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ed Piper]이런 여행도 있다 #1

Pied Piper #2

- 덕질은 삶을 얼마나 이롭게 하는가에 관한 고찰



내가 보통 여행을 준비하는 순서는 이렇다. 


1.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그제와 같을 일상을 자각한다.

2. 여기가 아니면 어디든 좋을 것 같다. 여행을 떠나고 싶다.

3. 휴가 내기 적당한 날짜를 정한다.

4. 마음이 쏠린 여행지의 항공권을 결제한다.

5. 숙소, 맛집, 관광지 등을 검색해 일정을 짠다.

6. 일상이 좀 버틸만하다. 

7. 여행을 즐긴다.


그러나 이번 여행을 준비하는 순서는 이랬다.


1. 방탄소년단이 방콕에서 <Love yourself> 콘서트를 한다.

2. 방콕을 가야 한다.

3. 공연 티켓을 구매한다.

4. 공연 날짜에 맞춰 여행 일정을 짠다. 

5. 일상을 버틸 수가 없다. 빨리 공연 보러 가고 싶다.

6. 공연을 즐긴다.

7. 여행은 덤이다.


*   *   *


“진짜 방탄소년단 보러 방콕을 간다고?”


“왜? 그럼 안 돼?"


몇 번이나 반복된 이런 유의 대화는 도리어 진짜 궁금해 하는 내 질문으로 대부분 끝이 나곤 했다. 공연은 토, 일 각 1회씩 총 2회. 공연 하루 전인 금요일 오전, 방콕행 비행기를 기다리기 위해 탑승구 앞에 앉아 있다. 주변을 둘러보면 하나 혹은 둘씩 앉아 있는 여성분들이 꽤 있었는데 ‘혹시’ 하고 보면 이 분 크로스백엔 쿠키 인형이, 저 분 팔엔 망이 담요가, 저 분의 힙색엔 슈키가, 내 앞에 줄 선 분 목엔 타타가 ‘역시’ 걸려 있다. 


방탄소년단이 제작에 참여한 BT21 캐릭터는 일종의 신호나 암시다. 이거 봐. 방탄소년단 보러 방콕 가는 사람이 나 말고도 이렇게 있다고. 나와 엇비슷한 여행을 준비했을 사람들을 둘러보며 일종의 동료애에 이 출발의 근간이 전율처럼 훑어 왔다. 탑승을 시작하는 안내 멘트가 흘러 나왔다. 시작도 과정도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여행을 하기 위해 재빨리 줄을 섰다. 


씨푸드 기내식은 새우 두 점을 집어 먹는 걸로 밀어놓고 기내 엔터테인먼트에 들어 있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라이브 에이드 장면을 몇 번이고 돌려봤다. 수만 명이 들어 선 웸블리 스타디움. 그곳을 가득 채운 음악의 힘, 누군가의 찬란했던 찰나의 청춘, 떼창의 전율. 삼십 년이 지나도 아직도 회자되는 전설의 공연장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방탄소년단이 단독 콘서트를 개최한다. 그것도 2회나. 빈속에 마신 화이트 와인 한 잔 덕에 이리 울렁, 저리 울렁, 내가 이룬 성과처럼 자부심이 폭발한다. 


공항을 나서자마자 악명 높은 4월의 방콕 더위를 마주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머리카락이 피부에 끈적하게 달라붙고, 숨을 들이켤 때마다 뜨거운 공기가 느껴진다. 호텔이 있는 프런칫 역까진 1시간이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트래픽 잼으로 꼼짝없이 두 시간을 도로에서 허비했다. 본인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잔뜩 미안한 표정으로 거스름돈을 넘겨주는 택시 기사의 얼굴은 5년 만에 다시 온 방콕의 첫 인사였다.


텅러 지역은 곳곳에 숨겨진 비밀의 정원 같은 카페나 식당을 찾는 재미가 있는 곳이다. 더운 나라이기에 볼 수 있는 푸른 울창함을 갖춘 카페 한 곳에 들렀다. 시원한 우롱차를 마시며 사진 몇 장을 찍은 뒤 이어폰을 연결하고 SNS 앱을 켰다. 꼭 방콕의 텅러 카페가 아니어도 되는 일을 굳이 방콕의 텅러 카페에서 하는 일. 여유를 계산할 수 있는 건 떠나온 자의 낭만이다. 


비밀 정원 카페


땀을 식힌 후 카페 문을 나섰다. 쉼 없이 울리는 단체 톡방의 알람을 껐다. 이 더위가 따뜻한 이불처럼 느껴지게 하는 간단한 행위였다. 점심을 먹고 호텔에 돌아와 태닝과 수영을 반복하며 즐기는 서양인들 옆에 자리 하나를 잡고 쉬다 다시 나왔다. 응원봉, 슬로건 등 공연에 필요한 짐과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챙겼다.


공연장에 가기 전에 즐긴 카페 그리고 점심


*   *   *


라차망칼라 경기장까지 가까워져 간다는 건 달라진 거리 풍경으로 알 수 있었다.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의 차림새는 팬임을 적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여기서부턴 차라리 걷는 게 빠를 것 같아 적당한 곳에 내린 뒤 그들의 행렬에 동참했다. 좁은 인도는 이때만을 기다렸을 노점상들 덕에 더 복잡해져 가방을 앞으로 안고서 조심히 움직여야만 했다. 


중앙 제어가 가능하게 응원봉 페어링을 마친 뒤 공연장에 일찍 들어와 앉았다. 해가 떨어지기 전이라 아직 환한 스타디움 내부를 둘러보았다. 주로 혼자 영상이나 글을 보며 좋아했던 사람이라 이렇게 수많은 팬들 사이에 섞이면 먼지보다 못한 내 아득한 존재에 회의가 들면 어떡하나 싶기도 했었다.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는 데도 환호할 준비가 완료된 이 이국의 팬들 속에 섞이니, 나는 그들의 언어를 통역 없이 직관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특별한 힘을 지닌 사람인 것만 같았다. 상대적인 감정은 항상 위험하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이 상대적인 도취를 조금 즐겨보려 한다.


긴 팔 긴 바지에 조끼까지 쓰리 피스로 갖춰 입고 일하는 사람들을 보며 ‘더운 나라에서 태어나서 이 날씨가 적응이 이미 돼 있나 보다’ 하며 내 긴 머리를 꽉 묶곤 했는데, 공연장에서 땀 닦는 현지 팬들을 보니 더운 건 다 똑같다 싶다. 공연은 시작도 안 했는데 사람이 뿜어내는 열기까지 혼재 돼 이 스타디움 전체에 거대한 더위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전광판으로 재생되는 뮤직비디오 노래를 따라 부르며 연신 부채질을 했다. 하늘의 색이 조금씩 짙어진다. 팬들의 입장이 완료될 때까지 조금 기다린 저녁 7시 30분, 조명이 꺼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두 시간의 시차, 여섯 시간의 비행, 30시간의 기다림, 그 모든 이유. 방탄소년단의 공연이 시작된다.



공연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순식간에 흘러갔다. 시간을 확인하니 분명히 두 시간 반이 지나있고, 핸드폰 사진첩엔 공연 모습이 영상으로 담겨 있는데도. 수십 번 본 콘서트 실황 영화를 다시 한 번 더 보고 나온 기분이었다. 어리둥절함을 떨쳐내지 못하고 떠밀리듯 공연장을 빠져 나왔다. 


라차망칼라 경기장에서 가장 가까운 메트로는 걸어서 1시간 거리인데다가 택시 잡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호텔까지 이동할 차량을 미리 예약해 놓았다. 기사님을 만나려면 정확한 주소가 필요하기에 경기장에서 가장 가까운 호텔을 지정했더니 수십 명의 사람들이 이름 적힌 종이를 들고 호텔 로비에 모여 있었다. 여러 이름들 중 내 이름을 찾았다. 주차된 차가 있는 곳까지 함께 이동하면서 종종 걸음을 걷는 기사님의 등과 방탄소년단 상품을 파는 상인들의 손과 모처럼 많은 손님들을 맞이하는 가게 점원의 얼굴에서 넘쳐 나는 생의 기운을 느꼈다. 


경기장 주변을 벗어나니 도로는 한산했다. 방콕에 와서 처음으로 느낀 속도로 금세 호텔에 도착했다. 사다 놓은 와인을 꺼내려다 그마저도 귀찮아져 푹신한 침구 사이로 파고들었다. 어설프지만 최선을 다하는 태국어 인삿말을 건넬 때를 제외하곤 공연만으로 꽉 채운 오늘의 무대를 다시 보고 있으니, 공연장에서 나눠 받은 피켓의 문구가 눈에 콕 박힌다. 


‘우리라서 다행이다. 함께여서 다행이다.’



#2에서 계속




글/사진 백지은

지역 방송국에서 일하며 덕질하는 게 유일한 취미인 3n살 덕후. 종종 여행하고, 가끔 글을 씁니다. <규슈단편>을 함께 썼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cantabile.j
덕질에 관한 상세한 보고서는 이곳, https://brunch.co.kr/@cantabilej


5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