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 in there][랭스/에페르네] 행복은 샴페인 기포 속에

2022-12-19

제이 in there #6


와인에 빠지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멋있어 보였으니까. 소주나 맥주보다 근사한 어른의 술 같았으니까. 일반 마트에서 살 수 있는 저렴한 와인으로 시작해 선호하는 품종까지 생긴 지금, 종종 와인 중에 어떤 걸 제일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럴 때마다 망설임 없이 답한다. "샴페인이요." 어떤 날을 기념하고 싶거나 즐겁게 보내고 싶을 때 무얼 하면 좋겠냐는 질문에도 마찬가지다. "샴페인 하세요('드세요'가 아니라 '하세요'다)!“


프랑스 랭스에서


중요한 업무가 마무리되는 11월, 내 생일을 껴서 2주간의 휴가를 준비했다. 파리로 들어가 근교 도시들은 당일치기, 생일에 맞춰 상파뉴 지역에서 2박 3일을 보내기로 했다.


랭스는 역에서부터 도심, 주요 와이너리까지 모두 걸어 다닐 수 있는 작은 도시다. 이 작은 도시에 뵈브 클리코, 크룩, 루이 로드레, 포므리, 루이나르, 찰스하이직, 드라피에, 멈 등 유명한 샴페인 하우스가 도시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모여 있다. 한 병에 수십만 원씩 하는 와인들이 나오는, 라벨에 적힌 생산지 'Reims'가 여긴 거야. 나를 살찌우고 내 통장을 ‘텅장’ 만든 도시에 직접 와 있는 거야.



랭스 대성당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뷰에 반해 예약한 호텔에 짐을 맡긴 뒤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샴페인의 도시에 있는 동안 내가 할 일은 그저 매끼 샴페인을 마시는 것. 점심엔 ‘로랑 페리에’ 하프 보틀을 곁들여 에스카르고에 스테이크를 먹고, 오후 2시에 예약해 둔 ‘뵈브 클리코’ 와이너리를 향해 걸었다. 적당히 마신 샴페인과 편안하게 신은 로퍼, 걷고자 하는 마음.


노란 간판에 익숙한 이름, 뵈브 클리코가 보인다. 투어 담당 직원이 시각적 자료를 확인하라고 일행당 하나씩 태블릿 PC를 건네준다. 축축하고 서늘하고 깊은 동굴 아래로 한참을 걸어 내려오니 익숙한 와인 병들이 무더기로 보였다. 뵈브 클리코는 샴페인 제조 공정에서 만들어지는 찌꺼기를 제거하는 방법을 고안해 침전물 없는 맑은 샴페인을 만들어낸 곳이다. 작황이 좋은 해에만 만드는 빈티지 샴페인도, 블렌딩 로제 샴페인도 최초로 선보인 사람이 여성, ‘클리코’였다. '뵈브'는 불어로 '미망인'이라는 뜻이다.


뵈브 클리코의 와이너리가 코앞


투어의 하이라이트는 테이스팅 룸에서 진행되는 시음이다. 작고 섬세하게 터지는 버블과 입안을 구르는 다정한 맛의 2015 빈티지. 최근 뵈브 클리코 와인이 가격 대비 아쉽다고 느꼈는데, 원래 이런 맛이었나. 이래서 이곳까지 온 거다.


뵈브 클리코 와이너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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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도 와이너리 투어로 시작했다. 10분 먼저 도착했는데 정확히 예약 시간인 10시에 문을 열어주는 프렌치적인 ‘포므리’는 두 번째로 방문한 샴페인 하우스다. 포므리 여사 역시 남편이 죽고 난 뒤 가업을 이어받아 유명 샴페인 브랜드로 키워냈다. 포므리는 당분을 대폭 줄여 달지 않은 브뤼(Brut) 샴페인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가 아는 샴페인의 맛, 샴페인의 기준을 만든 여성이 포므리인 것이다.


포므리 와이너리에서


포므리는 다른 샴페인 하우스 투어와 달리 현대 미술을 관람하는 형태로 지하 셀러를 개방하고 있다. 생전에 예술을 사랑하고 후원하는 데 아낌이 없었던 루이스 포므리 여사를 기리기 위해 2003년부터 ‘익스피리언스 포므리Experience Pommery’란 현대미술 전시를 개최하고 있다. 예약한 시간에 방문하여 포므리 앱을 다운 받아 전시 설명을 들으며 셀러를 셀프로 관람하는 형태. 으스스한 기분이 들어 작품을 오래 들여다보진 못했지만, 관람 후 포므리 한 잔 시음하는 데에는 충분한 시간을 보냈다.


익스피리언스 포므리


4코스로 진행된 점심식사를 마친 뒤 다시 투어를 위해 찾은 곳은 〈에밀리 파리에 가다〉에서 주인공들이 마시던 샴페인, ‘떼땅져’다. 투어는 약 10분간 떼땅져를 설명하는 영상을 보고 시작한다. 본인들의 샴페인이 어떻게 만들어지느냐 만큼 우리 샴페인을 마시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이고 멋진 일인지, 그걸 어떻게 마케팅 해 왔는지를 동등한 비율로 설명하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데땅져 와이너리에서


18미터 지하에 자리한 셀러로 들어와 동굴 벽을 만져보자 축축함이 느껴졌고, 습기를 잘 머금는 백악질 토양의 특성 때문에 1년 내내 최적의 온도와 습도가 유지된다는 설명이 따라왔다. 눈에 보이는 대부분의 샴페인 병 모양이 꽁뜨(Comtes)다. 한 병에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와인들이다. 마시지 못하는 대신 눈으로 가득 담았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출시될 꽁뜨 와인들. 와인의 시간은 인간과 다르게 흐른다.


데땅져 와이너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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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스에서의 2박이 순식간에 지났다. 다음 목적지는 샴페인의 수도, 에페르네. 에페르네는 랭스에서 완행 기차로 30분 떨어진 가까운 곳이다.


에페르네 시청

모엣 샹동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모엣 샹동 ; 매초마다 세계 어딘가에서 Moët & Chandon 병의 코르크가 터집니다.' LVMH(Louis Vuitton, Moet & Chandon, Hennessy) 소속답게 루이뷔통 가방을 크로스로 멘 직원이 안내를 시작했다. 샴페인 병에 라벨을 부착하는 시스템을 도입해 샴페인 병의 시각적 통일성을 도모하고, 브랜드와 관련된 형태와 색상, 디자인 등에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한 곳이 모엣 샹동이라고 한다. 샹파뉴의 지역 특성부터 소유 중인 포도밭의 규모, 포도 수확에서 1, 2차 발효 과정 설명까지. 샴페인 투어는 모엣 샹동이 가장 체계적이었다. 영어로 투어가 진행되는 내내 설명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 영어를 들은 게 아니라 샴페인을 들었기 때문이다.


모엣 샹동 앞 수도사 피에르 페리뇽의 동상


맛보단 브랜드 이름으로 마시는 와인이라고 생각했는데, 모엣 샹동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럽고 섬세한 맛이 느껴졌다. 이번 샹파뉴 여행 동안 총 네 곳의 샴페인 하우스 투어를 했고, 시음한 각 와인들이 뵈브 클리코를 제외하곤 모두 기본 엔트리 와인들이었는데 평소 내가 집이나 식당에서 먹는 것과 같은 와인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생산된 곳에서, 가장 알맞은 온도로 보관하여, 가장 이상적인 상태로 오픈하면 이런 맛이구나. 이래서 생산지에 오는 것이다.


모엣 샹동 와이너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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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세 어둠이 짙게 내린 도시. 에페르네 중심을 벗어나 간판 하나 제대로 없는 작은 동네에 들어오자 심심치 않게 샴페인이란 단어가 적힌 벽들이 보인다. 작은 규모로 퀄리티에 신경 쓴 좋은 와인들을 만들어내는 곳인 아비제다. 좁은 골목을 조금 더 들어오자 모던한 나무 건물에 목적지 이름이 적혀 있다. 와이너리 호텔인 ‘도멘 자크 셀로스(Domaine jacques selosse)’. 체크인을 하고 조금 쉰 뒤 8시에 맞춰 식당으로 향했다. 방 이름을 확인하더니 미리 세팅된 1인석으로 자리가 안내되었다.


치즈가 고소하게 씹히는 아뮤즈 부쉬에 ‘자크 셀로스 이니셜’ 한 병이 먼저 나왔다. 이게 그 자크 셀로스구나.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게 칠링 바스켓이 아닌 식탁 위에 먼저 놓아주는 센스. 진한 노란색을 띤 자크 셀로스는 꼭 위스키를 오픈한 것처럼 강렬한 노이즈가 첫 인상이었다. 전문가들처럼 여러 가지 향을 캐치해내지 못해 멋있는 설명을 할 순 없지만, 잘 보관된 여문 느낌이 들었다. 아, 이거구나. 한 모금 한 모금이 새삼스러웠다. 관자, 생선, 돼지고기 등을 이용한 요리가 차례로 나왔고, 맛을 묻는 직원에게 급히 찾아본 불어로 맛있다고 답했다.


도멘 자크 셀로스에서 먹은 저녁


숨 돌릴 여유 없이 다녔던 여행의 피로가 이 복도 끝에 내 방이 있다는 위안에 수마처럼 몰려오기 시작했다. 얼굴과 손가락이 울긋불긋 물들었고 와인을 더 마실 배까지 남아 있질 않아 아쉽지만 와인을 조금 남기고 자리를 정리했다. 방으로 돌아와 씻고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숙면했다.


여기서 1박만 하는 게 아쉽지만 1박 이상을 했으면 이런 아쉬움이 또 남지 않을 테지. 아침 일찍 파리로 돌아갈 짐을 싸고 조식을 먹으러 갔다. 어제와 같은 테이블에 다시 세팅되어 있는 자리. 직원이 나를 보자 "어제 마시다 남은 샴페인 보관해두었는데, 지금 마실래?"라고 물었다. 따로 보관해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본인들이 만든 샴페인이라 남는 것을 버리는 게 아까운 마음도 포함되어 있었을까? 샴페인 한 잔 가볍게 비우고 따뜻하고 바삭한 빵들을 먹고 있자니 정말 프랑스에 와 있다는 실감이 났다.


도멘 자크 셀로스에서 먹은 아침, 샴페인과 함께


내게 행복은 샴페인과 동의어다. 그러므로 샴페인을 생산하는 샹파뉴 지역은 행복을 생산하는 곳이고, 짧게나마 내 행복의 출처를 찾을 수 있었다. 지난 7월 한국을 찾은 현 떼땅져 총괄 이사인 클로비스 떼땅져가 샴페인에 대한 기술적인 질문을 한 어느 칼럼니스트에게 친절한 답을 한 뒤 이렇게 덧붙였다고 한다. "숫자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저 샴페인을 즐겨주세요. 떼땅져를 마실 때마다 행복하고 즐거우셨으면 좋겠습니다." 


맞다. 내 행복은 샴페인 속 기포에 있다. 감히, 샹파뉴를 여행하는 내내 행복했다.





글/사진 백지은

지역 방송국에서 일하며 덕질하는 게 유일한 취미인 3n살 덕후. 종종 여행하고, 가끔 글을 씁니다. 『보라하라,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덜』을 쓰고, 『규슈단편』을 함께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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