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애호가, 티셔츠 수집가, 『음악을 입다』의 백영훈 작가가 들려주는 티셔츠와 랜덤 플레이 리스트. 무작위, 우연, 계획되지 않은 흐름에서 발생하는 사건, 랜덤은 그래서 예상치 못한 선물이 되기도 합니다. 오래전 LP와 카세트테이프에서, 아이팟에서, 콘서트에서 듣던 팝과 록과 재즈를 태연하게 오늘의 일상에 랜덤으로 가져다 놓습니다. 인생의 헤아릴 수 없는 고민, 반복된 잡념을 오늘의 티셔츠와 플레이리스트로 잊어 보시기를. 적당한 스타일은 덤입니다 |
몇 달 전 사놓았던 제프 다이어의 신간을 펼쳐보려는데 종이 한 장이 툭 떨어진다. 책갈피처럼 꽂혀 있던 팻 메스니의 지난 5월 내한공연 티켓이다. 문득 그날의 여운이 떠올라 그의 최근작 두 곡, <Moon Dial>과 <The Waves Are Not the Ocean>을 연이어 꺼내 듣는다.

그날 공연 좌석은 무대에서 고작 십여 미터 떨어져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각성’하여 빠르게 예매를 서두른 덕이다. 무대 위에는 그의 팬들에게 익숙한 할로우 바디(어쿠스틱 기타처럼 내부가 비어 있는 구조) 아이바네즈 기타와 기타 신디사이저 두 대, 그리고 42현의 ‘피카소’ 기타가 세팅되어 있었다. 여기에 원 맨 기타 오케스트라 편성을 위해 그가 직접 개발한 ‘오케스트리온(Orchestrion)’까지 천에 덮여 있었으니, 그의 팬이라면 곧 펼쳐질 기타의 복음이 어떠한 모습일지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무대 위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여전한 사자 머리와 사람 좋은 미소. 많은 기타들 중 요즘 그에게 최대 화두인 튜닝된 바리톤 기타를 잡고 앉는다. 나는 스노우캣 일러스트가 새겨진 그의 2010년 투어 후디 차림으로, 한 음 한 음 꼭꼭 씹어 듣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분석과 논리의 결기는 팻의 첫 아르페지오에 쉽게 무너졌다. 십대에 처음 들었을 때처럼, 그의 세계는 여전히 이상한 향수와 서정의 원더랜드로 나를 데려갔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오랜만의 만남에서 팻은 기타로 들려줄 수 있는 음악의 만화경(萬華鏡)을 보여줬다. 바리톤 기타를 중심으로 그의 친숙한 레파토리 곡들을 앨범 단위로 묶어 들려줬기 때문이다. 팻 메스니 그룹(PMG) 시절의 반가운 곡들로 공연의 문을 열고, 이어진 인사와 해설은 전에 본 적 없는 다변의 코멘터리였다.
어린 시절 고향 미주리에서 트럼펫 연주자들로 가득한 집안에서 어떻게 기타를 잡게 됐는지, 마일즈 데이비스 음반을 듣고 “나 저거 해야겠어”로 시작해 개리 버튼 밴드에 들어가고, 일생의 벗 찰리 헤이든을 만나 함께 음악을 하며 결국 <Under the Missouri Sky>를 내게 됐다는 이야기. 앨범 커버가 해질 때까지, 손에 타는 것이 아까워 여러 장을 사서 돌려가며 들어온 나의 가슴에 소용돌이가 일었다.

이제는 내 방에 앉아 <The Waves Are Not the Ocean>을 듣는다. 둥글게 감싸 안는 듯한 바리톤 기타. 그가 퉁기는 노트 하나하나가 실어 나르는 감정에 귀를 세우게 된다. 젊었을 때 그의 노트가 불러온 것은 아스라함이었지만, 지금은 안개 쌓인 미명의 길을 지나온 이의 숨 고른 회고이자 사색이다. 수많은 파도를 지켜본 이가 이제는 그것을 단순히 바다로 묶어내지 않겠다는, 그런 인생의 철학적 명제처럼 들린다. 그러나 내게는 그 차분한 노트들이 모여 결국 가장 거대한 바다가 되고 만다.
그래미상 20회 수상, 53장의 앨범, 부트렉까지 포함하면 100장에 가까운 그의 창작의 전당. 70대 나이에도 그는 바리톤 기타에서 새로운 것을 찾고, 붙들고, 두들기며 나아가고 있다. 애쓰지 않고도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들, 그런 것들을 더욱 아끼고 각별히 여기게 되는데, 팻 메스니가 주는 설렘은 내 인생의 신전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있다. 지난 5월 공연에서 그의 연주를 지켜보는 다른 ‘동료 관객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직은 바다가 되지 못한 파도 같은 설렘이 그들의 가슴 속에서도 몰아치고 있으리라 짐작해 봤다.
팻의 공연 티켓을 꽂아 두었던 제프 다이어의 신간은 『라스트 데이즈』였다. 미국 네바다의 ‘버닝맨 페스티벌’을 묘사한 챕터에서 셰익스피어의 「폭풍우」에 나오는 대사에 마음이 꽂힌다. ‘파도는 바다가 아님을’을 여러 번 듣고 난 후 그 구절을 접하니, 마치 내 안의 서정에 일종의 시한부를 선고받은 것 마냥 꽤나 쓸쓸해진다.
이제 우리의 잔치는 모두 끝났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배우는 모두 정령들이어서,
공기 속으로, 엷은 공기 속으로 녹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환영이라는 기초 없는 구조물처럼,
탑들, 호화로운 궁궐들,
엄숙한 사원들, 거대한 지구조차도,
그래요, 그것이 물려받은 모든 것들까지
다 녹아 없어질 것입니다.
공연이 있던 날, 나는 두 시간 전에 공연장에 도착한 덕에 한정 수량으로 팔고 있던 내한 공연 티셔츠를 운 좋게 살 수 있었다. 등판에 ‘Moon Dial Dream Box, 2025. May 24, Seoul’이라 새겨져 있다. 「폭풍우」의 등장인물 프로스퍼로의 대사 마냥 어쩌면 “다 녹아 없어질” 그 날의 표식, 나의 작은 파도.
글/사진 백영훈

1990년대의 팝과 록에 어지러이 매혹당하며, 장래 희망으로 FM 라디오 DJ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어렸을 적 바람과는 달리 글로벌 IT기업에서 25년 이상 일을 해오고 있다. 전업의 시간 이편에서는 팝을 비롯한 대중문화 딜레탕트로서의 삶을 즐기며, 여전히 팝 키드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음악을 입다』가 있다.
· 도서 정보 : 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935274
몇 달 전 사놓았던 제프 다이어의 신간을 펼쳐보려는데 종이 한 장이 툭 떨어진다. 책갈피처럼 꽂혀 있던 팻 메스니의 지난 5월 내한공연 티켓이다. 문득 그날의 여운이 떠올라 그의 최근작 두 곡, <Moon Dial>과 <The Waves Are Not the Ocean>을 연이어 꺼내 듣는다.
그날 공연 좌석은 무대에서 고작 십여 미터 떨어져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각성’하여 빠르게 예매를 서두른 덕이다. 무대 위에는 그의 팬들에게 익숙한 할로우 바디(어쿠스틱 기타처럼 내부가 비어 있는 구조) 아이바네즈 기타와 기타 신디사이저 두 대, 그리고 42현의 ‘피카소’ 기타가 세팅되어 있었다. 여기에 원 맨 기타 오케스트라 편성을 위해 그가 직접 개발한 ‘오케스트리온(Orchestrion)’까지 천에 덮여 있었으니, 그의 팬이라면 곧 펼쳐질 기타의 복음이 어떠한 모습일지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무대 위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여전한 사자 머리와 사람 좋은 미소. 많은 기타들 중 요즘 그에게 최대 화두인 튜닝된 바리톤 기타를 잡고 앉는다. 나는 스노우캣 일러스트가 새겨진 그의 2010년 투어 후디 차림으로, 한 음 한 음 꼭꼭 씹어 듣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분석과 논리의 결기는 팻의 첫 아르페지오에 쉽게 무너졌다. 십대에 처음 들었을 때처럼, 그의 세계는 여전히 이상한 향수와 서정의 원더랜드로 나를 데려갔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오랜만의 만남에서 팻은 기타로 들려줄 수 있는 음악의 만화경(萬華鏡)을 보여줬다. 바리톤 기타를 중심으로 그의 친숙한 레파토리 곡들을 앨범 단위로 묶어 들려줬기 때문이다. 팻 메스니 그룹(PMG) 시절의 반가운 곡들로 공연의 문을 열고, 이어진 인사와 해설은 전에 본 적 없는 다변의 코멘터리였다.
어린 시절 고향 미주리에서 트럼펫 연주자들로 가득한 집안에서 어떻게 기타를 잡게 됐는지, 마일즈 데이비스 음반을 듣고 “나 저거 해야겠어”로 시작해 개리 버튼 밴드에 들어가고, 일생의 벗 찰리 헤이든을 만나 함께 음악을 하며 결국 <Under the Missouri Sky>를 내게 됐다는 이야기. 앨범 커버가 해질 때까지, 손에 타는 것이 아까워 여러 장을 사서 돌려가며 들어온 나의 가슴에 소용돌이가 일었다.
이제는 내 방에 앉아 <The Waves Are Not the Ocean>을 듣는다. 둥글게 감싸 안는 듯한 바리톤 기타. 그가 퉁기는 노트 하나하나가 실어 나르는 감정에 귀를 세우게 된다. 젊었을 때 그의 노트가 불러온 것은 아스라함이었지만, 지금은 안개 쌓인 미명의 길을 지나온 이의 숨 고른 회고이자 사색이다. 수많은 파도를 지켜본 이가 이제는 그것을 단순히 바다로 묶어내지 않겠다는, 그런 인생의 철학적 명제처럼 들린다. 그러나 내게는 그 차분한 노트들이 모여 결국 가장 거대한 바다가 되고 만다.
그래미상 20회 수상, 53장의 앨범, 부트렉까지 포함하면 100장에 가까운 그의 창작의 전당. 70대 나이에도 그는 바리톤 기타에서 새로운 것을 찾고, 붙들고, 두들기며 나아가고 있다. 애쓰지 않고도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들, 그런 것들을 더욱 아끼고 각별히 여기게 되는데, 팻 메스니가 주는 설렘은 내 인생의 신전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있다. 지난 5월 공연에서 그의 연주를 지켜보는 다른 ‘동료 관객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직은 바다가 되지 못한 파도 같은 설렘이 그들의 가슴 속에서도 몰아치고 있으리라 짐작해 봤다.
팻의 공연 티켓을 꽂아 두었던 제프 다이어의 신간은 『라스트 데이즈』였다. 미국 네바다의 ‘버닝맨 페스티벌’을 묘사한 챕터에서 셰익스피어의 「폭풍우」에 나오는 대사에 마음이 꽂힌다. ‘파도는 바다가 아님을’을 여러 번 듣고 난 후 그 구절을 접하니, 마치 내 안의 서정에 일종의 시한부를 선고받은 것 마냥 꽤나 쓸쓸해진다.
이제 우리의 잔치는 모두 끝났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배우는 모두 정령들이어서,
공기 속으로, 엷은 공기 속으로 녹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환영이라는 기초 없는 구조물처럼,
탑들, 호화로운 궁궐들,
엄숙한 사원들, 거대한 지구조차도,
그래요, 그것이 물려받은 모든 것들까지
다 녹아 없어질 것입니다.
공연이 있던 날, 나는 두 시간 전에 공연장에 도착한 덕에 한정 수량으로 팔고 있던 내한 공연 티셔츠를 운 좋게 살 수 있었다. 등판에 ‘Moon Dial Dream Box, 2025. May 24, Seoul’이라 새겨져 있다. 「폭풍우」의 등장인물 프로스퍼로의 대사 마냥 어쩌면 “다 녹아 없어질” 그 날의 표식, 나의 작은 파도.
글/사진 백영훈
1990년대의 팝과 록에 어지러이 매혹당하며, 장래 희망으로 FM 라디오 DJ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어렸을 적 바람과는 달리 글로벌 IT기업에서 25년 이상 일을 해오고 있다. 전업의 시간 이편에서는 팝을 비롯한 대중문화 딜레탕트로서의 삶을 즐기며, 여전히 팝 키드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음악을 입다』가 있다.
· 도서 정보 : 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9352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