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 in there][크라쿠프] 폴란드의 모든 시간과 감정을 간직한 풍경

2025-10-10

제이 in there #16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고, 아담한 브로츠와프 중앙역에서 출발했더니 크라쿠프 중앙역 규모에 놀라고 말았다. 쇼핑몰과 버스 터미널이 함께 있는 대규모 복합 시설에 도착하자 갓 상경한 사람처럼 이리저리 눈이 굴렀다. 예약한 호텔이 역 근처라 어디쯤이지 하며 역사를 빠져나오는데 길 건너에 떡 하니 보이는 호텔. 이 정도면 근처가 아니라 그냥 중앙역에 붙은 수준이다. 기차 이동이 많은 여행을 할 때 챙기는 오래된 캐리어의 손잡이가 브로츠와프에서 출발하면서부터 똑 갈라져버린 터라 이 위치가 이렇게 반가울 수 없다. 크라쿠프 중앙역과 도로를 마주한 전망을 가진 방에 체크인을 마쳤다.


폴란드 제2의 도시이자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로 꼽히는 크라쿠프는 197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역사 지구(구시가지)가 유명하다. 호텔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걸으면 구시가지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관문인 바르비칸이 나타난다. 사람들이 모여 사진을 찍고 있는 바르비칸을 지나쳐 플로리안 게이트를 통과하니 그야말로 영화 세트장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 사령부가 주둔해 전쟁의 피해를 비켜갈 수 있었다는 크라쿠프 구시가지는 중세의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중앙 광장의 직물회관이나 성모승천 성당도 그렇고 이곳을 둘러싼 건물들이며, 전통 의상을 차려입은 마부가 끄는 마차나 말발굽 소리 등이 하나도 이질적이지 않았다. 있어야 할 것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느낌. 이 때문에 크라쿠프가 폴란드 최고의 관광도시로 꼽힌다고 한다. 관광객들로 아주 붐비는 구시가지에서 겨우 브로츠와프만 보고 폴란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었다는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폴란드 전통음식 중 양배추를 주재료로 오래 끓여 먹는 스튜인 비고스bigos가 자작하게 끓인 김치찌개 맛이 난다고 해 메뉴를 검색해 식당을 찾았다. 구시가지의 끝자락이자 바벨 성에서 멀지 않은 위치에 있는 레스토랑 Czarna Kaczka에 도착해 예약한 이름을 말하자 건물 중정의 빈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점심이라기엔 늦고 저녁이라기엔 이른 시간임에도 대부분의 좌석이 채워져 있었다. 폴란드 맥주 지비에츠zywiec부터 시원하게 마시고 있으니 곧 주문한 메뉴가 나왔다. 버섯을 속재료로 한 피에로기도, 돼지고기가 들어간 비고스도 ‘어디서 많이 먹어 본 맛’이라 진짜 웃으며 먹었다. 한식같은데 한식이 아닌, 마치 외국인이 운영하는 한식당에 온 것 같달까. 추가한 하우스 와인 한 잔까지, 아주 배부르게 먹었다. 쨍쨍 쏟아지는 햇볕에 얼굴이 벌겋게 익어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폴란드 전통 스튜, 비고스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는 바벨 성과 그 성을 지키는 불 뿜는 용 조각상을 보았고, 유독 윤슬이 반짝이는 비스와 강을 지나쳐 다시 구시가지를 통과해 호텔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까먹지 않고 유리테이프도 샀다. 캐리어 손잡이를 테이프로 감아 붙였더니 이 정도면 이번 여행까지는 어찌저찌 버틸 만할 것 같다. 아이팟이 11년 전 프라하를 담고 기능을 멈췄었다면 이 캐리어는 폴란드를 마지막으로 담겠구나.


바벨성


북적북적하고 시끌시끌한 여행의 기운이 넘실대는 구시가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완전히 다른 크라쿠프의 모습이 나타난다. 구시가지를 빠져나와 20분 정도 더 걸어 도착한 카지미에슈는 크라쿠프의 유대인 지구다. 현재는 핫한 레스토랑이나 카페가 즐비한 곳이지만 나치 점령 시절 이곳의 유대인들은 게토로 강제 이주 돼 대부분 아우슈비츠 등으로 보내져 학살당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 촬영지가 이곳에 있어 조용하게 한 바퀴 돌아보고 카페 한 곳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아무것도 모른 채 왔으면 빈티지하고 힙한 동네 정도로만 여겼을 것 같은 이곳에서 간단한 점심까지 챙겨 먹은 뒤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크라쿠프에 왔다면 반드시 가야 하는, 가야만 하는 곳이 있기 때문이다.





글/사진 백지은

지역 방송국에서 일하며 덕질하는 게 유일한 취미인 3n살 덕후. 종종 여행하고, 가끔 글을 씁니다. 『보라하라,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덜』을 쓰고, 『규슈단편』을 함께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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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하라,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덜』: 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22159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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