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 in there #19
바르샤바는 나치 독일의 점령 하에 도시의 85%가 파괴되었으나 전쟁 후 시민들의 노력으로 구시가지를 비롯한 주요 건축물을 역사적으로 복원했다. 이 거리를 채우는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건물들이 불과 몇 십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라니, 재건된 도시라 더욱 아름다운 것 같기도 하다. 성 십자가 교회로부터 북쪽으로 조금 더 걸으니 지그문트 3세 바사 기둥과 바르샤바 왕궁이 있는 올드타운이었다. 내가 유튜브에서 보던 K팝 커버 댄스 팀이 춤을 추던 배경 그대로다. 마침 그 자리에서 또 다른 댄스팀이 비비의 노래로 영상을 찍고 있었다. 어린 학생들이 어설프게 추는 춤을 귀엽게 바라봤다. 이런 영상을 보고 이곳을 찾은 나 같은 사람이 있다는 걸 저 학생들은 전혀 모르겠지.
바르샤바 왕궁
올드타운 구경을 마치고 돌아 나오는데 잠시 소강상태이던 빗줄기가 갑자기 굵어졌다. 곧 저녁 시간이기도 했고 우산도 없으니 급히 근처 아무 식당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는데 나보다 뒤늦게 온 사람들의 맥주는 진작 나왔는데 내게는 주문조차 받으러 오지 않았다. 지나가는 서버를 눈짓으로 불렀더니 퉁명스러운 손짓으로 기다리란다. 때마침 비도 그쳐 그대로 메뉴판을 덮고 나왔다. 공짜로 비 안 맞고 의자에 앉아 쉴 수 있어서 좋았다 뭐.
미리 알아 두었던 폴란드식 돼지 족발 골롱카golonka를 파는 식당으로 가서 저녁을 먹었다. 지글지글 돌 판에 볶은 양배추와 함께 나온 골롱카에 맥주 한 잔을 곁들였다. 야들야들한 족발 식감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볶은 양배추가 꼭 볶은 김치와 같은 맛을 내 안 물리고 잘 먹었다. 이래서 배추가 없는 곳에선 양배추로 김치를 담나 보다. 이름 모를 식당에 들어가 어물쩍 또 피에로기를 먹을 뻔했는데 잘됐다 뭐.
골롱카
비가 내렸던 탓인지 해가 진 바르샤바의 하늘은 투명한 남색을 띠었다. 호텔 옥상에 바가 있다고 해서 방에 들어가기 전 한 층을 더 올라봤더니 세상에, 보라색 조명을 입은 문화과학궁전과 바르샤바의 몇 안 되는 높은 빌딩들이 보이는 세련된 루프탑 바가 있었다. 야경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와인 한 잔을 주문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면, 이 루프탑 바의 야경으로 마무리되는 오늘 여행도 성공적이다.
유럽에는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을 모티브로 지은 궁이 많다. 바르샤바도 예외는 아니어서 폴란드의 베르사유라는 빌라노프 궁전이 있다. 잘 정돈된 꽃 정원과 백조들이 거니는 작은 개울의 사이에 위치한 노란색의 빌라노프 궁전은 선선한 바람이 불 때마다 실려 오는 온갖 꽃향기 덕에 오래 머무를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궁전과 정원을 배경으로 여러 사진을 찍었는데 나는 현실이고 배경이 꼭 합성 같아 보고 좀 웃었다.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이름 모를 꽃향기에 취해 있다 도심으로 나왔는데 거짓말처럼 하늘이 구름으로 잔뜩 뒤덮였다. 잠시 다른 차원에 다녀왔다.
빌라노프 궁전
바르샤바 곳곳에서 매일 크고 작은 쇼팽 음악회가 열린다. 그중 내가 예약한 공연은 Time for Chopin. 공연이 열리는 콘서트홀은 약 50개의 간이 의자가 깔려 있는 좁은 전시회장 같은 곳이었다. 오늘의 연주자는 Joanna Różewska. 이 티켓 값에 이런 훌륭한 연주를 들어도 되나. 쇼팽이 직접 자신의 곡을 살롱에서 연주할 때 이런 규모지 않았을까 싶은 소규모로, 허니 와인을 제공하는 인터미션을 포함해 1시간으로 진행된 공연. 쇼팽의 음악은 이렇게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일상의 일부가 되는 거겠지. 클래식이 어렵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며.
공연을 보고 나온 일요일의 바르샤바 구시가지는 블록마다 시위가 한창이었다. 폴란드 국기가 여러 다른 깃발과 함께 펄럭이는 걸 무슨 시위인지도 모른 채 사진으로 남겼다. 마치 광화문에 여행 온 외국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해가 저물 때 호텔 루프탑 바에 다시 오르고 싶어 서둘러 돌아왔다. 커스틴 던스트를 닮은 직원이 메뉴를 전달하러 오며 바로 “너 어제 저쪽에 앉지 않았어?” 하고 말해, 웃어버렸다. 너무 바로 또 왔죠? 매번 소비뇽 블랑을 주문하는 것 같아 오늘은 피노 그리지오 한 잔, 내추럴 오렌지 와인 한 잔. 다들 칵테일 한 잔에 진짜 오래 앉아 있는데. 루프탑 바를 즐기기에 가성비가 제일 꽝인 사람이 나일 것이다. 모든 테이블이 만석이었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빈 좌석이 많다. 일요일 저녁이어서일까, 월요일 출근을 위해 이 시간엔 쉴 수 밖에 없는 모두를 대신하여 내가 대신 치얼스.
루프탑에서
글/사진 백지은

지역 방송국에서 일하며 덕질하는 게 유일한 취미인 3n살 덕후. 종종 여행하고, 가끔 글을 씁니다. 『보라하라,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덜』을 쓰고, 『규슈단편』을 함께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antabile.j
『보라하라,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덜』: 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22159791
제이 in there #19
바르샤바는 나치 독일의 점령 하에 도시의 85%가 파괴되었으나 전쟁 후 시민들의 노력으로 구시가지를 비롯한 주요 건축물을 역사적으로 복원했다. 이 거리를 채우는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건물들이 불과 몇 십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라니, 재건된 도시라 더욱 아름다운 것 같기도 하다. 성 십자가 교회로부터 북쪽으로 조금 더 걸으니 지그문트 3세 바사 기둥과 바르샤바 왕궁이 있는 올드타운이었다. 내가 유튜브에서 보던 K팝 커버 댄스 팀이 춤을 추던 배경 그대로다. 마침 그 자리에서 또 다른 댄스팀이 비비의 노래로 영상을 찍고 있었다. 어린 학생들이 어설프게 추는 춤을 귀엽게 바라봤다. 이런 영상을 보고 이곳을 찾은 나 같은 사람이 있다는 걸 저 학생들은 전혀 모르겠지.
바르샤바 왕궁
올드타운 구경을 마치고 돌아 나오는데 잠시 소강상태이던 빗줄기가 갑자기 굵어졌다. 곧 저녁 시간이기도 했고 우산도 없으니 급히 근처 아무 식당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는데 나보다 뒤늦게 온 사람들의 맥주는 진작 나왔는데 내게는 주문조차 받으러 오지 않았다. 지나가는 서버를 눈짓으로 불렀더니 퉁명스러운 손짓으로 기다리란다. 때마침 비도 그쳐 그대로 메뉴판을 덮고 나왔다. 공짜로 비 안 맞고 의자에 앉아 쉴 수 있어서 좋았다 뭐.
미리 알아 두었던 폴란드식 돼지 족발 골롱카golonka를 파는 식당으로 가서 저녁을 먹었다. 지글지글 돌 판에 볶은 양배추와 함께 나온 골롱카에 맥주 한 잔을 곁들였다. 야들야들한 족발 식감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볶은 양배추가 꼭 볶은 김치와 같은 맛을 내 안 물리고 잘 먹었다. 이래서 배추가 없는 곳에선 양배추로 김치를 담나 보다. 이름 모를 식당에 들어가 어물쩍 또 피에로기를 먹을 뻔했는데 잘됐다 뭐.
비가 내렸던 탓인지 해가 진 바르샤바의 하늘은 투명한 남색을 띠었다. 호텔 옥상에 바가 있다고 해서 방에 들어가기 전 한 층을 더 올라봤더니 세상에, 보라색 조명을 입은 문화과학궁전과 바르샤바의 몇 안 되는 높은 빌딩들이 보이는 세련된 루프탑 바가 있었다. 야경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와인 한 잔을 주문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면, 이 루프탑 바의 야경으로 마무리되는 오늘 여행도 성공적이다.
유럽에는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을 모티브로 지은 궁이 많다. 바르샤바도 예외는 아니어서 폴란드의 베르사유라는 빌라노프 궁전이 있다. 잘 정돈된 꽃 정원과 백조들이 거니는 작은 개울의 사이에 위치한 노란색의 빌라노프 궁전은 선선한 바람이 불 때마다 실려 오는 온갖 꽃향기 덕에 오래 머무를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궁전과 정원을 배경으로 여러 사진을 찍었는데 나는 현실이고 배경이 꼭 합성 같아 보고 좀 웃었다.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이름 모를 꽃향기에 취해 있다 도심으로 나왔는데 거짓말처럼 하늘이 구름으로 잔뜩 뒤덮였다. 잠시 다른 차원에 다녀왔다.
바르샤바 곳곳에서 매일 크고 작은 쇼팽 음악회가 열린다. 그중 내가 예약한 공연은 Time for Chopin. 공연이 열리는 콘서트홀은 약 50개의 간이 의자가 깔려 있는 좁은 전시회장 같은 곳이었다. 오늘의 연주자는 Joanna Różewska. 이 티켓 값에 이런 훌륭한 연주를 들어도 되나. 쇼팽이 직접 자신의 곡을 살롱에서 연주할 때 이런 규모지 않았을까 싶은 소규모로, 허니 와인을 제공하는 인터미션을 포함해 1시간으로 진행된 공연. 쇼팽의 음악은 이렇게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일상의 일부가 되는 거겠지. 클래식이 어렵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며.
공연을 보고 나온 일요일의 바르샤바 구시가지는 블록마다 시위가 한창이었다. 폴란드 국기가 여러 다른 깃발과 함께 펄럭이는 걸 무슨 시위인지도 모른 채 사진으로 남겼다. 마치 광화문에 여행 온 외국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해가 저물 때 호텔 루프탑 바에 다시 오르고 싶어 서둘러 돌아왔다. 커스틴 던스트를 닮은 직원이 메뉴를 전달하러 오며 바로 “너 어제 저쪽에 앉지 않았어?” 하고 말해, 웃어버렸다. 너무 바로 또 왔죠? 매번 소비뇽 블랑을 주문하는 것 같아 오늘은 피노 그리지오 한 잔, 내추럴 오렌지 와인 한 잔. 다들 칵테일 한 잔에 진짜 오래 앉아 있는데. 루프탑 바를 즐기기에 가성비가 제일 꽝인 사람이 나일 것이다. 모든 테이블이 만석이었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빈 좌석이 많다. 일요일 저녁이어서일까, 월요일 출근을 위해 이 시간엔 쉴 수 밖에 없는 모두를 대신하여 내가 대신 치얼스.
글/사진 백지은
지역 방송국에서 일하며 덕질하는 게 유일한 취미인 3n살 덕후. 종종 여행하고, 가끔 글을 씁니다. 『보라하라,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덜』을 쓰고, 『규슈단편』을 함께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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