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 in there][그단스크] 잠시 닫아두었던 세상의 문을 다시 열고

2025-10-22

제이 in there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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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북부엔 발트 해의 항구 도시인 그단스크가 있다. 1박 이상을 해야 하는 도시지만 당일치기로 맛이라도 보려 아침 일찍 서둘러 기차를 탔다. 바르샤바를 출발할 땐 괜찮았는데 3시간이 걸려 그단스크에 도착하니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바닷가에 가까워져서인지 바람도 거세고 무엇보다 무척 추웠다. 반팔에 얇은 가디건을 걸쳐 입었는데도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일단 카페에 들러 따뜻한 커피로 몸을 데웠다. 


그단스크의 중심부에는 암스테르담과 코펜하겐이 섞인 듯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좁고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도보로 1시간 만에 중심부를 모두 돌아볼 수 있었는데, 대부분이 카페나 레스토랑, 기념품 가게였다. 발트 해로 이어지는 강을 거스르는 해적선 같은 배가 위용을 뽐냈고, 그 옆에서 가이드 설명을 듣고 있는 단체 관광객들을 지나쳤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건물과 유리창으로만 지어진 건물이 맞닿고 있는 구역을 지나 성모 승천 대성당에 들렀고, 호박 보석을 파는 상점 거리도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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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이면 이곳까지 왔으니 해산물 한 번은 먹고 가야할 것 같아 괜찮아 보이는 식당을 찾았다. 에피타이저로 세비체를, 메인 메뉴로는 참치 스테이크를 시켰는데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랐다. 생참치의 겉면을 그릴로 구운 스테이크에 더한 매콤한 멕시칸소스 하며, 고구마와 컬리플라워를 한 입 크기로 바삭하게 익혀 재밌는 식감을 준 것이며, 추천해 준 와인의 어울림까지. 참치 회만 먹어봤던 내게 충격적일 정도로 맛있었다. 부족한 건 없는지 세심하고 다정하게 챙겨 준 직원에게 진심의 감사 인사를 전하고 계산을 마쳤다. 


그단스크에는 종일 비가 내릴 예정이었고, 추운 날씨에 얇은 옷차림으로 돌아다니다 보니 와인 한 잔에 얼굴에 열이 올랐고, 이런 날씨에 소폿이라는 근처 바다까지 다녀오기엔 무리란 생각이 들어 예약한 기차 시간을 가까운 시간대로 바꿨다. 반나절도 아닌 반반나절. 흡족한 식사를 마쳤겠다, 전혀 아쉽지 않은 마음이 되어 홀가분하게 바르샤바행 기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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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바르샤바는 여름이 되면 특정 기간 동안 매주 일요일마다 와지엔키 공원의 쇼팽 동상 앞에서 무료 쇼팽 콘서트를 연다. 하필 이번에 예약한 연주회가 일요일이라 여기에서 공연을 보지 못 한 게 아쉬웠지만, 동상 옆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여성에게 남성이 다가가 동상에 대해 말을 거는 모습을 대신 보았다. 두 사람이 점점 편하게 말을 주고받는 걸 뒤로 하고 걸어 나왔다. 쇼팽은 사랑의 큐피드까지 되어준다.


바르샤바에서는 인어 동상이나 문양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바르샤바를 가로지르는 비스와 강에서 바르스란 이름의 어부가 사바란 이름을 가진 인어를 낚았는데 이 둘이 결혼해 낳은 자손들이 만든 도시가 바르샤바라는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외세의 잦은 침입으로부터 후손들과 조국을 지키기 위해 한 손엔 창을, 한 손엔 방패로 무장하고 있는 인어다. 국립경기장이 강 건너로 보이는 강변의 거대한 인어 동상에서부터 시작해 올드타운 중심에 있는 인어 동상 분수까지 걸어온 뒤 바르샤바 왕궁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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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폐허가 된 후 재건된 왕궁인 걸 알면서도 몇 백 년 된 왕궁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을 했다. 위치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지 않다가 몇 번이고 길을 잃고 다시 돌아오는 걸 반복하며, 이 도시는 이런 화려한 삶을 살았던 일부 왕족의 리더십이 아닌 평범한 대다수 시민들의 모금으로 다시 만들어졌다는 아이러니에 대해 생각했다. 


언뜻 보면 유럽의 오래된 여느 도시와 다름없는 모습이지만 바르샤바 왕궁을 비롯해 이 주변의 모든 건물들과 광장들이 전부 근래에 만들어졌다. 전쟁으로 폐허가 되기 전의 모습과 다를 것 없이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는 부서진 땅 위에 완전히 새로운 도시를 만들어냈는데, 여긴 이전에 그려진 풍경화를 기반으로 그때와 같은 도시를 재창조했다. 결론은 다르지만 둘 다 시민들이 아니었다면 결코 현재의 모습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

바르샤바 왕궁


호텔로 돌아와 짐을 찾고, 택시를 불러 공항으로 향했다. 바르샤바 쇼팽 공항은 도심에서 가까워 한화로 약 만 원이 안 되는 택시비가 나왔다. 캐리어가 2개로 불어나지 않았다면 대중교통으로도 충분했을 터였다.


버스나 트램이 도착하기 전부터 주섬주섬 일어나 내릴 문에 서던 사람들, 친절하지도 불친절하지도 않는 무표정이지만 땡큐 대신 진꾸예Dziękuję라 인사하면 활짝 웃어주던 사람들, 기차에서 무료로 나누어주는 물을 혹시나 못 받을까 친절한 오지랖을 부려주던 사람들이 있던 이곳에서 매일 아침 부지런히 나가 부지런히 걷는 내 방식대로의 여행을 했다. 


비행기는 시간을 몇 시간 앞으로 감는 타임머신이 되어 하루를 넘겨 인천에 나를 내려놓을 것이다. 세상은 넓고 갈 곳은 무수하다는 걸 이번처럼 확실하게 깨달았던 적이 또 있었던가. 내 세계의 문을 폴란드가 조금 더 열어주었다.




글/사진 백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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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방송국에서 일하며 덕질하는 게 유일한 취미인 3n살 덕후. 종종 여행하고, 가끔 글을 씁니다. 『보라하라,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덜』을 쓰고, 『규슈단편』을 함께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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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하라,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덜』: 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22159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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