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서양식 기억

크리스마스 특집 #6



내겐 서양식 기억이 있다. 그 말을 동경, 선망이라고 바꿔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 기억은 유럽의 문화를 자본주의와 위트로, 무엇보다 실용적이고 가족적으로 해석한 북미의 문화에서 왔다. 영특한 토끼가 나오는 만화영화라든가, 크리스마스마다 혼자서 집을 지키는 꼬마 녀석이라든가. 하여간 그런 장면들이 나를 텔레비전 앞으로 끌어들였고, 나는 별 다른 수고를 들일 필요도 없이, 지구 어디쯤 붙어있는지도 몰랐던 멀고 아득한 세계로 빠져들었다.


거리감이 얼마나 컸던지 나는 평생 그곳에 닿지 못하리라고 체념했었다. 그러면 마음이 편했다. 멀리 갈 일도 없고, 멀리 가는 방법을 찾을 이유도 없고, 흐릿한 형태로 그곳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광선을 잘못 맞아 개미처럼 작아진 아이들, 공항 활주로에 떨어져 폭발하는 비행기, 허리에 권총을 찬 보안관과 그런 보안관을 순식간에 해치우는 무법자들)을 맞닥트릴 일도 없었다. 내게 모험심은 없었다. 엉덩이로 깔고 앉은 방바닥이 내가 있을 자리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텔레비전 영상과, 종종 문방구 처마 밑에 걸리는 외국산 장난감과, 공책 표지에 실리곤 하던 무명의 이국 풍경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멀리 갈 수 있었다. 때로는 그것들이 기억에 남아 있음으로써 나 자신이 먼 길을 다녀온 사람이나 다름없다는 착각을 기쁘게 받아들이기도 했다.




"안녕, 오랜만이야."


저 당근, 어디서 많이 보던 당근이라고 생각했다. 퀘벡시티의 어느 마트에서 장을 보던 나는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굽혀 냉장실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채소가 한국에서 보던 것과 조금 다르게 생겼다는 사실만으로 사람이 들뜰 수 있음을 알았다. 노란 양파, 붉은 양파, 하얀 양파가 종류별로 있는 것도 좋았고, 유화로 그린 듯한 새하얀 통마늘이 네다섯 개씩 딴딴하게 묶여있는 것도 좋았다. 특히 워너브라더스의 애니메이션 캐릭터 ‘버니’가 사냥꾼을 골탕 먹일 때마다 먹었던 얇고 빨갛고 구불구불한 당근을 실제로 보는 바람에 근처에 토끼굴이 하나 있고 곧 쫓고 쫓기는 엄청난 소동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생판 처음 보는 통조림과 주스 팩과 시리얼 상자는 어쩌면 내가 어딘가에서 기억한 것들의 먼 친척뻘일지도 몰랐다. 만화영화에서 키가 크고 잿빛 털이 난 토끼가 굴에서 튀어나올 때마다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기대에 차서 텔레비전 앞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곤 했다. 그때, 당근은 모두 저렇게 생긴 줄 알았다. 고기도 그랬다. 두툼한 베이컨, 넓적다리를 그대로 뜯어 놓은 듯한 고깃덩어리, 그리고 오이보다도 굵은 소시지. 배가 고픈 만화 주인공들이 저 큰 고기 한 점을 놓고 한참을 치고받고 다투기도 했었다. 나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축적된 서양식 기억과 재회했다. 성장하며 잊었던, 그러나 몸뚱이 안쪽에 심처럼 박혀 있던 세계에 마침내 닿은 것 같아 얼마간 뭉클해졌다. 안녕, 오랜만이야, 인사할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카트를 끌고 지나가던 할머니는 다른 것도 아닌 당근 사진을 찍는 나를 보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든 크리스마스 장식에는 그런 마법이 걸려 있었다."


크리스마스의 온기는 반짝이는 조명에서 오는 것 같기도 하고, 특별히 준비된 저녁 식사의 뜨거운 김과 달착지근한 냄새에서 오는 것 같기도 하다. 평소보다 따뜻하게 피워둔 벽난로 - 또는 보일러 - 에서 올 수도 있고, 창밖으로 눈이 내리길 고대하는 순진한 마음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다. (이젠 창문을 열어 미세먼지 없는 맑은 하늘을 기대하는 것도 사치가 되었다.) 어쨌든 모든 것이 내가 사는 집이 아니라 텔레비전 화면 속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온기를 더 간절히 느꼈다. 텔레비전 앞에 앉은 나를 경계선으로 내 등 뒤에선 전혀 다른 현실이 펼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시즌마다 반복되던 환상은 능히 현실을 기만했고, 현실은 기꺼이 기쁨에 떨었다. 크리스마스를 수식하는 단어가 감사와 희망이기에, 착각이라는 말 또한 그 중간 어디쯤 슬쩍 끼워 넣어도 될 것만 같았다. 모든 일이 이해되고 용서받고 화해로 무마되는 시기이니만큼 그러해도 무방하리라 믿는다.



퀘벡시티의 구시가지는 익살맞은 호박 모자를 쓴 채 다가오는 핼러윈 맞이로 분주했지만, 어느 한 건물만 통째로 잘려 시간을 앞서가고 있었다. 간판을 읽어보니 ‘크리스마스 상점’이라고 했다. 세상엔 정말 그런 이름을 가진 곳도 있다. ‘크리스마스 상점’은 한 해가 시작되는 날부터 지금껏, 여름에조차 그래 왔다는 듯 온통 크리스마스 장식 천지였다. (이 상점이 문을 닫는 날은 일 년에 단 하루, 크리스마스 당일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문 하나 지나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왔고, 마음의 난로에 쌓인 먼지를 털었으며, 동심의 귀환을 환영하며 색 조명을 켰다. 반짝이는 천사 문고리와 녹지 않는 눈사람이 든 스노 글로브와 창문에 불이 켜지는 하얀 집 모형이 사방에서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장식품이 이날 이 시기만큼은 행복해도 되지 않겠느냐고 속삭이자 오래전에 녹음된 캐럴이 맞장구를 쳤다. 사람들은 마음이 두근거릴 때마다 낮은 목소리로 탄성을 냈다. 경건하고 부드러웠다. 마치 누군가의 저녁 식사에 초대받은 듯, 미사에 참석한 듯, 그렇게 예의 바랐다.


저절로 움직이는 기차가 눈 덮인 마을을 몇 번이고 왕복하는 모형이 있었다. 터널을 지나고 작은 집 앞에서 경적을 울리다 저 만치 멀어졌다. 그러고는 보고 싶었다는 듯, 그래서 쓸쓸했다는 듯 다시 이쪽으로 달려와 같은 여행을 반복했다. 기차와 마을 모형에는 외부로부터 격리된 행복, 언제나 눈이 내리는 스노볼처럼 그 무엇에도 무너지지 않을 작지만 영원한 행복이 깃들어 있었다. 수없이 많은 좌절한 눈과 미소를 잃은 입과 주름진 이마가 이 마을 앞에서 위로를 받을 것이었다. 벽난로 위든 먼지 쌓인 책장 사이든,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세상을 떼어 왔음에 안도할 것이었다. 모든 크리스마스 장식에는 그런 마법이 걸려 있었다.



이 모든 게 부질없다거나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무시하진 않았다. 하지만 텔레비전에서 크리스마스 영화를 볼 때만큼이나 눈앞에 있는 것 하나하나가 멀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어린 내 등 뒤에 도사리던 의심, 실망, 무심함과 그 모든 울음 섞인 한숨은 서양식 기억보다 훨씬 더 많은 분량으로 내게 심겨 있었다. 우리 집에도 이런 크리스마스 장식 몇 개가 있었다면, 12월의 한 때만큼은 미소와 화해의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을까? 지난 한 해에 감사해 하며 트리 꼭대기에 무슨 장식을 올릴지 궁리하는 것이 가장 큰 고민이지 않았을까?


가게 밖을 나서면 가을이 돌아왔다. 나뭇잎은 노랗게 늙었지만 여전히 성했고 때로는 붉게 춤추기도 했다. 크리스마스는 아직 ‘크리스마스 상점’ 안에만 있었다. 스프링을 세게 눌렀다 놓을 때처럼 자신의 차례가 돌아올 순간에 멀리멀리 퍼져나가겠다는 듯 그곳에서만 북적였다. 텔레비전 화면 속에 들어갔다 나온 기분이었다. 내 뒤를 따라 나오는 사람들은 저마다 한 움큼씩 온기를 들고 있었다. 나도 스위치를 올리면 창문에 불이 켜지는 작은 집 모형을 하나 들고 있었다. 이 집이 뒤늦게나마 어떤 마법을 부려줄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저 얼마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까지 만이라도 나를 지켜주기를, 상점 밖 모든 삶의 부침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내가 간직한 서양식 기억 속 모든 이야기가 그러했듯이.





글/사진 신태진

여행 매거진 BRICKS의 에디터. 『홍콩단편, 어쩌면 익숙한 하루』의 공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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