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음악을 입다][음악] 듣보만이 줄 수 있는 난데없는 매력, <Where It’s At>

2026-01-06


음악 애호가, 티셔츠 수집가, 『음악을 입다』의 백영훈 작가가 들려주는 티셔츠와 랜덤 플레이 리스트.
무작위, 우연, 계획되지 않은 흐름에서 발생하는 사건, 랜덤은 그래서 예상치 못한 선물이 되기도 합니다.
오래전 LP와 카세트테이프에서, 아이팟에서, 콘서트에서 듣던 팝과 록과 재즈를
태연하게 오늘의 일상에 랜덤으로 가져다 놓습니다.
인생의 헤아릴 수 없는 고민, 반복된 잡념을 오늘의 티셔츠와 플레이리스트로 잊어 보시기를.
적당한 스타일은 덤입니다.


지난여름 어느 날, 업무 회의가 끝나자 함께 일하는 홍보대행사의 대리 Y가 선물이라며 티셔츠를 건네줬다. 그때 내 모습을 지켜본 이가 있었다면, 티셔츠를 펼쳐 보기도 전에 분명 나의 동공은 확장돼 있었고 입꼬리는 한껏 올라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Y가 인천 펜타포트 음악페스티벌을 다녀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벡(Beck)의 티셔츠였다. 귀엽게 생긴 청개구리 한 마리와 주황색 파리 두 마리가 일러스트로 프린트된 흰색 셔츠. 고맙다, 마음에 든다, 잘 입겠다, 사례했지만, 이런 순간 속마음은 늘 한결같다. 


‘모든 티셔츠 선물에 축복을. 특히 뮤직 티셔츠를 선물하는 그대, 최고의 복을 받을지어다!’


유난했던 무더위에 엄두도 내지 못했던 2025년 8월의 펜타포트 공연. 벡의 무대 마지막 곡은 <Where It’s At>이었다. 유튜브로 찾아보니 그의 ‘텐션’은 이미 최대치로 올라가 있었다.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하모니카를 불며 블루지한 그루브를 깔고, 이내 흥에 올라 열정 충만한 관객들과 스캣을 즉흥적으로 주거니 받거니 한다. 그리고 미끄러지듯 들어오는 신서사이저의 멜로디. 새삼 반가운 그 능청스러운 사운드.


이 곡의 매력은 장르나 규칙을 가지고 노는 그 분방함에 있다. 힙합, 록, 펑크의 콜라주. 한마디로 사운드 짬뽕이다. 그런데 이 짬뽕이 어디서 들어본 적 없는 방식으로 섞여 있어 ‘어라, 이거 봐라?’ 하는 느낌을 준다. 괴상함에도, 듣고 나면 은근히 계속 찾아듣게 된다.


이 곡의 녹음을 마치고 다시 들어보면서 벡 자신도 역시 ‘캬, 바로 이거지!’ 하며 쾌감을 느꼈을 것 같다. 실제로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 곡의 제작 과정을 두고 “아이스크림 막대기로 놀듯, 특별한 계획 없이 멋진 무언가를 만들어 낸 작업”이었다고 말했다. 호모 루덴스, 그러니까 희희낙락 유희하는 인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음악이다.


이 곡에서 벡의 보컬은 멜로디를 선명하게 끌고 가지 않는다. 말하듯 던지는 랩과 노래의 중간 지점에 있다. 가사는 의미 전달보다 리듬 위에 얹히는 사운드 재료에 가깝다. 하지만 반복되는 코러스만큼은 유독 또렷하다.


Where it’s at
I got two turntables and a microphone

여기가 바로 그 자리
턴테이블 두 대와 마이크 하나 


그리고 마무리 부분에서 “나는 마음속에 플라스틱(음반)을 가졌다네. 자기야, 한 번 해보자고(I got plastic on my mind / Let’s make it out, baby)”라고 노래한다, 아니, 읊조린다. 끝내주는 음악 재료를 주무르며 틀어줄 수 있는 프로듀서로서의 도구, 턴테이블 두 대. 퍼포머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는 마이크. 찰지고 능글맞은 그루브로 제안 받은 ‘자기’, 즉 청자는 이 곡을 듣는 동안 뭐라도 하나 해보게 된다. 곡 중간에 튀어나오는 브레이크 댄스 튠에 맞춰 로봇 춤을 춰본다든지, 아니면 나와 같이 조건반사로 고개만 끄덕끄덕하든지.


그의 최대 히트곡 <Loser>(1994)를 처음 들었을 때의 쨍했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벡에게서 받은 첫인상은, 시쳇말로 ‘듣보’였다. 전형적인 록이나 팝 스타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너드(nerd) 외모와 낯선 사운드가 겹쳐졌기 때문이다. ‘이런 듣도 보도 못한 아티스트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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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의 역사에서는 이런 ‘듣보’가 종종 ‘아웃라이어(outlier)’, 그러니까 전형적인 성공 방식에서 벗어나 스타덤에 오르는 경우를 간혹 보게 된다. 비요크(Björk), 레이디 가가, 어쩌면 싸이(Psy) 역시 처음엔 그런 ‘듣보’류(類)였을 것이다. 요즘은 대개가 어떤가. 단번에 시선을 끌기 위해 형식과 스타일의 겉치레만으로 듣보식 전략을 취한다. 결과물을 들여다보면 익숙한 걸 우려먹거나, 그 익숙한 것도 제대로 익혀 내지 못해 지루한 ‘듣보’들이 태반이다. 그래서 내민 개성이 몰개성이 된다. 그러나 진정한 듣보들은 내용과 형식이 정말 잘 맞아떨어진다. 전에 본 적 없는 개성이 번뜩이는 것이다.  


<Loser>가 발표된 1994년의 미국 대중음악 신을 떠올려보자. 보이즈 투 멘, 올 포 원, 셀린 디온, 에이스 오브 베이스가 빌보드 차트를 휩쓸었고, 음악 좀 들었다는 이들에겐 사운드가든, 그린데이, 앨리스 인 체인스, 오프스프링, 펄 잼, 나인 인치 네일즈가 얼터너티브 사운드를 장악하던 그야말로 팝의 춘추전국 시대였다. 이런 초경쟁 상황에서 벡은 라디오 DJ들의 선곡 리스트에 반드시 포함되어 있었다. 듣보가 차지하는 포지셔닝의 위력이었다.


벡의 이력을 들여다보면 태생부터 범상치 않다. 캐나다 출신 아버지 데이비드 캠벨은 캐롤 킹에서 마빈 게이, 밥 딜런, 롤링 스톤즈, 본 조비, 메탈리카를 아우른 편곡가이자 프로듀서다. <폭스캐처>, <드림걸스>, <브로크백 마운틴> 같은 훌륭한 영화 음악을 맡았던, 말 그대로 ‘그 바닥’의 거장이다. 어머니 비비 핸슨은 배우이자 시각 예술가이며, 비트 시인 잭 케루악과 함께 음반을 발표한 이력이 있는 인물이다. 내게 ‘듣보’로 다가왔던 아티스트에게, 이미 상당한 유전자의 축복이 깔려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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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같은 경술년 개띠 아티스트. <Where It’s At>을 듣고 있노라면 ‘인생의 어느 시점에는 뭐라도 하나 성취해 놓아야 하지 않나’라는,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만들어 낸 강박에서 자유로운 사람의 느긋한 유희가 느껴진다. 어떤 규칙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기만의 것을 만들어 낸다는 것, 그것도 즐기면서. 사회생활의 때가 제법 묻은 우리 같은 필부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새삼 말할 필요도 없겠다.




글/사진 백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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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의 팝과 록에 어지러이 매혹당하며, 장래 희망으로 FM 라디오 DJ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어렸을 적 바람과는 달리 글로벌 IT기업에서 25년 이상 일을 해오고 있다. 전업의 시간 이편에서는 팝을 비롯한 대중문화 딜레탕트로서의 삶을 즐기며, 여전히 팝 키드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음악을 입다』가 있다.
· 도서 정보 : 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935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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