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ed Piper]모든 날이 Celebrate

Pied Piper* #1

- 덕질은 삶을 얼마나 이롭게 하는가에 관한 고찰



용산행 KTX 출발을 기다리는 플랫폼. 구겨질까 따로 챙긴 정장을 든 젊은 남자는 면접을 보러 가는 듯하고, 3대가 모인 대가족은 친척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가는 듯하다. 창밖으로 분주히 열차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쫓다 때꾼한 양 눈두덩을 꾹 눌렀다. 새벽에 일어나 공연 예매 페이지를 세 시간 정도 들여다봤더니 눈이 피로했다. 수마가 밀려왔다. 좌석에 몸을 구긴 채 눈을 감았다. 금세 잠에 빠졌다.


용산역에 도착하자마자 빠르게 지하철을 갈아타 합정역에서 내렸다. 오늘은 3월 9일, 방탄소년단 ‘슈가’의 생일이고, 이 생일을 기념하는 다양한 이벤트들이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어 마음이 급했다. 내 앞에 개찰구를 빠져나가는 아이들의 옆머리엔 보라색 머리핀이 하나씩 자리했고, 설렘 그 자체의 얼굴로 종종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나와 같으면서도 다를 그 어린 애정이 내게 고스란히 옮겨 와 출구를 향하는 신발 뒤축이 간지럽게 닳는 기분이었다.


토요일의 합정동 골목은 발에 치이는 전단지 숫자가 무색할 만큼 고요했다. 미리 인터넷으로 찾아봤을 땐 여기에서 오른쪽으로 꺾었던 것 같은데 하며 화면 속 지도를 살피는데 저 멀리 빨간 간판의 상점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찾았다.


Happy Suga Day



슈가의 생일을 축하하는 배너를 지나 문을 열고 카페에 들어갔다. 협소한 카페는 발 디딜 틈 없이 소란스러웠다. 카운터와 쇼케이스를 따라 주문 줄도 길었다. 이 카페는 슈가 생일 기념 테이크아웃 종이컵을 제공하는 곳이었다. 제조 음료를 주문하면 2~30분을 기다려야 한다기에 병에 미리 담아놓은 더치커피를 사서 나왔다. 중국 관광객들과 쇼핑객, 덕후들의 무리에 휩쓸려 구름 위를 걷는 듯 홍대 일대를 현실감 없게 걸어 다녔다. 슈가 생일 기념 컵홀더, 슬로건 등을 제공하는 모든 곳이 붐벼서 대기에 꽤 많은 시간을 썼다. 정신을 차려 보니 저녁을 먹을 시간이 다 되었다. 가방 안엔 종이컵 두 개, 컵홀더 네 개, 포토카드 수십 장이 담겼다. 오늘의 전리품이다.



삼성역에 있는 호텔에 짐을 푼 뒤 버스를 탔다. 대학 생활을 했던 4년이 내 서울살이의 전부였는데, 한남동에서 성내동까지 강남을 가로질러 통학하던 게 헛것은 아니었는지 창밖 너머의 익숙한 풍경을 스쳐 지났다. 한 끗 차이로 기억보단, 추억이었다. 종합운동장, 잠실새내를 지나 석촌호수 주변에서 내렸다. 저녁은 대학 친구와 만나 방탄소년단 한 멤버의 친형이 운영하는 일식당에서 먹었다. 슈가의 생일을 기념하기에 이만한 장소가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는 나무 찜통에서 잘 쪄진 소고기와 각종 채소를 메인으로 술 한 잔씩 나눴다. 높아가는 책임감에 비해 과연 보람이 비례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현실적인 대화는 극히 일부. 대화의 대부분은 덕질이 삶을 얼마나 이롭게 하는지에 대한 격론이었다.



먼지 냄새가 없는 모처럼의 저녁 공기, 걷기 좋은 온도와 부담 없는 요일의 삼박자는 석촌호수를 그냥 떠나지 못하게 했다. 생맥주 한 잔과 한 뼘 크기의 작은 도쿠리 한 병을 마신 터라 몸은 적당히 데워진 상태였다. 롯데월드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중국 가족들의 곁을 누가 더 대단한 덕질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배틀을 하며 깔깔거리며 지났다. 이곳을 찾은 이유는 달라도 이 시간의 서울 공기는 모두에게 달았다.



호텔로 돌아와 맥주 수 잔을 더 마신 뒤 푹 자고 일어난 다음 날, 해장국으로 적당히 속을 푼 뒤 서울 시청 광장으로 이동했다. 방탄소년단 팬클럽 행사인 <아미피디아Armypedia>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잘 챙겨 온 티켓을 확인받고 광장 내부에 입장했다. 오후 세 시 시작인 행사까지 한 시간여 남았지만 이미 광장의 반이 메워져 있었다. 커다란 전광판에는 방탄소년단의 뮤직비디오가 상영되고 있었다. 실물 공연을 보듯 광장 안의 모든 사람들이 응원봉을 흔들고 응원법을 따라 하고, 소리를 지르고 감탄하고, 뛰고 있었다. 입고 있는 재킷이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흥이 달아오른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미피디아는 방탄소년단 멤버들이 직접 내는 문제를 풀고, 예전 공연 실황 영상을 몇 곡 보는 약 50여 분의 짧은 행사였다. 마지막 노래가 끝나니 아쉬움의 탄성이 흘렀다. 함성을 지르는 데에 흙먼지가 날리는 건 신경도 쓰질 않았더니 목이 칼칼했다. 아쉬움에 큼큼대며 광장을 빠져나왔다. 뒤를 돌아보니 꽤 많은 팬들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노래를 마저 따라 부르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열차 시간이 남아 시청 광장이 내다보이는 카페에 앉았다. 입장 티켓을 확인한 후 하나씩 나누어주었던 봉투를 들고 있거나 팬임을 증명하는 슬로건이나 캐릭터를 지닌 사람들이 카페에 많았다. 그들은 나이대도, 쓰는 사투리도, 차림새도 모두 제각각이었지만 대화를 나누는 표정만큼은 똑같았다. 진심이 아니면, 좋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사람만의 아우라. 우린 왜 당사자가 함께 하지 않는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는지, 우린 왜 집에서 보면 훨씬 편할 영상을 불특정 다수와 보기 위해 이 복잡한 시청 광장에 모였는지, 그 ‘왜’에 대한 모든 해답을 주는 얼굴들이었다. 순도 100%의 행복. 매일이 똑같을 수 있었던 일상에 변주를 주는 대상을 가진 사람들만이 이럴 수 있다. 


영국 최고 작가이자 아스널의 광팬인 ‘닉 혼비’는 축덕으로서 자신의 덕력을 과시한 책 <피버피치Fever Pitch>의 첫머리에 축구를 사랑하는 자신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학창 시절 첫눈에 반한 연애 감정처럼 시작한 이 관계가 어째서 자발적으로 맺어온 다른 어떤 관계보다도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었을까.” 


먼 이국의 덕후가 그 질문에 답을 하고자 한다. 내 애정에 상응하는 답을 구하지 않는, 무해하고 순수한 애정이 기반인 관계는 ‘내가 먼저 질려 떠나지 않는 이상 끊어질 수 있는 관계가 아닌 것’ 같다고. 내가 먼저 질려 떠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므로, 이 관계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즐길 수 있을 때까지 즐기면 되는 거라고. 


일요일 밤의 용산역. 무거운 군용 짐을 짊어진 군인은 복귀를 앞둔 듯하고, 캐리어를 끈 커플은 여행을 끝내고 후련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듯하다. 예정된 주말 스케줄을 모두 소화한 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어제 이른 새벽, 뜬 눈으로 예매한 방탄소년단 시카고 공연 입장 QR코드를 캡처해 사진첩에 담았다. 다음 달은 방콕으로 콘서트를 보러 갈 예정이다. 여행이 덤처럼 따라올 덕질이 기다리고 있다. 적당한 소음을 내며 KTX가 예정된 시간에 출발했다. 훗날 기념이 될 주말이 또 지나가고 있었다.



* Pied Piper : 피리 부는 방탄소년단을 따라 속절없이 움직이는 1인이라는 의미




글/사진 백지은(a.k.a 제이)

지역 방송국에서 일하며 덕질하는 게 유일한 취미인 3n살 덕후. 종종 여행하고, 가끔 글을 씁니다. <규슈단편>을 함께 썼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cantabile.j
덕질에 관한 상세한 보고서는 이곳, https://brunch.co.kr/@cantabile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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