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애호가, 티셔츠 수집가, 『음악을 입다』의 백영훈 작가가 들려주는 티셔츠와 랜덤 플레이 리스트. 무작위, 우연, 계획되지 않은 흐름에서 발생하는 사건, 랜덤은 그래서 예상치 못한 선물이 되기도 합니다. 오래전 LP와 카세트테이프에서, 아이팟에서, 콘서트에서 듣던 팝과 록과 재즈를 태연하게 오늘의 일상에 랜덤으로 가져다 놓습니다. 인생의 헤아릴 수 없는 고민, 반복된 잡념을 오늘의 티셔츠와 플레이리스트로 잊어 보시기를. 적당한 스타일은 덤입니다. |
“곧 출간될 『보위』는 데이비드 존스가 ‘보위’라는 이름을 얻고, ‘지기 스타더스트’라는 페르소나로 폭발하던 시기의 황금기를 그린 그래픽 노블입니다.”
몇 년 전 온라인 서점에서 이 안내 문구를 보고, 망설임 없이 북펀딩에 참여했다. 처음으로 책 펀딩에 손을 얹은 것도, 보위라는 이름 앞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내 이름이 후원자 명단으로 책에 실린다는 사실이 괜히 마음을 들뜨게 했다.
부지런했던 초심과 달리, 이 책을 완독하는 데에는 무려 다섯 해가 걸렸다. 두꺼운 분량도 아닌 그래픽 노블 하나 읽는 데 왜 그리 시간이 필요했을까. 지금 생각하자면, 첫인상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글램록 시절 보위의 과시적 페르소나와 이미지의 분열, 그 전위성이 그림체 위에서 현란하게 묘사되어 있는 그 초반부의 이미지들이 나를 멈칫거리게 했다. 전위 앞에서 한 발 물러나는 내 안의 보수성이란.

그러면서도 나는 데이비드 보위의 노래 중에서 <Sound and Vision>을 가장 많이 들었다. 보위의 여러 명곡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때깔난다’고 느꼈던 곡이다. 드러밍 비트와 기타 리프, 그리고 브라이언 이노의 신디사이저가 천천히 층을 쌓으며 1분 넘게 이어진 뒤에야 보위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사운드는 경쾌한데 정반대로 가사는 끝없이 가라앉는다.
빛바랜 블라인드를 하루 종일 내려둔 채
할 일도 할 말도 없네
우울함, 우울함
Pale blinds drawn all day
Nothing to do, nothing to say
Blue, blue
<Sound and Vision>은 1970년대 중반, 로스앤젤레스에서의 극심했던 중독과 고갈의 시기를 벗어던지기 위해 유럽으로 옮겨온 보위가 만들어낸, 이른바 ‘베를린 삼부작’의 첫 앨범 <Low>의 대표곡이다. 가사는 은둔의 정서를 담고 있지만, 사운드는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다. 침잠과 활기가 동시에 흐르며 특유의 ‘때깔’이 완성된다. 보위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바로 자리에 앉아서 음향과 비전이 주는 선물을 기다리네.
I will sit right down Waiting for the gift of sound and vision.
그가 추구하는 창작의 두 축, 사운드와 이미지, 즉 예술가로서의 삶을 다시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가 선물처럼 찾아오기를 기다린다는 고백이다. 보위는 이 곡을 “나의 궁극의 은둔 송(ultimate retreat song)”이라고 말했는데, 이 은둔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無爲)의 상태와는 거리가 멀다. 그가 만들어낸 그 촘촘한 사운드는 결국 청자를 향해 건네는 작은 기지개이자 회복을 향한 첫 움직임이다.
지난 가을, 로스앤젤레스에서 베타밴드 공연을 기다리던 중 DJ가 보위의 <Memory of a Free Festival>을 틀었는데 관객들이 코러스를 일제히 따라 부르던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The Sun Machine is coming down, And we’re gonna have a party.”
그 순간의 흥겨움이 너무 각별해서 다음 날 <Low> 앨범 커버가 프린트된 스웨트셔츠를 하나 더 장만하고 말았다. 오렌지 빛 바탕에 보위의 옆모습이 담긴, 그 유명한 디자인의 셔츠이다. 오늘 나는 그 스웨트셔츠를 입고 동네 카페 구석으로 은둔하여, 보위가 머물던 베를린이라는 도시의 ‘로우파이’한 정서를 떠올려본다. 내게 베를린은 과묵한 제이슨 본의 화면과, 빔 벤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이 출연한 스파이 영화 <모스트 원티드맨>의 잿빛 이미지들이 뒤섞인 풍경이다. 고독이 깊고, 그 고독의 바닥에서야 비로소 어떤 활로가 열린다고 믿게 만들 것 같다. 그러나 최민석 작가의 『베를린 일기』를 읽고 킥킥대던 기억을 떠올리면, 결국 장소란 거들 뿐이라는 생각도 든다.
보위는 바로 그런 도시에서 “태양 기계가 내려오면 우리는 파티를 할 것”이라고 노래했던 사람이다. 그의 침잠과 재활, 추락과 도약의 궤적은 <Low>라는 앨범 안에서 이미 하나의 원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나는 오늘, 그 스웨트셔츠를 입고서 다시 ‘사운드와 비전’을 듣는다. 그의 기지개가 내 일상 속에서 또 한 번 기지개를 켠다.

글/사진 백영훈

1990년대의 팝과 록에 어지러이 매혹당하며, 장래 희망으로 FM 라디오 DJ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어렸을 적 바람과는 달리 글로벌 IT기업에서 25년 이상 일을 해오고 있다. 전업의 시간 이편에서는 팝을 비롯한 대중문화 딜레탕트로서의 삶을 즐기며, 여전히 팝 키드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음악을 입다』가 있다.
· 도서 정보 : 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935274
음악 애호가, 티셔츠 수집가, 『음악을 입다』의 백영훈 작가가 들려주는 티셔츠와 랜덤 플레이 리스트.
무작위, 우연, 계획되지 않은 흐름에서 발생하는 사건, 랜덤은 그래서 예상치 못한 선물이 되기도 합니다.
오래전 LP와 카세트테이프에서, 아이팟에서, 콘서트에서 듣던 팝과 록과 재즈를
태연하게 오늘의 일상에 랜덤으로 가져다 놓습니다.
인생의 헤아릴 수 없는 고민, 반복된 잡념을 오늘의 티셔츠와 플레이리스트로 잊어 보시기를.
적당한 스타일은 덤입니다.
“곧 출간될 『보위』는 데이비드 존스가 ‘보위’라는 이름을 얻고, ‘지기 스타더스트’라는 페르소나로 폭발하던 시기의 황금기를 그린 그래픽 노블입니다.”
몇 년 전 온라인 서점에서 이 안내 문구를 보고, 망설임 없이 북펀딩에 참여했다. 처음으로 책 펀딩에 손을 얹은 것도, 보위라는 이름 앞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내 이름이 후원자 명단으로 책에 실린다는 사실이 괜히 마음을 들뜨게 했다.
부지런했던 초심과 달리, 이 책을 완독하는 데에는 무려 다섯 해가 걸렸다. 두꺼운 분량도 아닌 그래픽 노블 하나 읽는 데 왜 그리 시간이 필요했을까. 지금 생각하자면, 첫인상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글램록 시절 보위의 과시적 페르소나와 이미지의 분열, 그 전위성이 그림체 위에서 현란하게 묘사되어 있는 그 초반부의 이미지들이 나를 멈칫거리게 했다. 전위 앞에서 한 발 물러나는 내 안의 보수성이란.
그러면서도 나는 데이비드 보위의 노래 중에서 <Sound and Vision>을 가장 많이 들었다. 보위의 여러 명곡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때깔난다’고 느꼈던 곡이다. 드러밍 비트와 기타 리프, 그리고 브라이언 이노의 신디사이저가 천천히 층을 쌓으며 1분 넘게 이어진 뒤에야 보위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사운드는 경쾌한데 정반대로 가사는 끝없이 가라앉는다.
빛바랜 블라인드를 하루 종일 내려둔 채
할 일도 할 말도 없네
우울함, 우울함
Pale blinds drawn all day
Nothing to do, nothing to say
Blue, blue
<Sound and Vision>은 1970년대 중반, 로스앤젤레스에서의 극심했던 중독과 고갈의 시기를 벗어던지기 위해 유럽으로 옮겨온 보위가 만들어낸, 이른바 ‘베를린 삼부작’의 첫 앨범 <Low>의 대표곡이다. 가사는 은둔의 정서를 담고 있지만, 사운드는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다. 침잠과 활기가 동시에 흐르며 특유의 ‘때깔’이 완성된다. 보위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바로 자리에 앉아서 음향과 비전이 주는 선물을 기다리네.
I will sit right down Waiting for the gift of sound and vision.
그가 추구하는 창작의 두 축, 사운드와 이미지, 즉 예술가로서의 삶을 다시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가 선물처럼 찾아오기를 기다린다는 고백이다. 보위는 이 곡을 “나의 궁극의 은둔 송(ultimate retreat song)”이라고 말했는데, 이 은둔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無爲)의 상태와는 거리가 멀다. 그가 만들어낸 그 촘촘한 사운드는 결국 청자를 향해 건네는 작은 기지개이자 회복을 향한 첫 움직임이다.
지난 가을, 로스앤젤레스에서 베타밴드 공연을 기다리던 중 DJ가 보위의 <Memory of a Free Festival>을 틀었는데 관객들이 코러스를 일제히 따라 부르던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The Sun Machine is coming down, And we’re gonna have a party.”
그 순간의 흥겨움이 너무 각별해서 다음 날 <Low> 앨범 커버가 프린트된 스웨트셔츠를 하나 더 장만하고 말았다. 오렌지 빛 바탕에 보위의 옆모습이 담긴, 그 유명한 디자인의 셔츠이다. 오늘 나는 그 스웨트셔츠를 입고 동네 카페 구석으로 은둔하여, 보위가 머물던 베를린이라는 도시의 ‘로우파이’한 정서를 떠올려본다. 내게 베를린은 과묵한 제이슨 본의 화면과, 빔 벤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이 출연한 스파이 영화 <모스트 원티드맨>의 잿빛 이미지들이 뒤섞인 풍경이다. 고독이 깊고, 그 고독의 바닥에서야 비로소 어떤 활로가 열린다고 믿게 만들 것 같다. 그러나 최민석 작가의 『베를린 일기』를 읽고 킥킥대던 기억을 떠올리면, 결국 장소란 거들 뿐이라는 생각도 든다.
보위는 바로 그런 도시에서 “태양 기계가 내려오면 우리는 파티를 할 것”이라고 노래했던 사람이다. 그의 침잠과 재활, 추락과 도약의 궤적은 <Low>라는 앨범 안에서 이미 하나의 원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나는 오늘, 그 스웨트셔츠를 입고서 다시 ‘사운드와 비전’을 듣는다. 그의 기지개가 내 일상 속에서 또 한 번 기지개를 켠다.
글/사진 백영훈
1990년대의 팝과 록에 어지러이 매혹당하며, 장래 희망으로 FM 라디오 DJ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어렸을 적 바람과는 달리 글로벌 IT기업에서 25년 이상 일을 해오고 있다. 전업의 시간 이편에서는 팝을 비롯한 대중문화 딜레탕트로서의 삶을 즐기며, 여전히 팝 키드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음악을 입다』가 있다.
· 도서 정보 : 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9352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