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ed Piper]이런 여행도 있다 #2

Pied Piper #3

- 덕질은 삶을 얼마나 이롭게 하는가에 관한 고찰



한산한 현대미술관을 오전에 둘러보고, 콜드 파스타에 와인 한 잔을 곁들이고, 재즈가 흐르는 올드 타운의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나니 하루의 반나절이 훌쩍 지났다. 오늘은 공연장으로 좀 더 여유 있게 출발하려다, 예외는 언제든 존재할 수 있으니 적당히 서둘렀다. 어제와 엇비슷하게 붐비는 공연장 주변을 빠르게 통과해 입장했다. 정면에 가까운 1층 앞좌석이라 그라운드 석이었던 어제보다 시야가 훨씬 좋았다. 무대도 가까워 기대감에 떨리기 충분했다.


“Where are you from?”


응원봉을 흔들며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더니 옆에 앉은 팬이 말을 걸었다. 랩 가사까지 곧잘 따라하는 내 발음 때문인 듯했다. 한국인이라고 하자 눈에 띄게 밝아진 그녀는 태국인이다. 그녀와 종종 말을 나누며 공연을 기다렸다. 내가 선택하지 않아 장단점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던 내 국적과 모국어는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싶게 하는 특장점이었다. 


두웅. 

공연 시작을 울리는 음악이 흐르고, 공연장에 어둠이 내렸다. 이 월드 투어의 마지막 공연이 시작됐다.



공연의 3분의 1쯤이 지나고 지민의 솔로곡이 시작되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다. 눈으로 형태를 구분할 만큼 굵은 빗방울이었다. 우왕좌왕하던 찰나에 옆자리의 태국 팬이 본인의 우비를 함께 나눠 쓰자고 했다.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과 짐들을 가방에 넣은 뒤 의자 아래에 두었다. 비옷을 머리에 얹고 태국 팬에게 감사함을 표현했다. 공연은 딜레이 없이 계속됐다. 팬들과 함께 비를 맞으며, 도리어 비바람도 이 열기를 막을 순 없다며 더 신이 나서 춤을 추는 멤버들을 눈에 담았다. 손에서 핸드폰을 없애니 공연이 더 공연으로서 다가왔다. 비가 오지 않으면 끝까지 깨닫지 못하고 지나갈 뻔 했다. 


방탄소년단의 초창기부터 아낌없는 관심과 사랑을 준 나라의 팬들답게 방콕 콘서트는 이틀 내내 이곳 날씨처럼 뜨거웠다. 이 무조건적인 사랑에 감사하며 앙코르 무대까지 끝났다. 비옷을 덮어준 태국 팬에게 공연장에 입장하기 전에 산 멤버 부채 하나를 답례로 선물했다. 그녀의 미소에 내가 갑절로 행복해졌다. 공연의 여운에 빠진 얼굴들을 둘러보며 나를 포함한 우리, 방탄소년단과 함께 비를 맞은 사이, 그것 참 로맨틱한 사이 아닌가 생각했다. 수만 명의 이름 하나 하나는 몰라도, 


“2019년 4월 7일, 방콕 콘서트 기억나? 그때 갑자기 소나기 쏟아져서 그 비 다 맞으면서 공연 했었잖아.”


“맞아. 바람까지 불어서 시야도 흐려 혼났지. 근데 또 신기하게 한두 곡 하다가 그치고 다시 내리고, 그래서 텐션을 적당히 올리기 좋은 분위기였어.”


“그랬지. 기억난다. 진짜 더웠는데 비와서 괜찮았던 것도 있어. 공연 진짜 재밌었는데. 그치?”


같이 있었기에 추억할 수 있을 하루를 보냈다는 뿌듯한 감정을 안았다. 호텔로 돌아와 땀과 비를 씻어낸 뒤 샴페인을 터트려 하얀 거품을 쪼록 따라 마셨다. 식도를 타고 찌르르 넘어가는 샴페인이 마치 오늘 같다. 존재감이 가득하다.



*   *   *


공연이 끝난 즉시 한국행 비행기를 탄 방탄소년단의 소식을 확인하며 깬 월요일 아침. 방탄소년단은 한국으로 돌아갔지만 나는 아직 방콕에서의 일정이 남았다. 생각지 않았던 방콕 방문인데, 이왕 온 김에 여행을 덤처럼 붙여서 하다 가고 싶어서였다. 여유 있게 조식을 먹은 뒤 마사지를 받았다. 원래 짐을 무겁게 메고 다니는데다가 콘서트 이틀 보고 나오면 몸이 무거울 것 같아 미리 이 날짜에 예약해 놓았는데, 나를 제일 잘 아는 나답게 적확한 타이밍이었다. 


호텔 Adlib


노곤해진 몸으로 시원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이런 저런 단상들을 노트에 적다가 느지막이 식사를 하러 일어났다. 드높은 빌딩숲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 고풍스런 노란 건물 The house on sathorn은 한여름의 더위를 풍경처럼 감상하며 늘어지기 좋을 느낌의 한적한 레스토랑이었다. 미리 예약해놓은 에프터눈 티 세트가 서빙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하여 칵테일 두 잔을 먼저 주문했다. 낮술과 늦은 점심. 여행지에서 느낄 수 있는 최대한의 사치를 한꺼번에 즐긴다. 


칵테일을 마시며 핑거 푸드 몇 개를 집어먹었더니 배가 불러 샌드위치나 케이크 등으로 차려나온 메인 음식들에 거의 손도 대지 못해 그대로 포장해 호텔로 돌아왔다. 한 시가 바삐 돌아다니느라 진이 빠진 채 밤늦은 시간에 호텔로 돌아오곤 하던 여행이 아니다. 여행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기에 이런 여행이 가능해졌다. 


크로와상을 전문으로 파는 카페에 들러 아침을 먹었다. 바삭 부서지는 크로와상의 흔적들을 치워내며, 목에 건 사원증으로 소속감을 내포한 근처 직장인들이 여럿 들러 크로와상과 커피를 사서 나가는 모습을 이방인의 눈으로 좇았다. 내일 돌아가면 나도 저 모습이 되겠지. 여행이 끝나면 항상 이런 기분에 목울대가 일렁이곤 했는데, 오늘은 빵을 우물대는 것만으로 그럭저럭 충분했다.



일 외의 것들로 해야 할 일이 잔뜩 생긴 덕후가 된 이후로 매일 아침 눈 뜨는 일이 버겁지 않았다. 오늘은 또 무슨 소식이 있을까,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기대감으로 하루를 시작한 지 꽤 오랜 날이 지났다. 게다가 오늘은 새 앨범이 발매되기 나흘 전이다. 돌아갈 이유가 충분한 사람의 여행 마무리만큼 더없이 아름다운 것은 없다.


예약한 블루 엘리펀트에서 배부른 저녁을 먹은 뒤 지상철을 타고 시암에서 내려 랑수언 로드까지 걸었다. 시암 역에서 칫롬 역까지 회랑으로 연결돼 있어 걷기 좋은 구간이라 미리 한 정거장 전에 내린 거였다. 방콕의 마지막 밤에 루프탑 바 하나쯤은 방문해야 했고, 그렇다면 방콕에 처음 왔던 몇 해 전의 그 때, 내 생일을 스스로 축하하기 위해 찾았던 뮤즈 호텔의 스피크이지 바만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호텔 최상층에 내리자 시끄러운 클럽 음악이 웅웅 울렸다. 마천루가 쏟아내는 불빛이 에워싸는,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풍경은 여전했다. 이 음악이 아닌 아경을 품고 싶었기에 안쪽 자리에서 사람들을 등지고 앉았다. 소비뇽 블랑 화이트 와인을 주문하고 이어폰을 꺼내 꽂았다. 


‘아미 여러분 오늘 하루 뭐 하셨나요?’


그때 울린 트위터 알람 속의 제이홉의 물음. 마신 와인을 핑계로 답글을 클릭했다.


‘응. 너희 덕에 여행까지 한 하루였어. 공연 보고 방콕에 남아 와인도 마시고 맛있는 것도 먹고. 너희 노래 계속 들으면서’


볼륨을 최대한으로 높인 방탄소년단의 노래가 배경음악이 되었고, 나는 이 여행을 방금 한 문장으로 농축시켰다. 



아무리 편히 쉬어도 공항으로 향하는 날은 몸이 천근만근이다. 무거운 짐들이 특별히 추가되지도 않았는데 왜인지 훨씬 무거워진 캐리어를 들어 체크아웃을 마쳤다. 고속도를 달리는 택시의 차창 너머로 라차망칼라 경기장이 보였다. 관광지도 아니고, 게다가 중심지도 아니어서 이번 공연이 아니었음 평생 이름조차 몰랐을 저곳. 더위나 트래픽 잼에 지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인터넷으로 찾아 본 것보다 좋고 나쁘고를 판단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휴가 기간이 아닌 4월에 이국으로 떠나올 수 있었던 것도, 이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하나의 단어로 수렴됐다. 


수완나폼 공항 스타벅스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잊히기 전에 기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문장을 썼다가 지웠다가 단어를 썼다가 지웠다가 쓴다.


“이런 여행도 있다.”




글/사진 백지은

지역 방송국에서 일하며 덕질하는 게 유일한 취미인 3n살 덕후. 종종 여행하고, 가끔 글을 씁니다. <규슈단편>을 함께 썼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cantabile.j
덕질에 관한 상세한 보고서는 이곳, https://brunch.co.kr/@cantabile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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