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런던, 겨울의 퇴근길

크리스마스 특집 #1




저 키다리 건물이 나의 일터다. 입주한 지도 꼬박 한 해가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데면데면한 이 건물. 안에서 일할 때는 꼭대기 고깔에 저런 야한 조명이 마구 솟구치는 줄은 몰랐네. 런던에서 맞이하는, 무려 일곱 번째 연말. 주중 근무 100시간을 곧잘 넘기는 일상에 익숙하던 한국의 7년차 건축쟁이가 한 해를 꼬박 공부하는 휴가로 쓰자는 큰 결심과 함께 날아온 런던이었다. 그러다 얼떨결에 외국인 노동자 생활을 한 지도 어느덧 7년차. 이곳에서의 일상이 이렇게 정처 없이 길어져도 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 일곱 번째 크리스마스가 성큼 온다. 하지만 연말이 오는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는 느낌, 연말을 한껏 즐기는 바깥세상과의 괴리감은 점점 더 커지는 느낌, 작고 큰 사건사고와 희비에 대한 동요는 대폭 줄어든 느낌. 심드렁하기 그지없다.




일찌감치 찾아오는 ‘크리스마시’한 분위기는 매년 스타벅스 종이컵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초록마녀가 그려진 흰 종이컵이 어느 날 빨강빨강하고 초록초록한 크리스마스 배색을 뒤집어 쓰는 순간 ‘올 것이 왔군’하는 느낌. 포스에서 음료를 주문하면 스태프가 “이름?”이라고 묻고 주문 내역과 함께 종이컵에 마커로 내 이름을 받아 적는다. 한국의 흔한 진동벨도 없고, 번호표도 없이, 주문한 음료가 만들어져 나오면 이름을 불러준다. 그에게로 가서 꽃이라도 되어주어야 하려나,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내 이름의 ‘소So’ 자가 접속사가 아닌 사람의 이름일 것이라 믿는 스태프를 만난 적 없다. 마치 미생의 장그래처럼. “네 이름이 정말 그래?” “응, 그래.” “정말 그래?”




11월 초부터 부산스럽게 켜지는 쇼핑가의 조명들. 그리고 조명이 들어오는 순간에 꼭 그 거리에 서 있고 싶어 점등식 날짜와 시간을 서로 묻는 사람들. 옥스포드 스트리트에만 칠백오십만 개의 전구가 설치됐다는데, 빈 방에 들어서며 대수롭지 않게 불을 켜는 것처럼 누군가 시간에 맞춰 이 도시의 스위치를 똑딱 켰을 걸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난다. 터벅터벅 걸어 집에 가는 퇴근길이 이지경인데도 불구하고, 양쪽 귀에 비지엠으로 캐럴을 주입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왜 도파민은 분비될 조짐이 없는 것일까? 늘 붐비는 쇼핑가를 피해 대로변 한 켜 뒤편의 골목길로 다니기 바빴지, 축제를 즐길 생각은 좀체 하지 못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고장 난 것인지 알 수가 있어야 말이지.




걷다가 이곳 세븐 다이얼스에 들어서면 작은 로터리가 일곱 갈래 길로 나뉜다. 몬모스 거리에서 몬모스 커피를 마실까 하며 걸음을 옮기다 보면 그 옆길로 들어가 있질 않나, 집으로 가는 방향이겠거니 들어서면 애먼 곳으로 빠져나가 있질 않나, 사는 동네가 내 손바닥 안에 있다는 생각은 곧잘 틀리기 십상이고, 별생각 없이 감각대로만 움직이다 보면 금세 방향을 잃는다. 일곱 갈래 골목마다 범상치 않은 아틀리에와 카페, 상점들이 줄지어 있으니 지루할 틈 없이 즐기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지. 생각해 보면 차들이 뱅글뱅글 돌아다니는 중간에 서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고민하며 머뭇거리는 것이 딱히 위험하지 않은 그런 속도의 그런 공간이랄까. 멍 때림이 허용되는 너그러운 곳이다.




테이트 모던 앞마당에는 올라퍼 엘리아슨의 설치전시가 한창이다. 지구온난화로 녹아내리고 있는 그린란드의 빙하에서 탈락한 스물다섯 개의 얼음덩어리를 테이트 모던 앞마당에 소환한 작품 곁에 빙하를 핥아 보는 강아지들, 맨들맨들한 표면을 만져보는 사람들, 흰 빙하 속에서 은은하게 비쳐 나오는 파르스름한 켜를 들여다보는 사람들. 겨울이라 가능한 그런 전시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한껏 내보려고 옷을 갈아입은 도시의 축제 분위기 속에서 일상의 이야기를 소소히 이어가는 이런 전시가 왠지 좋다. 그리고 퀸즈웍을 따라 늘 같은 자리에 서는 버스커들과 사우스뱅크 센터 노천의 중고책방까지, 오후 세시가 되면 이미 해가 지기 시작하는 런던의 겨울에도 매일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이맘 때 퇴근길을 걷다보면 한두 군데 거치게 되는 템스강변의 크리스마스 마켓들. 붐비는 사람들 틈을 헤집어야 하는 정체 구간이긴 하지만, 한국 사무실의 믹스커피처럼 따뜻하게 덥혀져 종이컵에 담아 파는 뮬드 와인 생각은 꼭 난다. 갖가지 크리스마스 장식들과 소소한 야식거리들을 파는 마켓 중간 중간 뮬드 와인 탭도 흔하게 찾을 수 있다. 흔하다하여 우물쭈물하다가는 한 잔도 마셔보지 못하고 12월 한 달이 훌쩍 지나가버린 해도 있었다. 달큰한 뮬드 와인을 마시면 마치 쌍화탕을 한 잔 하며 감기기운을 떨쳐내는 그런 기분이 든달까. 뮬드 와인으로 알딸딸하게 데워진 너그러움으로, 골똘함이 유독 많았던 올해도 안녕.





글/사진 현소영

도시와 건축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크고 작은 해프닝을 탐닉하는 삼인칭 관찰자. 한껏 게으른 몸뚱이를 간발의 차이로 이긴 호기심으로 매일 아침 겨우 눈을 뜰 기력을 유지하고 있는 최소주의. 좀머 씨처럼 등속도를 유지하며 런던을 골똘히 누비고 다니는 뚜벅이 외국인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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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같을 수 없는 큰 런던이라는 곳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벌써 부터 chic 느낌이 잘 살려진 런던의 소소한 다음 이야기들이 기다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