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 in there][프라하] 여행, 그때 있었기에 지금도 있는

2025-09-30

제이 in there #12



여행하는 동안 읽어야지 하고 챙긴 시집 『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를 라운지 한 편에서 몽땅 완독해버렸다.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고 도시를 넘을 시간에 시를 읽는 낭만을 챙기려고 했는데. 일상어로 쓰여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던 시집에서 제일 마음에 남은 문장이 있다. 그대들도 그대들대로 잘났으니 잘나기 바랍니다. 잘나기 바라는 여행을 위해 서점에서 새로 천선란 작가의 소설집 『모우어』를 골랐다. 


지정 좌석이 변경되지는 않았는지 새벽에 확인할 때까지만 해도 비워져 있던 좌석들이 꽤 많았는데 비행기가 꽉 찼다. 슬쩍 둘러보니 동유럽 몇개국 며칠 투어 같은 안내 책자를 들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나이든 부모와, 초등학생 아이와, 모임 친구들과 함께인 사람들이 들뜬 소음을 내고 있다. 행복의 척도로 여행을 기준 삼는 게 바람직한 것인지 확신할 순 없지만, 이들의 표정이 어떠했다는 걸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어떤 도시에 로망이란 단어를 붙이는 이유엔 거창함이 없다. 어느 사진 한 장, 영화 속 한 장면, 막연한 이미지, 도시 전설, 소문 등. 10대 때부터 내게 그런 로망의 도시가 딱 세 곳 있는데, 바로 리스본과 베네치아, 프라하다. 어쩜 이름까지 이토록 로맨틱한지. 회사 입사 후 휴가를 길게 내도 눈치가 안 보이는 때가 되었다 싶었을 때 나는 이 로망의 도시 중 가장 첫 번째로 프라하를 선택했다. 그리고 11년이 지나 나는 다시 프라하행 비행기에 올랐다.


프라하 중앙역


그렇게 의미 있는 프라하지만 사실 이 도시에 있는 시간은 고작 하루다. 이번 휴가의 진짜 목적지는 폴란드. 폴란드의 브로츠와프는 인천에서 직항편까지 있지만, 이왕이면 ‘그’ 프라하에 또 오고 싶었고 프라하에서 폴란드 주요 도시를 기차로 이동할 수 있어 일정을 하루 쪼개 온 것이다. 1분 1초가 아쉬우니 걸음을 서두를 수밖에. 프라하 바츨라프 하벨 공항에 도착해 버스를 타고 중앙역에 도착했다. 중앙역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짐만 풀어둔 채 바로 나섰다. 그나마 초행길이 아니라 공항에서 호텔까지 헤매지 않고 도착해 시간을 많이 단축시켰다. 

이역만리 너머에 알고 있는 도시가 있다.


화약탑과 구시가지


화약탑을 지나쳐 국립극장(이 근처 식당에서 스비치코바를 먹었었지)과 구시가지 광장, 천문 시계(여기 안쪽 골목이 당시 묵었던 한인민박인데. 아직도 있으려나), 하벨시장(마녀 마그넷은 디자인 하나 변하지 않았다), 바츨라프 광장(스카이다이빙을 하러 가기 위해 떨리는 마음으로 차를 기다렸던)을 순식간에 돌았다.


신형철 평론가가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쓴 없음은 없어질 수 없으므로를 내 식대로 변형해보면, 있음은 있었기에 영원히 없어질 수 없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이지만, 11년 만에 다시 온 프라하는 여전하고 여전했다. 아무렴 트램 한 번 탄 적 없이 구석구석 내내 걸어 다녔던 걸음들이 사라질 리 만무하지. 어? 여기 스왈로브스키 매장에서 왼쪽으로 꺾은 다음에 오른쪽으로 또 왼쪽으로. 맞아 이 길이 까렐교로 이어졌어. 여기 성당 뒤쪽에 재즈바가 있었는데. 한인 숙소 같이 쓴 이름도 묻지 않은 언니랑 갔었던 것 같은데. 맞네 여기야. 내내 이랬다. 창문 하나, 테이블 하나, 벽돌 하나에 묻혀 있던 기억이 불쑥 불쑥 솟아났다. 까렐교에서, 존 레넌 벽 앞에서 나는 잊힌 게 아니었던 것들을 꺼내 왔다. 그리고 나는 여길 다시 와도 그때와 똑같은 걸 또 하게 되는구나. 나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존 레넌 벽 초입


체코 전통 음식을 판매하는 식당 민코브나Mincovna에서 가장 체코스러운 메뉴인 굴라쉬와 필스너 우르겔 생맥주를 시켰다. 맥주의 탄산으로 이동의 묵은 피로가 쑥 내려간다. 어두워져 가는 창밖 너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는 보지 않을 사람이라 생각해 그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잔뜩 듣게 해버린 너를 떠올렸다. 스카이다이빙을 같이 했다는 일체감과 그 옅은 흥분감에 휩싸여, 코젤 캔맥주를 사 들고 까렐교가 보이는 벤치에 앉아 도시가 까맣게 어두워질 때까지 함께였던. “프라하 가본 적 있지. 그때 지금은 기억도 안 나는 이야기를 잔뜩 했던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어” 하며 이따금 그때를 화젯거리 삼으며 잘 살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맥주 한 잔 추가 주문.



여독과 취기가 동시에 올라 계산을 마치고 호텔로 향했다. 구글 지도를 켜지 않아도 호텔로 가는 길을 알고 있다. 이어폰을 통해 나오는 음악을 사운드 트랙 삼고 핸드폰은 가방에 넣었다. 여행의 기억은 가물가물하더라도 이 길만은 몸이 기억하고 있다. 열심히 여행한 흔적은 머리보다 몸에 깊게 새겨지는 법이다.


이른 새벽에 출발해, 아침 일찍 공항에 도착해, 긴 비행을 날아, 그 상태로 바로 여행을 하는 첫날이 아닌 푹 자고 일어난 뒤 깨끗하게 씻고 준비해 나서는 이튿날 아침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여행 첫날이 아닐까. 일찌감치 채비를 마치고 나섰다.




글/사진 백지은

지역 방송국에서 일하며 덕질하는 게 유일한 취미인 3n살 덕후. 종종 여행하고, 가끔 글을 씁니다. 『보라하라,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덜』을 쓰고, 『규슈단편』을 함께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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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하라,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덜』: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22159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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