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음악을 입다][음악] 부디 그렇게만 기억해주지 않기를, 레드 핫 칠리 페퍼스 <에디>

2026-01-30


음악 애호가, 티셔츠 수집가, 『음악을 입다』의 백영훈 작가가 들려주는 티셔츠와 랜덤 플레이 리스트.
무작위, 우연, 계획되지 않은 흐름에서 발생하는 사건, 랜덤은 그래서 예상치 못한 선물이 되기도 합니다.
오래전 LP와 카세트테이프에서, 아이팟에서, 콘서트에서 듣던 팝과 록과 재즈를
태연하게 오늘의 일상에 랜덤으로 가져다 놓습니다.
인생의 헤아릴 수 없는 고민, 반복된 잡념을 오늘의 티셔츠와 플레이리스트로 잊어 보시기를.
적당한 스타일은 덤입니다.


2023년의 가을, 자전거를 빌려 ‘마빈 브로드 트레일(Marvin Braude Trail)’이라고 불리는 길을 달렸다. 로스엔젤레스의 해변을 따라 약 35km에 걸쳐 조성된 대표적인 자전거와 도보 길로, 잘 알려진 레저 코스다. 캘리포니아의 쨍하게 푸른 하늘과 바다, 습도는 없지만 그리 퍼석하지 않은 바람을 맞으며 페달을 밟았다. 셰릴 크로우와 크리스 리아의 노래들을 들으며 느긋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0625007abdd2c.png


이 코스는 산타모니카와 베니스 비치, 마리나 델 레이 등 아름다운 LA 남부 해안 명소를 연결한다. 해변을 따라 각양각색의 멋쟁이들이 휴식과 산책, 운동을 즐긴다. 약에 찌든 노숙자들이 심심찮게 보이는 LA시내와 비교하자면, 세속의 걱정 따위 별 상관없는 듯한 다른 세상이다. 특히 베니스 비치는 좀 더 히피스러운 분위기에 운동 ‘인싸’들이 애정하기로 잘 알려진, 이른 바 ‘머슬 비치(muscle beach)’다. 쉴 겸해서 자전거에서 내려 벤치에 앉았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햇빛에 보기 좋게 그을린 이들의 근육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지척에서 현란한 전자기타 연주 소리가 들렸다. 나이 든 한 버스커의 연주, 에디 반 헤일런(Eddie Van Halen)의 기타 솔로곡 <Eruption>이었다.

 

그리고 다음해 여름, 바로 그 해변에서 레드 핫 칠리 페퍼스(Red Hot Chili Peppers)가 새 앨범 <Return of the Dream Canteen>에 수록된 신곡 <Eddie>를 연주했다. 파리 올림픽 폐막식 말미에 다음 하계 올림픽 개최지인 LA를 알리는 축하 공연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밴드로 나온 것이다. 방송으로 중계된 곡은 <Can’t Stop> 딱 한 곡. 뒤이어 등장한 빌리 아일리쉬가 부른 <Birds of a Feather>가 워낙 환상적이어서 그들을 잠깐 잊고 있었다가, 당일 미방송된 <Eddie> 연주가 최근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뜬 것이다. 


밴드 이름을 이들만큼 자신들의 개성에 걸맞게 지은 경우가 또 있을까? 이 날의 노장 멤버들은 역시 불같이 맵고 쏘는 고추의 기세로 무대를 장악했다. 4인 4색, 따로 또 같이의 멋이 산전수전 경험과 함께 농익어 있었다. 환갑의 나이를 넘긴 앤서니 키에디스(Anthony Kiedis)와 플리(Flea)는 웃통을 벗어젖혔고, 채드 스미스(Chad Smith)는 붉은 색 볼캡을 뒤로 쓰고서 듬직한 체구로 드럼을 두드렸으며, 존 프루시안테(John Frusciante)는 예의 진중하게 펜더 기타를 주물렀다. 그야말로 클래식한 레드 핫 칠리 페퍼스만의 정경이었다. 




곡 제목 <Eddie>는 에디 반 헤일런을 일컫는다. 그는 누구인가? 80년대를 주름잡았던 대표적인 미국의 하드록 그룹 반 헤일런(Van Halen)의 리더이자 당대 세계 최고 기타리스트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록 히어로. 피우던 담배를 기타 넥에 꼽은 채 여유 있는 표정으로 양손해머링(기타 지판을 내려치는 주법)연주를 하던 모습, 마이클 잭슨의 히트곡 <Beat It>의 불꽃같은 기타 솔로 연주, 이제 50대가 된 당시의 록 키드들에겐 일종의 보증 수표였다. “앞으로도 록은 결코 죽는 법이 없을 것(Rock Will Never Die)”이라는 기세등등한 미래의 약속에 대한.   


록의 불사(不死)에 대한 약속이 공허한 허언이 되고 말았던 2020년, 에디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망 소식을 접한 다음 날, 레드 핫 칠리 페퍼스는 이 곡의 초기 구상을 했다고 한다. <Eddie>는 그에 대한 단순한 헌정이나 추모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선배이자 존경하는 동료 ‘Eddie’를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고 싶은가라는 질문과 함께 그에게 투사한 자신들의 바람으로 들린다. 


곡은 담담하게 출발한다. 리듬 섹션은 과하게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채드의 드럼은 직선적이되 공격적이지 않고, 플리의 베이스는 묵직하게 곡의 중심을 붙든다. 곡은 처음부터 ‘영웅 서사’로 치닫지 않는다. 대신 하나의 장면, 하나의 기억을 펼쳐 보인다. 그리고 기타 영웅을 기리는 곡인지라, 당연히 기타가 주인공이 된다. 하지만 존 프루시안테의 기타는 처음부터 불을 뿜지 않는다. 리프를 과시하지 않고 음과 음 사이에 여백을 남기며, 곡의 감정을 서서히 고조시킨다.


존은 화려함의 영웅이었던 에디 반 헤일런처럼 연주하지 않는다. 대신 블루지하고 퍼지한 톤, 넓은 비브라토, 길게 이어지는 서스테인(음의 지속)이 곡의 중심을 이끈다. 평소 그가 추앙하는 지미 헨드릭스의 연주를 떠올리게도 한다. 결국 에디의 연주 기술이 열어준 자유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푸는데, 그 선율은 베니스 비치의 하늘과 공기처럼 더 없이 맑게 넘실댄다. 앤서니 키에디스의 코러스가 에디를 환기시킨다.  


“선셋 스트립을 누비던 시절. 기타 줄을 휘게 만들던 손. 두 손에 망치를 쥐고도(해머링 연주를 의미) 섬세했던 터치 … 부디 나를 어젯밤의 내 모습으로 기억하지 말아줘. 그땐 그저 1980년과 1983년 이었을 뿐이야.”

 

지난 40년간 중독과 방종, 파괴와 재기의 시간을 모두 거쳐 온 왕년의 악동(badass)들이 숨을 정돈하며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부디 가장 시끄러웠던 밤으로만 우리를 기억하지 말아 달라줘. 우리는 변했고, 여전히 연주하고 있고, 다르게 살아내고 있어. 


8b5985e7d5e9d.png

 

나는 최근에야 이들의 티셔츠를 장만했다. 평소에 눈독을 들였던 디자인은 앨범 <Californification>의 불이 가득 차 있는 수영장 이미지나 <Blood Sugar Sex Magik> 앨범의 노골적인 일러스트 이미지가 프린트된 ‘쎈 느낌’의 티셔츠였는데, 아무래도 이들의 로고인 아스터리스크(asterisk) 부호가 새겨진 기본 중 기본 디자인의 티셔츠를 선택했다.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로고 디자인은 앤서니 키에디스의 작품이라고 하는데 정작 그는 “그냥 별 의미를 담지 않았다”고 한다. 용례로 보면 아스터리스크는 그 단어나 표현은 직접 말하지 않고 주석으로 빼겠다는 걸 뜻하는 셈이니, 앤서니는 은연중에 이런 메시지를 담지 않았나 싶다. 


“우리 음악이 어떠냐고? 들어 봐.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글/사진 백영훈

a44ac78d89a29.png

1990년대의 팝과 록에 어지러이 매혹당하며, 장래 희망으로 FM 라디오 DJ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어렸을 적 바람과는 달리 글로벌 IT기업에서 25년 이상 일을 해오고 있다. 전업의 시간 이편에서는 팝을 비롯한 대중문화 딜레탕트로서의 삶을 즐기며, 여전히 팝 키드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음악을 입다』가 있다.
· 도서 정보 : 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935274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