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여행][여행] 어쩌다 보니, 어떻게든 다녀온 신혼여행

신혼여행 특집



결혼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 틈에 시간이 흘러 이제 8년이 되어간다. 당시로써도 다소 나이 든 총각이던 나는 흰 머리가 조금씩 보이고 약간의 노안 증세가 나타나는 40대 중반의 아재가 되었고 신랑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린 신부였던, ‘그래도 아직은 20대’이던 마누라도 30대 후반으로 향해 가고 있다. 나이를 먹는 만큼 빨라지는 시간의 흐름에 비애를 느낄 틈조차도 없다는 게 인생의 진정한 비극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비교적 행복한 부부로 지내고 있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진 않아도 두 남녀가 모두 건강하며, 이런저런 사정으로 아직까지도 슬하에 2세를 두지는 못했지만 대신 1년여 전에 시골에서 데려온 리트리버 믹스견은 매우 건강하고 지나치게 활발하게 자라고 있다. 아직 대출을 모두 갚지는 못했지만 손바닥만 한 마당이 있는, 작지만 두 사람이 살기에는 충분한 우리 집도 구입했다. 대단한 현금이나 저금, 엄청난 유가증권은 없으나 그래도 아직까지 부부 모두에게 적은 돈이라도 벌 수 있는 일거리도 꾸준히 들어오고 있다.


가끔 엉뚱하게 생각하는 것인데 우리 부부는 어릴 적에 본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다람쥐 부부랑 비슷한 것 같다. 뭐 대단한 물질적 풍요는 없으나 산과 들을 누비며 도토리를 물어다가 나무 구멍의 자기 집에 쌓아두는 방식으로 살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많이 벌고 잘 쓰는 방식이 아니라 적게 벌고 적게 쓰는 미니멀한 생존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인데, 명색이 ‘문화기획자’라는 저임금의 3D업종에 종사하는 남자(나)와 그보다 더한 저임금과 고된 업무량에 시달리는 시민단체 상근자인 여자(마누라)의 불가피한 생존전략일 수밖에 없다.



결혼을 하던 8년여 전에는 더욱 힘든 상황이었다. 결혼하기 불과 반년 전까지 일하던 문화단체가 수년간 아주 좋지 않은 내외부의 문제를 겪으면서 거의 1년 반 이상 급여가 체불되었다. 단체를 그만두고 나온 이후에도 체불 급여에 대한 해결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때까지 2년 정도 사귀었던 아내와 결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모아놓은 돈은커녕 당장 생활비며 카드 요금도 이런저런 잡다한 노동으로 해결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배짱인지 여친에게는 “그리스의 해변으로 신혼여행을 가자!”고 호언장담을 해놓은 상황이었다. 결혼식은 다가오는데 제주도도 다녀오기 힘든 게 아닌가 싶었지만, 인생에 한 번 가는 신혼여행을 대충 때웠다가는 평생 같이 사는 사람에게 원망을 듣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내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았다.



여행사를 통해 대충 알아본 그리스 신혼여행 비용은 전혀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일단 경제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여친에게 신혼여행지를 바꿀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의사를 전달했고 여친도 알겠다고는 했으나 뭔가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새벽까지 자질구레한 노동에 시달리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들어간 항공 예약 사이트에 이스탄불을 딱 한 번 경유하고 아테네로 가는 노선이 당시 시가의 약 2/3에도 못 미치는 가격에 올라와 있었다. 그것도 우리가 결혼식을 치르는 날 밤 11시 50분에 출발하는 노선으로 말이다. 그 역시도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것은 뭔가 운명이란 느낌이 가슴으로 팍 치고 들어왔다. 새벽이어서 여친과 의논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그냥 그대로 예매를 했다. ‘그래 까짓것 가자!’ 장거리 여행에서 가장 큰 비용을 차지하는 게 항공 요금이란 점에서 왠지 비행기를 타고 아테네에 떨어지기만 하면 다른 문제들은 해결될 것 같았다. 그리고 아침에 동이 터서 여친이 출근할 시간까지 이런저런 것들을 찾아본 후 전화를 걸었다.


“우리 그리스로 갈 수 있을 것 같아.”



지금 생각하면 무모한 도전이었는데 행운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일단 아테네에서의 숙박은 후배의 소개를 통해 알게 된 한인 민박에서 비교적 저렴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문제는 본격적인 신혼여행지로 목표한 산토리니(티라 섬)로 가는 교통요금과 숙박이었는데, 운이 좋게도 우리의 결혼식이 있던 10월 초가 그리스 도서 지방 관광이 비수기로 막 꺾이는 시점이었다.


건기와 우기의 구분이 있는 해양성 기후를 가진 그리스 도서 지방은 7월에서 9월까지 엄청난 바가지요금을 받는 것에 비해 10월 이후 급격히 겨울로 분류되면서 모든 요금이 매우 저렴해진다. 하지만 우리가 그곳에 갔던 2009년 10월 초는 날씨가 특별히 나쁜 것도 아니었고 사실 거의 여름의 연장선에 있었다. 요금과 날씨가 동시에 도와주는 상황 속에서 바닷가의 가파른 벼랑에 테라스를 둔, 그래서 매우 멋진 풍광을 보며 와인을 즐길 수 있는 단독형 빌라, 그것도 침실은 아늑한 다락에 있는 복층형 빌라를 성수기 가격의 1/3도 안 되는 매우 저렴한 가격에 얻을 수도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아테네에서 산토리니까지의 왕복 비행기였다. 그리스 지역 항공인 에게안 항공에 어느 날 새벽 아주 잠깐 1유로짜리 - 과장이 아니고 진짜 1유로짜리다. 물론 공항이용료를 포함하면 약간의 요금이 더 붙지만 그래도 평소의 요금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라 할 수 있다. - 특가 티켓 몇 장이 떴다. 그것도 우리 커플이 아테네에서 산토리니로 이동하는 일정에 맞춰서 말이다. 안 되는 영어를 해석해가며 그 1유로 티켓을 예매하고 나니 우주 만물이 우리 부부의 결혼과 신혼여행을 돕는다는 종교적 믿음까지 생길 지경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결혼식 날. 관례화된 결혼식은 지루했으나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두 남녀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지, 자식들을 위해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을 희생하지 말라.”는 대학원 은사님의 파격적인 주례사를 가슴에 간직한 채 이제 둘이 아닌 하나로 세상을 항해하기 시작한 커플은 부부로서의 첫 여행을 시작했다. 인천공항에서 아내의 결혼식용 머리 실핀을 뽑고 비행기에 올라 와인 한잔 마시고 눈을 좀 붙이고 나니 이스탄불의 새벽이었다. 컴컴하고 약간 싸늘한 새벽 기운 속에 다양한 인종들이 오가는 이스탄불 공항에서 아테네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우리 부부의 세상을 향한 여행과 도전 역시도 현재(당시)의 우울한 상황과 달리 간절함으로 애를 쓰면 운명이 돕는 행운이 함께하리란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여러 가지 행운에 감사하며 지금까지 작지만 단단한 행복을 키우며 살아오고 있는 것 같다.


그리스 신혼여행의 디테일은 짧은 글로 다 묘사하기 힘들기도 하거니와 시간이 많이 지나 잊힌 것도 많다. 그래도 몇 가지만 회고해보자면. 올리브유와 치즈 가득한 그리스 음식에 영 적응을 못 했던 아내가 거의 몇 날 며칠을 제대로 못 먹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가 아테네로 돌아와 며칠 만에 간 한인 식당에서 김치찌개 백반을 먹고 혈색이 돌아온 고통스러운 기억이라던가, 산토리니에서 큰맘 먹고 간 해산물 레스토랑에서 전통주인 ‘우조’를 함께 시켰는데 서비스를 하던 점잖게 생긴 백발의 종업원이 아내가 화장실에 간 틈에 음흉한 미소와 함께 술을 가져다주며 “여자분에게 술을 많이 먹이라”고 권했던(?) 황당한 사연 같은 것이 떠오른다.



아테네에서 산토리니로 가는 비행기를 탈 때 혼자 유독 “산토리니! 산토리니!”를 외쳐대며 줄을 안 서고 새치기를 하던 이탈리아의 무질서 아재가 있었는데 우연히 섬 가는 곳곳에서 마주칠 때마다 늘 엄청나게 많은 기념품을 사 들고 다니던 것도 아내와 가끔 그때를 떠올릴 때 빠지지 않고 얘기하는 에피소드다. 산토리니 여행도 좋았지만 개인적으로는 한인 민박 아저씨의 차량으로 돌았던 아테네 근교 투어가 인상 깊게 남아있다. 나프플리오, 코린토스, 미케네 등을 돌아다녔는데 특히 그리스의 나폴리로 불리는 나프플리오에 있는 팔라미디 성채에서 존재의 유한성과 시간의 무한성이라는, 신혼여행의 분위기와는 다소 동떨어진 철학적 상념에 잠시 젖어 들기도 했다.



바쁘고 평범한 일상에 치이듯 살아가고 있으나 언젠가 다시 아내와 먼 여행을 떠나고 싶다. 결혼 10주년에도 어딘가를 다녀올 계획이지만 아직 그리스를 다시 가기에는 못 가본 곳이 많다. 20주년에도 아마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30주년 정도에는 건강이 허락된다면 그리스를 다시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노년에 접어들어 다시 나프플리오의 팔라미디 성채에 부부가 다시 올라간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떨어지는 낙조를 보며 황혼에 접어든 인생의 비감함을 느낄까? 아니면 신혼 시절의 행복을 다시 떠올릴까? 그런 기분이 궁금해서라도 다시 한번은 그곳을 다시 돌아다녀 보고 싶다. 물론 아직은 더 “멀리 돌아가는 길(The Long and Winding Road)”을 한참 돌아 다녀야겠지만 말이다.





글/사진(3, 6) 더프

문화정책연구자 겸 칼럼니스트. 70년대 초반 태어나서 영화인을 꿈꿨으나 지금은 창작자를 제도적으로 돕는 일을 하고 있으며 이따금 대중음악과 서사 장르에 관한 가벼운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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