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미야][여행] 런던에서 만끽하는 판타지한 일상 체험, 3P 테마 여행 #1 - Park

2023-09-18

카페 미야 #20

 


다녀온 나라 수를 세는 것이 점점 의미 없어질 무렵, 친구들은 종종 내게 휴가로 어디를 가면 좋을지 추천해달라고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네가 지금 제일 간절한 게 뭐야?”라고 되묻는다. 그러고는 여행 컨설턴트라도 되는 양, 일상에서 채우지 못한 욕구, 취미, MBTI까지 세심하게 짚어보며 추천 여행지를 좁혀 나간다. 그만큼 여행의 테마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거리에 혐오의 현수막이 합법적으로 나부끼고, 칼 들고 달려드는 사람 없나 주의하며 걸어야 하는 일상을 산다. 어떻게 하면 이 나라를 탈출할 수 있을까 출구 전략을 진지하게 고민하던 날들 속에서 이번 여행의 목적은 ‘(판타지한) 일상 체험’으로 세웠다. 골방에 처박혀 공부를 ‘해내느라’ 찔찔대던 시간조차 아름다운 추억으로 승화된 그곳, 런던에서 3P: Park, Proms, Pub가 이번 여행의 테마이다.


cf95fcf1ac046.jpgSt.James's park


1. Park 공원


하루의 시작은 공원 조깅이다. 걷듯이 뛰다가 장미꽃 향기도 맡고, 아침잠 많은 백조를 깨우지 않으려고 까치발로 사뿐사뿐 지나치며 공원을 한 바퀴 돈다. 이른 아침 승마 레슨을 받으러 나온 사람들, 널널한 코트에서 테니스를 치는 사람들을 보며 여기 살 때 배웠어야 했는데! 이제 와 후회막심이다.


f6bdcdfaac371.jpg하이드 파크에서 승마 레슨 받는 사람들


ec0547034efc8.jpg테니스 레슨 받고 나오는 아이


aa8d7d54d9cb2.jpg한적한 테니스 코트


오솔길로 접어들어 다람쥐, 그 녀석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온통 손에 먹을 것이 있는지에만 관심이 쏠려 사람 무서워하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오던 그 녀석, 여전하다. 런던에 다시 온 게 4년 만이니, 그때 그 녀석인지, 그 자손인지, 이웃인지는 몰라도, 내 눈에는 딱 그 녀석이다. 런던의 가장 크고 아름다운 공원에서 같은 얼굴로 대대손손 불멸의 삶을 누리는 거냐. 다람쥐에게조차 부러움이 밀려든다. 좌뇌를 굴리지 않아도 되는 일상으로 넘어왔더니 아예 작동을 안 하는 모양. 잠을 깨워줄 홍차와 스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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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솔길의 불멸의 다람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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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잠 많은 백조


도대체 누구의 결정이란 말이냐! 런던의 왕립 공원(Royal park) 내 카페를 독점 운영하는 베누고Benugo가 메뉴에서 스콘을 빼버렸다. 클로티드 크림과 딸기잼 얹어 한 입 베어 물고 쌉쌀한 홍차를 부어 넣는 그 맛, 공원 산책을 완성하는 그 맛을 뺏어가다니! 대참사 수준의 결정이다. 이젠 어떤 왕립 공원에서도 스콘 구경은 할 수가 없어졌다. 답답한 마음에 직원에게 대체 언제부터 스콘이 메뉴에서 빠진 건가요 하소연 해봤지만, 직원은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e4254f9ea1422.jpg1740735082621.jpga10ffc4a41777.jpgSerpentine Bar & Kitchen bar. 스콘을 없앤 것은 대체 누구의 결정이냐


그렇다면 선택은 밀크티만 남았다. 첫 번째 우린 홍차는 향긋한 맛에 마시고, 쌉쌀하고 진하게 우러나온 두 번째 홍차부터 밀크티 만들어 먹기 제격이다. 홍차 맛이야 보장되어 있으니 밀크티를 완성하는 것은 설탕이다. 남의 손으로 설탕 팍팍 넣은 빵, 음료는 잘만 먹으면서, 막상 내 손으로 넣을 때 주저하다 보면 네 맛도 내 맛도 아니고 비리기만 할 뿐. 이왕 먹을 거 설탕 팍팍 넣어 맛있게 만들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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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020e3cb0fa9.jpg이곳은 Italian garden cafe. 나의 밀크티 제조법!


ca495ceb06b12.jpg공원 끝은 버킹엄 궁전으로 이어진다.


공원 산책이 끝나면 숙소로 돌아가 샤워하고 간단히 요기를 한다. 아침은 주로 훔무스에 야채 스틱이다. 침대에서 뒹굴대며 오늘은 무얼 할까 고민한다. 아침엔 공원, 저녁에는 프롬스Proms, 펍Pub이라는 테마 말고는 무계획이 계획인지라, 낮 시간은 보너스다. 주로 마켓과 거리를 어슬렁대거나 미술관에 간다. 미술관은 보통 시간대별로 무료 투어 프로그램이 있는데, 이게 알짜배기다. 여행사 가이드의 수박 겉핥기식 설명이 아니라, 미술관 큐레이터가 역사, 문화를 깊게 파고들며 작품에 얽힌 진짜 이야기를 들려준다. 


f5b36be747d4f.jpg테이트 브리튼


영국 출신이거나 영국에서 주로 활동한 작가들만 모아놓은 테이트 브리튼Tate Britain은 좋은 작품도 많을뿐더러 미술관 크기도 적당해서 작품이 내뿜는 기운에 지나치게 압도당하지 않고 관람할 수 있다. 한 시간짜리 ‘역사적, 현대적 영국 예술(Historic and Modern British Art)’ 프로그램을 듣고 나니 배가 출출해진다. 대개 미술관에서 운영하는 구내식당은 가격이 저렴한데 맛은 훌륭하다. 런던 여행 중 배가 고프거나, 화장실이 급하거나, Wi-fi가 필요할 때에는 주저 없이 미술관으로 향하면 된다. 무엇이든 최상의 것을 경험할 수 있다. 


7838c0167dfb7.jpgc6d1db95cd6e6.jpg어린이 참여 프로그램


3c28a66f2c4e1.jpg02817e328dc27.jpg역사적 현대적 영국 예술 프로그램


널찍한 야외 테이블에 앉아 우유 쫀득한 플랫 화이트 먼저 한 모금. 오늘 메뉴는 방목 돼지와 펜넬로 만든 소시지롤이다. 맞은편 아저씨가 “참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어요. 제 가방 좀 맡아줄 수 있나요?” 하더니 케이크와 커피를 사 들고 온다. 다이어트 중인데 내가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제어할 수가 없었다고. 그렇게 느슨하게 말을 트고는 신상 공개와 본격적인 수다가 이어졌다. 나이젤Nigel은 지역 의원(Local politician)이란다. 어쩐지 사람을 끌어들이는 말투라니. 


29ae9217b2830.jpg테이트 브리튼 구내 식당.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있던 나이젤


지금 테이트 브리튼에서 특별 회고전 중인 아이작 줄리언Sir.Isaac Julien을 아느냐고 묻는다. 주로 섹슈얼리티, 계층화, 문화사를 다루는 설치 미술가인데 젠더 전공을 한 나에게 더욱 흥미로울 거란다. “테이트 멤버십이 있어서 동행하는 사람은 무료에요. 관심 있으면 같이 가볼래요?” 하는데 안 갈 도리가 없지 않은가!


3시간 동안 비디오 아트 세계를 진하게 경험해 보고 나니, 갈피가 어렴풋이 잡히는 것도 같다. 이해해 보겠다고 영혼을 쏟아부었더니 두통이 찾아왔다. 이럴 땐 미술관이 문 닫는다고 쫓아내는 게 고마울 지경이다.


b6102b9b776e4.jpg6d44854c17964.jpgb523b45273a61.jpg아이작 줄리언의 비디오 아트


※ 미야 님의 런던 3P 테마 여행은 두 번째 'Pub' 편으로 이어집니다!




글/사진 mi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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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대에서 석사를 마치고 옥스퍼드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 지금은 서울 체류자. 대륙을 가리지 않고 오지를 휘젓고 다녔지만, 이제는 카페에 나른하게 앉아 일기를 쓰고 엽서를 쓴다. 창밖을 바라보는 맛이 더욱 좋아져 걷기도 싫어져 버린. 아니, 아니, 나이 때문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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