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애호가, 티셔츠 수집가, 『음악을 입다』의 백영훈 작가가 들려주는 티셔츠와 랜덤 플레이 리스트.
무작위, 우연, 계획되지 않은 흐름에서 발생하는 사건, 랜덤은 그래서 예상치 못한 선물이 되기도 합니다.
오래전 LP와 카세트테이프에서, 아이팟에서, 콘서트에서 듣던 팝과 록과 재즈를
태연하게 오늘의 일상에 랜덤으로 가져다 놓습니다.
인생의 헤아릴 수 없는 고민, 반복된 잡념을 오늘의 티셔츠와 플레이리스트로 잊어 보시기를.
적당한 스타일은 덤입니다.
곱씹어도 소용없는 사운드스케이프
어느 여름 밤, 1989년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 무대를 보고 있었다. 마일스 데이비스가 마이클 잭슨의 명곡 <휴먼네이처(Human Nature)>를 연주한다. 트럼펫에서 찔끔찔끔 흘러나오는 선율. 아름다운 멜로디를 그는 툭툭 숨결을 내뱉듯 들려준다. 원곡에서 건반 세션을 맡았던 그룹 토토(Toto)의 데이비드 포카로가 들려주는 말쑥한 연주와는 딴판. 하지만 그만의 짐짓 퉁명스런 스타일이 끌어가는 긴장감이 좋다.
그들 옆에서 R&B와 소울의 여왕, 샤카 칸이 힘차게 소리를 내지른다. 그녀를 따라가는 현란한 색소폰 연주, 마일스의 차갑고 건조한 트럼펫 톤과 대비되는 이 뜨거움이 나를 살짝 긴장하게 한다. 서로 다른 결이 부딪히면서도 이내 하나의 색채로 녹아드는 순간, 원곡이 잊혀진다. 저런, 마이클 잭슨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그날 이후 <Human Nature>는 마일스 데이비스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쉽사리 곁을 내주지 않는 냉랭한 고양이 같다. 다가가려 하면 쌩하고 몸을 돌려 달아난다. 그런데 이 고양이가 너무 매력적이다. 신비롭기까지 하다. 그래, 좋은 음악은 머리로 다가가면 달아나 버리지. 그래서 음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깊고 얕음을 가늠하는 나만의 기준점은 언제나 마일스 데이비스이다.
마일스 데이비스를 들을 때마다 번번이 곱씹기를 포기하고 그가 그려내는 사운드스케이프 앞에 멈춰서고 만다. 대체 음악 전문가들은 그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던 걸까, 자서전과 인터뷰집만 해도 이미 여러 권을 사들였다. 돈 치들이 마일스를 연기한 영화 <마일스(Miles Ahead)>도 '곱씹어' 봤다. 마일스가 라디오 생방송에 전화를 걸어 쩔쩔매는 DJ에게 자신의 곡을 틀어 달라 요청하는 장면은 정말 강렬했다.
“이봐, 내 앨범 <스페인 소묘(Sketches of Spain)>에 있는 곡 좀 틀어줘. 솔레아(Solea).”
잠시 후, DJ가 말한다.
“미스터 데이비스, 당신을 위한 곡입니다.”
1960년 발표된 앨범 <스케치 소묘>의 마지막 곡. 당시 마일스는 새로운 음악 방향을 모색하며, 지중해와 라틴 아메리카 음악 전통에서 영감을 찾고 있었다. <솔레아>는 플라멩코의 전통 양식으로, 보통 12박 구조의 리듬 안에서 깊은 비애와 명상을 표현한다. 거기에 재즈의 거장이자 위대한 작곡가 길 에반스(Gil Evans)가 리듬을 느슨하게 하여 재즈 오케스트라의 화성과 구조에 적합하게끔 확장했다. 그 결과 <솔레아>는 플라멩코를 원형으로 한 재즈라는 낯선 공간감을 만들어냈다.
12분이 넘는 연주. 마치 한여름의 습기 없는 마드리드 황혼녘 광장에 서서 플라멩코 공연을 보는 듯하다. 여행객의 설렘과 긴장감이 느껴지고, 모든 감각이 연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트럼펫은 호소하고, 오케스트라는 트럼펫이 울리는 배경을 점점 더 확장한다.
몇 해 전 마일스 데이비스 공홈에서 직구한 <스페인 소묘> 앨범 커버풍의 티셔츠를 입고 황혼 무렵 한강으로 나간다. 그리고 <솔레아>, 곱씹지 않아도 꽂히는 사운드스케이프를 재생한다. 그래 정말로 스페인 여행을 가야겠다. 스페인의 어느 가파른 언덕 카페에 앉아 지금 이 셔츠를 입고, 황혼의 도시를 내려다봐야지. 그때 <솔레아>를 들으면 비로소 내 사랑의 깊이까지 닿을 수 있을 것 같다.
글/사진 백영훈
1990년대의 팝과 록에 어지러이 매혹당하며, 장래 희망으로 FM 라디오 DJ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어렸을 적 바람과는 달리 글로벌 IT기업에서 25년 이상 일을 해오고 있다. 전업의 시간 이편에서는 팝을 비롯한 대중문화 딜레탕트로서의 삶을 즐기며, 여전히 팝 키드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음악을 입다』가 있다. · 도서 정보 : 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935274
곱씹어도 소용없는 사운드스케이프
어느 여름 밤, 1989년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 무대를 보고 있었다. 마일스 데이비스가 마이클 잭슨의 명곡 <휴먼네이처(Human Nature)>를 연주한다. 트럼펫에서 찔끔찔끔 흘러나오는 선율. 아름다운 멜로디를 그는 툭툭 숨결을 내뱉듯 들려준다. 원곡에서 건반 세션을 맡았던 그룹 토토(Toto)의 데이비드 포카로가 들려주는 말쑥한 연주와는 딴판. 하지만 그만의 짐짓 퉁명스런 스타일이 끌어가는 긴장감이 좋다.
그들 옆에서 R&B와 소울의 여왕, 샤카 칸이 힘차게 소리를 내지른다. 그녀를 따라가는 현란한 색소폰 연주, 마일스의 차갑고 건조한 트럼펫 톤과 대비되는 이 뜨거움이 나를 살짝 긴장하게 한다. 서로 다른 결이 부딪히면서도 이내 하나의 색채로 녹아드는 순간, 원곡이 잊혀진다. 저런, 마이클 잭슨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그날 이후 <Human Nature>는 마일스 데이비스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쉽사리 곁을 내주지 않는 냉랭한 고양이 같다. 다가가려 하면 쌩하고 몸을 돌려 달아난다. 그런데 이 고양이가 너무 매력적이다. 신비롭기까지 하다. 그래, 좋은 음악은 머리로 다가가면 달아나 버리지. 그래서 음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깊고 얕음을 가늠하는 나만의 기준점은 언제나 마일스 데이비스이다.
마일스 데이비스를 들을 때마다 번번이 곱씹기를 포기하고 그가 그려내는 사운드스케이프 앞에 멈춰서고 만다. 대체 음악 전문가들은 그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던 걸까, 자서전과 인터뷰집만 해도 이미 여러 권을 사들였다. 돈 치들이 마일스를 연기한 영화 <마일스(Miles Ahead)>도 '곱씹어' 봤다. 마일스가 라디오 생방송에 전화를 걸어 쩔쩔매는 DJ에게 자신의 곡을 틀어 달라 요청하는 장면은 정말 강렬했다.
“이봐, 내 앨범 <스페인 소묘(Sketches of Spain)>에 있는 곡 좀 틀어줘. 솔레아(Solea).”
잠시 후, DJ가 말한다.
“미스터 데이비스, 당신을 위한 곡입니다.”
1960년 발표된 앨범 <스케치 소묘>의 마지막 곡. 당시 마일스는 새로운 음악 방향을 모색하며, 지중해와 라틴 아메리카 음악 전통에서 영감을 찾고 있었다. <솔레아>는 플라멩코의 전통 양식으로, 보통 12박 구조의 리듬 안에서 깊은 비애와 명상을 표현한다. 거기에 재즈의 거장이자 위대한 작곡가 길 에반스(Gil Evans)가 리듬을 느슨하게 하여 재즈 오케스트라의 화성과 구조에 적합하게끔 확장했다. 그 결과 <솔레아>는 플라멩코를 원형으로 한 재즈라는 낯선 공간감을 만들어냈다.
12분이 넘는 연주. 마치 한여름의 습기 없는 마드리드 황혼녘 광장에 서서 플라멩코 공연을 보는 듯하다. 여행객의 설렘과 긴장감이 느껴지고, 모든 감각이 연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트럼펫은 호소하고, 오케스트라는 트럼펫이 울리는 배경을 점점 더 확장한다.
몇 해 전 마일스 데이비스 공홈에서 직구한 <스페인 소묘> 앨범 커버풍의 티셔츠를 입고 황혼 무렵 한강으로 나간다. 그리고 <솔레아>, 곱씹지 않아도 꽂히는 사운드스케이프를 재생한다. 그래 정말로 스페인 여행을 가야겠다. 스페인의 어느 가파른 언덕 카페에 앉아 지금 이 셔츠를 입고, 황혼의 도시를 내려다봐야지. 그때 <솔레아>를 들으면 비로소 내 사랑의 깊이까지 닿을 수 있을 것 같다.
글/사진 백영훈
1990년대의 팝과 록에 어지러이 매혹당하며, 장래 희망으로 FM 라디오 DJ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어렸을 적 바람과는 달리 글로벌 IT기업에서 25년 이상 일을 해오고 있다. 전업의 시간 이편에서는 팝을 비롯한 대중문화 딜레탕트로서의 삶을 즐기며, 여전히 팝 키드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음악을 입다』가 있다.
· 도서 정보 : 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9352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