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음악을 입다]여물어야 들리는 만시지탄, 잭슨 브라운 Late for the Sky

2025-10-03


음악 애호가, 티셔츠 수집가, 『음악을 입다』의 백영훈 작가가 들려주는 티셔츠와 랜덤 플레이 리스트.
무작위, 우연, 계획되지 않은 흐름에서 발생하는 사건, 랜덤은 그래서 예상치 못한 선물이 되기도 합니다.
오래전 LP와 카세트테이프에서, 아이팟에서, 콘서트에서 듣던 팝과 록과 재즈를
태연하게 오늘의 일상에 랜덤으로 가져다 놓습니다.
인생의 헤아릴 수 없는 고민, 반복된 잡념을 오늘의 티셔츠와 플레이리스트로 잊어 보시기를.
적당한 스타일은 덤입니다.


황혼 무렵 아직 옅게 남은 푸른 빛


오사카 여행의 마지막 날, 나는 결국 마음을 꺾고 ‘디스크 유니언(Disk Union)’ 매장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전날 들렀을 때 슬쩍 들춰봤던 빈티지 록 티셔츠들이 눈앞에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행거에 잔뜩 걸려 있던 그 컬렉션이 결코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아채기까지 단 1분. ‘이번 여행에선 티셔츠에 돈을 쓰지 않겠어’라는 나름의 결심은, 하릴없이 흐트러져 버렸다.

  

그나마 마음을 다스려 두 벌만 샀다. 에릭 클랩튼의 2023년 부도칸 공연기념 데님 재킷과, 잭슨 브라운의 2004년 오사카 공연기념 티셔츠다. 평소 빈티지 옷은 잘 사지 않지만, 이 두 벌은 상태도 A급이었고, “어이 당신, 지금 품지 않으면 앞으로 후회막심일 걸?” 하는 시그널을 뇌파로 쏘아 보냈다. 믿거나 말거나. 계산을 치른 후 갈색 바탕에 어쿠스틱 기타를 쥐고 있는 잭슨 브라운의 모습이 프린트된 티셔츠를 바로 꺼내 입었다. 그날, 카페에 앉아 집중적으로 들었던 그의 노래들. 특히 <Late for the 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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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 브라운. 우리 팬들에게 그는 한때 심야 FM라디오나 LP바에서 즐겨 틀어주던 「Load Out」과 「Stay」 연곡으로 잘 알려진 포크 음악 가수다. 멀끔하고 댄디한 용모와 보컬 톤에 어딘지 히피와 방랑자 같은 기운이 감돌았고, 음악엔 다소의 청승기가 끼어있지만 듣고 나면 왠지 아쉬움과 여운이 남겨졌다. 그리고 그의 공연에 함께했던 세션 뮤지션들의 연주가 참 맛깔났다. 그 티셔츠를 입고 바로 떠오른 노래가 <Late for the sky>였던 것은 음악 에세이 <닉 혼비의 노래들(31 Songs)>에서 작가가 그 곡을 다룬 챕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오사카 여행에서 만난 잭슨 브라운 티셔츠가 불러온 닉 혼비의 글이라는 생각의 연쇄.

 

<Late for the sky>에 대해 닉 혼비가 이야기하는 건, 이 노래가 결국 ‘어른의 음악’이라는 것이다. 동감한다. 노랫말은 오래 함께한 연인과의 관계 위기가 찾아오고 그걸 어떻게든 풀어보려는 안타까운 마음을 담고 있다. ‘우리 사랑의 관계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다시 애쓰고자 하는 마음이 있지만, 그 둘은, 그리고 노래를 듣는 우리는 안다. 결국 봉합되어 똑같은 사랑을 하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그렇기에 이런 구절을 듣고 있노라면 마음이 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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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oking hard into your eyes, there was nobody I'd ever known.
Such an empty surprise to feel so alone.
How long have I been sleeping,
how long have I been drifting along through the night?

너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지만, 그곳엔 내가 알던 누구도 없었지.
그렇게 홀로 있다는 공허한 놀라움이란
얼마나 오랫동안 나는 잠들어 있었을까,
얼마나 오랫동안 밤 속을 떠돌아다닌 걸까?


이 곡이 실린 1974년 동명의 앨범 자켓을 보면, 초저녁 무렵 어두운 황혼에 남은 푸른 하늘 빛 아래 주택가의 창문 불빛이 켜져 있다. 아무래도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빛의 제국(Empire of Light)>을 레퍼런스 삼은 듯하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 걸쳐 있는 듯한 분위기, 쓸쓸한 풍경 속에도 한 줌의 온기가 감돌지만, 동시에 곧 어딘가로 떠나야 할 것 같은 불안이 배어 있다. 


거친 에너지와 격한 호기심의 20대에 어찌 앞으로 다가 올 더딘 호흡과 체념, 무관심에, 때로는 곰삭은 질감의 정서에 곁을 내줄 수 있을까? 그 음악들의 곁에 서서 음미하게 되는 인생의 때가 슬그머니 와 있었다. 더디고 담담하게 스며드는 노래들. 어쩌면 어른의 음악. 밥 딜런이나 스틸리 댄, 닉 케이브, 톰 웨이츠, 닐 영, 그리고 요즘 그 리스트에 추가한 아티스트 잭슨 브라운.

 

가을 낮 하늘은 청명하며 높고 광활한데, 어른들이 맞이하는 어떤 인생의 가을 하늘, 그것도 저녁하늘은 한 때 서로가 조금이라도 떨어져 있으면 하늘이 두 쪽이라도 날 것 같던 그런 관계가 이제는 애써 어찌 돌려보려 해도 늦어버린, 저 먼 하늘이다. <Late for the sky>는 그 하늘을 노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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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백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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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의 팝과 록에 어지러이 매혹당하며, 장래 희망으로 FM 라디오 DJ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어렸을 적 바람과는 달리 글로벌 IT기업에서 25년 이상 일을 해오고 있다. 전업의 시간 이편에서는 팝을 비롯한 대중문화 딜레탕트로서의 삶을 즐기며, 여전히 팝 키드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음악을 입다』가 있다.
· 도서 정보 : 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935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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