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음악을 입다][음악] 안녕 상심이여, 앉아 보렴, 호세 제임스 <Good Morning Heartache>
2026-01-23
음악 애호가, 티셔츠 수집가, 『음악을 입다』의 백영훈 작가가 들려주는 티셔츠와 랜덤 플레이 리스트. 무작위, 우연, 계획되지 않은 흐름에서 발생하는 사건, 랜덤은 그래서 예상치 못한 선물이 되기도 합니다. 오래전 LP와 카세트테이프에서, 아이팟에서, 콘서트에서 듣던 팝과 록과 재즈를 태연하게 오늘의 일상에 랜덤으로 가져다 놓습니다. 인생의 헤아릴 수 없는 고민, 반복된 잡념을 오늘의 티셔츠와 플레이리스트로 잊어 보시기를. 적당한 스타일은 덤입니다.
“묵은 고통은 아직 다 오므라들지 않았고 새로운 고통은 아직 다 벌어지지 않았다. 완전한 빛이나 완전한 어둠이 되지 않은 하루들은 과거의 기억들로 일렁거린다. 반추할 수 없는 건 미래의 기억뿐이다. 무정형의 빛이 그녀의 현재 앞에, 그녀가 모르는 원소들로 가득 찬 기체와 같은 무엇으로 어른거리고 있다.”
- 한강, 「백야」, 『흰』, 중에서
춥고 흐린 12월의 어느 낮 시간 한강 작가의 문장을 찾아 읽는 행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별하지 않는다』를 읽으며 책장 끝을 살짝 접어 표시해 두었던 부분을 다시 읽고도 싶지만, 차마 펼치지 못했다. 짐작했지만, 이 계절에 읽는 한강의 글은 새삼 더 힘들다. 그럼에도 책장에서 『흰』을 꺼냈다. 불쑥 감행한 이 행위의 단초는, 몇 시간 전 중고 서점 안에 흘렀던 빌리 홀리데이의 <Good Morning Heartache> 때문이다.
서점에서 나와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두터운 헤드폰을 쓰고 노래를 찾아 듣는다. 한강 작가가 3인칭 시점으로 숨죽여 꾹꾹 담아낸 애상의 자전적 서사와, 슬픔의 상흔 위로 내려앉는 슬픔의 하얀 송이. 더 가라앉을 여지도 없이 지친 마음에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슬픔을 노래하는 1인칭 시점의 서정. 맥락의 결은 다르지만 어쩐지 닮았다. 빌리 홀리데이는 자줏빛 벨벳 음색으로 운을 뗀다.
안녕, 상심이여, 오래된 우울한 얼굴이여 어젯밤에 우린 작별을 고했다고 생각했는데 뒤척이며 밤을 새우는 동안 이제 너는 사라진 줄 알았어 그런데 새벽과 함께 또 이렇게 찾아왔구나
상심으로 밤을 지새우고 아침을 맞이했건만, 사라지기는커녕 여전히 앞에, 심지어 같은 모습으로 생생하게 서 있다. 깊게 금이 가 있는 상심이란 녀석은, 몹쓸 정령 같지만 결국 나의 모습일 뿐이다. 보통의 실연이라면 대개 몇 날, 몇 밤을 진하게 앓다가 감정의 리셋 수순으로 들어가게 마련이건만,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 속에서는 실연의 자각과 상심이라는 사이클이 뫼뷔우스의 띠처럼 리셋 없이 무한으로 돌고 있다.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를 듣고 난 뒤, 이 곡을 리메이크한 호세 제임스(Jose James)의 버전을 들어 본다. 호세 제임스가 <Yesterday I Had The Blues - The Music of Billie Holiday>라는 제목으로 블루노트 레이블에서 발표한 앨범의 첫 번째 수록곡이다. 그는 제이슨 모란(피아노), 존 패티투치(베이스), 에릭 할랜드(드럼)가 받쳐주는 간결한 체임버 풍의 트리오 연주 위에서 노래한다. 예의 때깔 나는 음색에 ‘레이드백(laid-back)’을 구사한다. 그러니까 박자 뒤에 살짝 기대어, 감정을 미루는 방식으로 노래하는 것이다. 빌리 홀리데이에 대한 존경을 담아, 그만의 스타일로 진중한 음악적 표현을 하고 있다.
호세 제임스는 재즈 보컬리스트이면서, 동시에 소울과 힙합의 리듬이 밴 R&B 가수다. 그의 인장과도 같은 음색 때깔의 이유다. 나는 2015년 서울재즈페스티벌 무대에서 그의 노래를 듣고 팬이 됐다. 당시 그는 민소매 러닝과 블랙진 차림에 아프로 헤어, 양 어깨의 문신을 하고 선글래스를 끼고 있었다. 딱 터프한 저항의 메시지가 담긴 래핑이 나올 만한 모습이었건만, 재즈 편성을 등에 업은 그루브와 소울 가득한 낭랑한 보컬이 올림픽공원 큰 잔디밭 무대를 누볐다.
그런 그가 그로부터 2년 후에 빌리 홀리데이 송북 앨범을 냈다. 말쑥한 수트 차림에 파리 센 강 어느 다리 위에서 찍은 모습이 세피아 톤 앨범 커버에 담겼다. 의외의 변신, 반가웠다. 앨범엔 빌리 홀리데이의 고전과도 같은 아홉 곡의 레퍼토리가 정갈하게 담겼는데, 고루 그의 스웨그(swagger) 윤기가 흐른다. 호세 제임스가 부르는 이 곡의 마지막 대목에 가선, 빌리 홀리데이의 초연함이 느껴져 역설적이지만 슬픔이 아름답게 여겨진다. 상심을 바라보며 자리를 내어주려는 그 마음이란.
안녕, 상심이여 나를 가장 잘 아는 존재여 이젠 너에게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겠지 늘 곁을 맴도는 너에게 안녕, 상심이여, 앉아보렴
문득, 한강의 『흰』에 나오는 구절처럼 “그녀의 현재 앞에”, 그저 “무정형의 빛”이 계속해서 비추이길 바라면서 나는 이 구절과 빌리의 노래, 호세 제임스의 앨범 모두를 하나에 담은 티셔츠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마침내(!), AI를 활용해 일종의 팬 아트(fan art) 이미지를 만들었다. 프롬프트는 “호세 제임스의 빌리 홀리데이 트리뷰트 블루노트 앨범 커버 디자인을 펜슬 드로잉으로 그려줘. 그 밑에는 Good morning heartache의 가사 마지막 구절을, 맨 밑에는 이 곡의 공식 유튜브 링크를 담은 QR코드를 중앙에 작게 레이아웃해 줘.”였다.
그리고 뽑힌 이미지로 서울 성수동의 어느 DIY 티셔츠 팝업스토어에서 단 하나의 티셔츠를 만들었다. 중고 서점에서 빌리의 노래를 듣고 나서 완성된 티셔츠를 받기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4시간. 혹시나 길을 가다가 이런 티셔츠를 입은 한 중년 아저씨를 만난다면, 휴대폰을 들어 사진을 찍어주시기 바란다. 이미지 속의 QR코드로 호세 제임스의 노래를 경험할 수 있다. 혹시나 관심이 있으시다면 말이다.
글/사진 백영훈
1990년대의 팝과 록에 어지러이 매혹당하며, 장래 희망으로 FM 라디오 DJ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어렸을 적 바람과는 달리 글로벌 IT기업에서 25년 이상 일을 해오고 있다. 전업의 시간 이편에서는 팝을 비롯한 대중문화 딜레탕트로서의 삶을 즐기며, 여전히 팝 키드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음악을 입다』가 있다. · 도서 정보 : 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935274
음악 애호가, 티셔츠 수집가, 『음악을 입다』의 백영훈 작가가 들려주는 티셔츠와 랜덤 플레이 리스트.
무작위, 우연, 계획되지 않은 흐름에서 발생하는 사건, 랜덤은 그래서 예상치 못한 선물이 되기도 합니다.
오래전 LP와 카세트테이프에서, 아이팟에서, 콘서트에서 듣던 팝과 록과 재즈를
태연하게 오늘의 일상에 랜덤으로 가져다 놓습니다.
인생의 헤아릴 수 없는 고민, 반복된 잡념을 오늘의 티셔츠와 플레이리스트로 잊어 보시기를.
적당한 스타일은 덤입니다.
춥고 흐린 12월의 어느 낮 시간 한강 작가의 문장을 찾아 읽는 행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별하지 않는다』를 읽으며 책장 끝을 살짝 접어 표시해 두었던 부분을 다시 읽고도 싶지만, 차마 펼치지 못했다. 짐작했지만, 이 계절에 읽는 한강의 글은 새삼 더 힘들다. 그럼에도 책장에서 『흰』을 꺼냈다. 불쑥 감행한 이 행위의 단초는, 몇 시간 전 중고 서점 안에 흘렀던 빌리 홀리데이의 <Good Morning Heartache> 때문이다.
서점에서 나와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두터운 헤드폰을 쓰고 노래를 찾아 듣는다. 한강 작가가 3인칭 시점으로 숨죽여 꾹꾹 담아낸 애상의 자전적 서사와, 슬픔의 상흔 위로 내려앉는 슬픔의 하얀 송이. 더 가라앉을 여지도 없이 지친 마음에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슬픔을 노래하는 1인칭 시점의 서정. 맥락의 결은 다르지만 어쩐지 닮았다. 빌리 홀리데이는 자줏빛 벨벳 음색으로 운을 뗀다.
안녕, 상심이여, 오래된 우울한 얼굴이여
어젯밤에 우린 작별을 고했다고 생각했는데
뒤척이며 밤을 새우는 동안 이제 너는 사라진 줄 알았어
그런데 새벽과 함께 또 이렇게 찾아왔구나
상심으로 밤을 지새우고 아침을 맞이했건만, 사라지기는커녕 여전히 앞에, 심지어 같은 모습으로 생생하게 서 있다. 깊게 금이 가 있는 상심이란 녀석은, 몹쓸 정령 같지만 결국 나의 모습일 뿐이다. 보통의 실연이라면 대개 몇 날, 몇 밤을 진하게 앓다가 감정의 리셋 수순으로 들어가게 마련이건만,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 속에서는 실연의 자각과 상심이라는 사이클이 뫼뷔우스의 띠처럼 리셋 없이 무한으로 돌고 있다.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를 듣고 난 뒤, 이 곡을 리메이크한 호세 제임스(Jose James)의 버전을 들어 본다. 호세 제임스가 <Yesterday I Had The Blues - The Music of Billie Holiday>라는 제목으로 블루노트 레이블에서 발표한 앨범의 첫 번째 수록곡이다. 그는 제이슨 모란(피아노), 존 패티투치(베이스), 에릭 할랜드(드럼)가 받쳐주는 간결한 체임버 풍의 트리오 연주 위에서 노래한다. 예의 때깔 나는 음색에 ‘레이드백(laid-back)’을 구사한다. 그러니까 박자 뒤에 살짝 기대어, 감정을 미루는 방식으로 노래하는 것이다. 빌리 홀리데이에 대한 존경을 담아, 그만의 스타일로 진중한 음악적 표현을 하고 있다.
호세 제임스는 재즈 보컬리스트이면서, 동시에 소울과 힙합의 리듬이 밴 R&B 가수다. 그의 인장과도 같은 음색 때깔의 이유다. 나는 2015년 서울재즈페스티벌 무대에서 그의 노래를 듣고 팬이 됐다. 당시 그는 민소매 러닝과 블랙진 차림에 아프로 헤어, 양 어깨의 문신을 하고 선글래스를 끼고 있었다. 딱 터프한 저항의 메시지가 담긴 래핑이 나올 만한 모습이었건만, 재즈 편성을 등에 업은 그루브와 소울 가득한 낭랑한 보컬이 올림픽공원 큰 잔디밭 무대를 누볐다.
그런 그가 그로부터 2년 후에 빌리 홀리데이 송북 앨범을 냈다. 말쑥한 수트 차림에 파리 센 강 어느 다리 위에서 찍은 모습이 세피아 톤 앨범 커버에 담겼다. 의외의 변신, 반가웠다. 앨범엔 빌리 홀리데이의 고전과도 같은 아홉 곡의 레퍼토리가 정갈하게 담겼는데, 고루 그의 스웨그(swagger) 윤기가 흐른다. 호세 제임스가 부르는 이 곡의 마지막 대목에 가선, 빌리 홀리데이의 초연함이 느껴져 역설적이지만 슬픔이 아름답게 여겨진다. 상심을 바라보며 자리를 내어주려는 그 마음이란.
안녕, 상심이여 나를 가장 잘 아는 존재여
이젠 너에게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겠지
늘 곁을 맴도는 너에게
안녕, 상심이여, 앉아보렴
문득, 한강의 『흰』에 나오는 구절처럼 “그녀의 현재 앞에”, 그저 “무정형의 빛”이 계속해서 비추이길 바라면서 나는 이 구절과 빌리의 노래, 호세 제임스의 앨범 모두를 하나에 담은 티셔츠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마침내(!), AI를 활용해 일종의 팬 아트(fan art) 이미지를 만들었다. 프롬프트는 “호세 제임스의 빌리 홀리데이 트리뷰트 블루노트 앨범 커버 디자인을 펜슬 드로잉으로 그려줘. 그 밑에는 Good morning heartache의 가사 마지막 구절을, 맨 밑에는 이 곡의 공식 유튜브 링크를 담은 QR코드를 중앙에 작게 레이아웃해 줘.”였다.
그리고 뽑힌 이미지로 서울 성수동의 어느 DIY 티셔츠 팝업스토어에서 단 하나의 티셔츠를 만들었다. 중고 서점에서 빌리의 노래를 듣고 나서 완성된 티셔츠를 받기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4시간. 혹시나 길을 가다가 이런 티셔츠를 입은 한 중년 아저씨를 만난다면, 휴대폰을 들어 사진을 찍어주시기 바란다. 이미지 속의 QR코드로 호세 제임스의 노래를 경험할 수 있다. 혹시나 관심이 있으시다면 말이다.
글/사진 백영훈
1990년대의 팝과 록에 어지러이 매혹당하며, 장래 희망으로 FM 라디오 DJ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어렸을 적 바람과는 달리 글로벌 IT기업에서 25년 이상 일을 해오고 있다. 전업의 시간 이편에서는 팝을 비롯한 대중문화 딜레탕트로서의 삶을 즐기며, 여전히 팝 키드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음악을 입다』가 있다.
· 도서 정보 : 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9352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