 것이 이상적으로 어우러져 있었다. 한참을 감탄과 함께 걷다가 정원이 특히 아름다운 어느 호텔 야외 카페에 앉아 커피와 아이스크림도 즐겼다.


만약 온천장이 문을 열었다면 나는 이 산책로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고 이곳을 떠났을 것이다. 바덴바덴은 독일인들이 은퇴해서 살고 싶어 하는 곳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것이 그저 지하 2천 미터에서 솟아나는 온천탕, 카라칼라 테르메 때문만은 아님을 나는 알게 되었다. 이 얼마나 큰 행운이란 말인가.



어떤 것이 전부라고 믿었지만, 사실 그것이 정답이 아니었을 수 있다. 또 다른, 새로운 선택지가 있을 수도 있다. 그건 여행도, 인생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너무 좌절하지도 슬퍼하지도 말기를. 때로는 예측불허의 사고가 내 삶을 훨씬 더 풍요롭고 행복하게 해주는 경우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여유롭게 아름다운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즐겼던 바덴바덴을 나는 미래에 다가올 내 환갑여행 파티 장소로 정했다. 누구와 함께 가게 될지, 어떤 여행이 될지 설레어 하며 내 미래의 환갑여행을 상상해 본다. 바덴바덴이 내게 준 또 하나의 선물인 셈이다.





글/사진 루꼴

최소 2개월에 한 번은 비행기를 타줘야 제대로 된 행복한 인생이라고 믿는 여행교 교주. <미국 서부 셀프트래블>, <뉴욕 셀프트래블> 외 여러 권의 저서가 있는 베스트셀러 직딩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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