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 in there][프라하] 프라하의 기억 한 겹을 덧씌우고서

2025-10-01

제이 in there #13


d20d89631ac4b.jpg


코로나가 종식되고 사람들은 타의로 제지당했던 여행의 한이라도 풀 듯 너 나 할 것 없이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생겨 난 단어인 오버 투어리즘. 어딜 가나 관광객들이 북적이는 오버 투어리즘의 프라하라지만 오전 6시가 막 지난 일요일의 프라하는 치장을 마치지 않은 맨얼굴로 내가 원래 알고 있던 풍경을 고스란히 내밀어주고 있었다. 선선하다 못해 쌀쌀한 여름 공기에 힘껏 숨을 들이마셨다. 한 걸음 걷고 사진, 또 한 걸음 걷고 사진. 비슷비슷한 사진이 조금씩 다른 형태로 사진첩에 쌓인다.


다시 화약탑과 구시가지 광장, 까렐교를 지나 프라하 성까지 걸었다. 구글로 검색하면 약 3km의 거리로 도보 40분이 걸리는 것으로 나온다. 실제론 걸음을 자주 멈춰 1시간 정도 걸렸다. 그러나 상상해보시라. 맑고 상쾌하고 자못 쌀쌀한 여름 공기, 한적한 프라하의 도심, 아름다운 건축물, 블타바 강, 새 소리 같은 것들을. 단연코 조금도 피로하지 않았다. 프라하 성 근처의 카페 야외 좌석에서 에그 베네딕트와 아메리카노를 주문해 먹으며 오전 햇살을 만끽했다.


b66f24c3181e3.jpg
52b1e439e97a3.jpg


현재 작동하는 천문시계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프라하 천문시계는 이곳의 대표 관광지라 이 주변은 언제나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특히 정시에 진행되는 시계 쇼를 보기 위해 매 정각마다 그야말로 장사진을 이룬다. 오전 내내 걷고 걷다 다시 구시가지 광장으로 돌아와 천문시계 건너편 레스토랑의 야외 좌석에 자리를 잡고 와인을 시켰다. 이런 초인기 관광지에서 파는 소비뇽 블랑 한 잔이 한 화로 만 원 이하라니. 이곳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나.


12시 정각이 되자 천문시계의 해골 인형이 종을 울렸다. 죽음의 때가 왔음을 안 허영과 탐욕의 인형들은 고개를 내저으며 운명을 거부하고, 열두 사제 인형이 차례로 등장해 죽음 앞에 부질없는 인간의 존재를 깨닫게 한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주제를 지닌 퍼포먼스라는데 이 과정 전체가 1분이 채 되지 않아 유명세에 비해 볼거리는 아주 허탈하다. 핸드폰을 높이 들어 올린 관광객들을 앞세운 테이블에 앉아있으니 “이게 끝이야?” 하는 각국의 언어를 듣는 재미가 있었다. 나도 처음에 왔을 때 저랬지, 하는 라떼 토크를 와인 한 모금에 삼켰다.


068d443aebf9f.jpg

프라하 천문시계


얼마 지나지 않아 레스토랑에 한 중국인 커플이 들어왔다. 서로 자리를 바꿔가며 열심히 사진을 찍는 모습을 무심코 바라봤다. 얼마 후 그 커플이 따로 요청을 한 건지 메인 메뉴와 디저트, 음료가 한꺼번에 그 테이블에 서빙이 되었고, 남자는 바로 계산까지 마쳤다. 다시 메뉴를 소품 삼아 서로 자리를 바꿔가며 여러 사진을 찍는 두 사람. 그리고 그들은 음식엔 손도 대지 않고 그대로 놔둔 채 곧바로 레스토랑을 떠났다. 서버를 비롯하여 야외 좌석의 모두가 서로의 눈을 쳐다보았다. “우리가 지금 뭘 본 거냐”는 대화가 테이블을 넘나 들었다. 여행의 형태는 다양하다. 그릇된 방식으로도 다양할 수 있는 법이다.


작은 규모의 알폰스 무하 뮤지엄을 관람했고, 보이는 모든 기념품 가게에 들러 구경도 했다. 새 운동화를 신었더니 뒤꿈치가 시큰해 발목이 높은 양말을 몇 켤레 샀고, 어느 핸드메이드 도자기 상점에서 마음에 든 접시를 몇 번이고 들었다가 놓았다가도 했다. 오늘이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다면 지체 없이 카드를 꺼냈을 텐데. 필스너 우르겔 뮤지엄 역시 안타까운 눈으로 지나쳤다. 아쉽지만 여기까지다.


예약한 오후 2시 50분 기차를 타기 위해 호텔에서 짐을 챙겨 나와 프라하 중앙역으로 향했다. 전광판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다가 내가 탈 기차 번호를 확인하곤 그제야 숨을 돌리고 아이팟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여행 짐을 꾸리다 옛 아이팟을 우연히 발견해 이번 여행에 챙겨 왔다. 11년 전 프라하에서 듣던 노래 목록이 고스란히 담긴 아이팟이다(이 아이팟을 들고 찍은 사진이 인스타그램 게시물에 남아 있어 모를 수가 없었다). 놀랄 정도로 감쪽같이 잊고 있었던 노래 Mr.big의 <To be with you>가 불쑥 시작되었다. 이럴 걸 예상하고 챙겨 온 건데 노래 타이밍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프라하에 한 겹 덧씌웠구나, 기억도, 추억도, 걸음도, 음악도.


bf054d4f21203.jpg


플랫폼으로 내려왔다. 인천에서 직항으로 가지 않고 프라하에서 출발하는 기차로 닿는 여정을 시작하고 싶었던 곳. 아직은 낯선 이름인 폴란드 브로츠와프로 향할 기차가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글/사진 백지은

f97bccbaf9b9f.png

지역 방송국에서 일하며 덕질하는 게 유일한 취미인 3n살 덕후. 종종 여행하고, 가끔 글을 씁니다. 『보라하라,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덜』을 쓰고, 『규슈단편』을 함께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antabile.j
『보라하라,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덜』: 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22159791

2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