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 in there #15

1980년대 폴란드에서는 공산 체제에 반대하는 ‘오렌지 얼터너티브(Orange Alternative)’라는 예술 운동이 일어났다. 운동에 참여한 이들은 정부의 단속을 피하기 위해 직접적인 정치적 구호 대신 낙서 위에 난쟁이 그림을 그리거나 풍자적인 퍼포먼스를 하면서 정권을 조롱했는데, 이후 난쟁이는 자유와 저항의 상징으로 자연스레 자리 잡게 되었다. 2001년 브로츠와프에 ‘파파 드워프’라는 난쟁이 동상이 처음 세워져 시의 상징처럼 인기를 얻었고, 이후 20~30cm 크기의 여러 난쟁이 동상이 브로츠와프 곳곳에 설치되었다. 현재는 1,000개 이상의 동상이 도시 전역에 흩어져 있다고 한다. 길을 걷다 이 동상들을 만나면 보물을 찾은 것처럼 기쁜데(동상 지도를 들고 본격적으로 다니는 사람도 굉장히 많다) 오전 11시를 기점으로 31개까지 찾기에 성공했다. 오늘 할 일에 하나 더 추가. 난쟁이 동상을 있는 힘껏 많이 찾을 것.

피에로기를 전문으로 파는 식당에서 수제 샤도네이 한 잔에 찌고 구운 피에로기 모둠을 먹었고, 300개의 계단 중 중간 이후부터 아래가 뻥 뚫린 철제였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올라가지 않았을 성 마리아 막달레나 대성당의 전망대에도 올랐다(이 전망대에도 난쟁이 동상이 있다). 작은 규모의 올드 타운이라 반나절 만에 길과 골목의 방향 대부분을 익혔다. 안다고 느끼는 것이 사랑이라면, 이제 이 도시는 제 겁니다.

브로츠와프는 다리의 도시라고도 불린다. 브로츠와프 중심에 흐르는 오데르 강을 따라 12개의 섬이 있고, 이들을 100개 이상의 다리가 잇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자물쇠가 걸린 다리를 건너 브로츠와프 대성당을 구경했고, 국립박물관을 지나 오데르 강을 바라보는 벤치에 오래 앉아 있었고, 난쟁이 동상을 몇 개 더 찾았다. 하루가 순식간에 저물었다.
* * *
커튼이 걷히니 오늘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다. 여행의 질의 절반은 날씨가 차지한다고 보면, 이미 절반은 먹고 들어간 셈이다. 도심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현대미술관인 포 돔 파빌리온의 오픈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 서둘러 조식을 먹고 나왔다. 운행 전인 회전목마가 놓인 코페르니쿠스 공원을 지나 근처 정류장에서 트램을 탔다. 역사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낡은 트램의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불퉁불퉁한 노면이 피부로 고스란히 느껴지는 구나 하고 있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앞에 앉은 꼬마 여자아이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잠깐 앞을 향한다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또 빤히. 그걸 몇 번 반복하더니 어느새 몸을 반쯤 돌려 시선을 내게 고정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나 케이팝 아이돌의 영향력인가, 라고 애써 생각하려 했지만 낯선 동양인에 대한 얕은 공격적 기저를 직감적으로 느끼고 말았다. 파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선을 떼지 않고 바라보는 아이의 눈동자. 트램 바깥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이국의 기차역 외에 내게 이방인의 위치를 깨닫게 하는 것 하나를 추가한다.
전시관 오픈 시간에 딱 맞추어 왔더니 나 이외의 관람객이 딱 한 사람인 상태로 아주 고독한 관람을 했다. 현대미술에 조예가 깊지 않아도 상설 전시의 많은 작품들이 직관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는데, 커다란 돌을 담은 채 뒤집어져 있는 카트, 한껏 구부러져 쓰러진 철제 조형물과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사람들의 얼굴이 모자이크된 어느 사람의 형체, 뚜껑이 양쪽으로 열린 녹슨 관 등은 예술은 결코 현실을 떠나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알리고 있었다. 미술관 중앙은 유리 천장으로 미술관 전체를 햇살로 품는 형태였는데 작품들의 묵직한 메시지 탓인지 관람객이 너무 없던 탓인지 내부가 유독 썰렁하게 느껴졌다.

일본 라멘 대신 불닭볶음면과 라면이 채워진 슈퍼마켓과 사람들이 북적이는 쇼핑몰을 돌아본 다음 다시 올드 타운으로 돌아왔다. 펜서 분수를 보며 앉은 야외 테이블에서 연어가 들어간 북유럽 스타일 베이글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오전에 다녀온 미술관의 썰렁함 때문이었는지, 급한 허기 때문이었는지 마지막 치즈까지 싹싹 긁어먹은 베이글이 오후 내내 소화가 되지 않아 미리 예약해 놓았던 저녁을 취소하고 호텔에서 쉬다 느지막이 산책을 나왔다.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대인 채도가 살짝 빠지는 해 질 무렵. 특별히 생각하고 나온 곳 없이 올드 타운을 걷다 오데르 강가로 나왔는데, 세상에 여기였다. 이 시간을 즐기려 많은 사람들이 강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맥주를 마시거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브로츠와프가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여행지가 아니다보니 이 일정을 준비하며 몇몇 후기들을 읽어보았는데, 저녁 무렵 오데르 강에 가면 좋다는 내용은 찾아보지 못했다. 원래 계획으론 이 시간에 저녁 식사를 하는 것이었는데 그 식사를 하지 않아 이 시간에 여길 왔다. 일부러 꼭 짜 맞춘 것 같다.

이쯤 되면 브로츠와프가 “나를 좋아해주는 게 느껴져. 그러니 나도 네가 좋아할 만한 걸 줄게” 하고 이곳으로 발걸음을 이끈 것임에 틀림없다. 버스킹을 준비하는 연주자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눈부시던 한낮의 해가 저만치 스러졌고, 하늘은 연한 노란색과 살구색을 띄더니 점차 짙은 남색으로 변해갔다. 가로등에 불이 들어올 때까지 그렇게 그곳에 한참 있었다.

조식을 든든하게 먹은 다음날 아침. 다시 올드 타운을 산책하고 돌아와 체크아웃을 마쳤다. 구시가지 초입에서 트램을 타고 중앙역에 다다랐다. 난쟁이의 도시도, 다리의 도시도 아닌 내게 물의 도시로 기억될 브로츠와프. 그 물 냄새를 품고 다음 도시, 크라쿠프행 기차를 기다린다. 여행을 떠나온 지 5일차, 이제 겨우 오전 11시를 지나고 있다.
글/사진 백지은

지역 방송국에서 일하며 덕질하는 게 유일한 취미인 3n살 덕후. 종종 여행하고, 가끔 글을 씁니다. 『보라하라,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덜』을 쓰고, 『규슈단편』을 함께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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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하라,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덜』: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22159791
제이 in there #15
1980년대 폴란드에서는 공산 체제에 반대하는 ‘오렌지 얼터너티브(Orange Alternative)’라는 예술 운동이 일어났다. 운동에 참여한 이들은 정부의 단속을 피하기 위해 직접적인 정치적 구호 대신 낙서 위에 난쟁이 그림을 그리거나 풍자적인 퍼포먼스를 하면서 정권을 조롱했는데, 이후 난쟁이는 자유와 저항의 상징으로 자연스레 자리 잡게 되었다. 2001년 브로츠와프에 ‘파파 드워프’라는 난쟁이 동상이 처음 세워져 시의 상징처럼 인기를 얻었고, 이후 20~30cm 크기의 여러 난쟁이 동상이 브로츠와프 곳곳에 설치되었다. 현재는 1,000개 이상의 동상이 도시 전역에 흩어져 있다고 한다. 길을 걷다 이 동상들을 만나면 보물을 찾은 것처럼 기쁜데(동상 지도를 들고 본격적으로 다니는 사람도 굉장히 많다) 오전 11시를 기점으로 31개까지 찾기에 성공했다. 오늘 할 일에 하나 더 추가. 난쟁이 동상을 있는 힘껏 많이 찾을 것.
피에로기를 전문으로 파는 식당에서 수제 샤도네이 한 잔에 찌고 구운 피에로기 모둠을 먹었고, 300개의 계단 중 중간 이후부터 아래가 뻥 뚫린 철제였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올라가지 않았을 성 마리아 막달레나 대성당의 전망대에도 올랐다(이 전망대에도 난쟁이 동상이 있다). 작은 규모의 올드 타운이라 반나절 만에 길과 골목의 방향 대부분을 익혔다. 안다고 느끼는 것이 사랑이라면, 이제 이 도시는 제 겁니다.
브로츠와프는 다리의 도시라고도 불린다. 브로츠와프 중심에 흐르는 오데르 강을 따라 12개의 섬이 있고, 이들을 100개 이상의 다리가 잇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자물쇠가 걸린 다리를 건너 브로츠와프 대성당을 구경했고, 국립박물관을 지나 오데르 강을 바라보는 벤치에 오래 앉아 있었고, 난쟁이 동상을 몇 개 더 찾았다. 하루가 순식간에 저물었다.
* * *
커튼이 걷히니 오늘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다. 여행의 질의 절반은 날씨가 차지한다고 보면, 이미 절반은 먹고 들어간 셈이다. 도심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현대미술관인 포 돔 파빌리온의 오픈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 서둘러 조식을 먹고 나왔다. 운행 전인 회전목마가 놓인 코페르니쿠스 공원을 지나 근처 정류장에서 트램을 탔다. 역사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낡은 트램의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불퉁불퉁한 노면이 피부로 고스란히 느껴지는 구나 하고 있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앞에 앉은 꼬마 여자아이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잠깐 앞을 향한다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또 빤히. 그걸 몇 번 반복하더니 어느새 몸을 반쯤 돌려 시선을 내게 고정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나 케이팝 아이돌의 영향력인가, 라고 애써 생각하려 했지만 낯선 동양인에 대한 얕은 공격적 기저를 직감적으로 느끼고 말았다. 파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선을 떼지 않고 바라보는 아이의 눈동자. 트램 바깥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이국의 기차역 외에 내게 이방인의 위치를 깨닫게 하는 것 하나를 추가한다.
전시관 오픈 시간에 딱 맞추어 왔더니 나 이외의 관람객이 딱 한 사람인 상태로 아주 고독한 관람을 했다. 현대미술에 조예가 깊지 않아도 상설 전시의 많은 작품들이 직관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는데, 커다란 돌을 담은 채 뒤집어져 있는 카트, 한껏 구부러져 쓰러진 철제 조형물과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사람들의 얼굴이 모자이크된 어느 사람의 형체, 뚜껑이 양쪽으로 열린 녹슨 관 등은 예술은 결코 현실을 떠나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알리고 있었다. 미술관 중앙은 유리 천장으로 미술관 전체를 햇살로 품는 형태였는데 작품들의 묵직한 메시지 탓인지 관람객이 너무 없던 탓인지 내부가 유독 썰렁하게 느껴졌다.
일본 라멘 대신 불닭볶음면과 라면이 채워진 슈퍼마켓과 사람들이 북적이는 쇼핑몰을 돌아본 다음 다시 올드 타운으로 돌아왔다. 펜서 분수를 보며 앉은 야외 테이블에서 연어가 들어간 북유럽 스타일 베이글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오전에 다녀온 미술관의 썰렁함 때문이었는지, 급한 허기 때문이었는지 마지막 치즈까지 싹싹 긁어먹은 베이글이 오후 내내 소화가 되지 않아 미리 예약해 놓았던 저녁을 취소하고 호텔에서 쉬다 느지막이 산책을 나왔다.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대인 채도가 살짝 빠지는 해 질 무렵. 특별히 생각하고 나온 곳 없이 올드 타운을 걷다 오데르 강가로 나왔는데, 세상에 여기였다. 이 시간을 즐기려 많은 사람들이 강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맥주를 마시거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브로츠와프가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여행지가 아니다보니 이 일정을 준비하며 몇몇 후기들을 읽어보았는데, 저녁 무렵 오데르 강에 가면 좋다는 내용은 찾아보지 못했다. 원래 계획으론 이 시간에 저녁 식사를 하는 것이었는데 그 식사를 하지 않아 이 시간에 여길 왔다. 일부러 꼭 짜 맞춘 것 같다.
이쯤 되면 브로츠와프가 “나를 좋아해주는 게 느껴져. 그러니 나도 네가 좋아할 만한 걸 줄게” 하고 이곳으로 발걸음을 이끈 것임에 틀림없다. 버스킹을 준비하는 연주자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눈부시던 한낮의 해가 저만치 스러졌고, 하늘은 연한 노란색과 살구색을 띄더니 점차 짙은 남색으로 변해갔다. 가로등에 불이 들어올 때까지 그렇게 그곳에 한참 있었다.
조식을 든든하게 먹은 다음날 아침. 다시 올드 타운을 산책하고 돌아와 체크아웃을 마쳤다. 구시가지 초입에서 트램을 타고 중앙역에 다다랐다. 난쟁이의 도시도, 다리의 도시도 아닌 내게 물의 도시로 기억될 브로츠와프. 그 물 냄새를 품고 다음 도시, 크라쿠프행 기차를 기다린다. 여행을 떠나온 지 5일차, 이제 겨우 오전 11시를 지나고 있다.
글/사진 백지은
지역 방송국에서 일하며 덕질하는 게 유일한 취미인 3n살 덕후. 종종 여행하고, 가끔 글을 씁니다. 『보라하라,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덜』을 쓰고, 『규슈단편』을 함께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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