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ed Piper]이유? 그런 거 없는데요? #1

Pied Piper #4

- 덕질은 삶을 얼마나 이롭게 하는가에 관한 고찰



이른 시간 터미널의 고요함은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무표정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지나다니는 스산한 플랫폼 앞 의자에 앉아 쩌-억 하품을 했다. 여기서 인천공항까지 4시간, 도착해 수속하고 탑승하는데 2시간, 그렇게 샌프란시스코까지 11시간, 다시 경유를 위해 대기하는 4시간, 마침내 시카고까지 4시간. 장장 만 24시간이 넘는 이동을 앞둔 새벽이다. 퇴근 후 짐을 싼다고 제대로 눈을 붙이지 못하고 나온데다 버스나 비행기에서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는 편이라 고된 이동이 예상됐다. 다시 하품을 쩌-억 했다. 눈물이 고였다.


잠이 보약이라는 말은 진리다. 좁은 좌석에 비틀어가며 얕은 쪽잠을 청한 것을 제외하곤 도저히 쉬질 못했더니 몸에 열이 오르는 게 심상치가 않다. 뭘 먹었다간 체하기까지 할 것 같아 기내식을 온통 물렸다. 오늘은 그저 푹 자야겠다 싶어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저녁 시간에 예약해 둔 레스토랑 일정을 취소했다. 첫날부터 컨디션 조절에 실패하면 이 일주일이 완전히 낭패다. 아플 권리는 덕후 사전에 용납될 수 없는 사치다.


세계 주요 도시 스타디움에서 개최되는 방탄소년단의 <Speak Yourself> 월드 투어의 일정이 공개되자마자 날짜를 확인했다. 5월은 북미와 남미, 6월은 유럽이라. 담당 프로젝트들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는 6월 이후는 마음 편히 다녀올 수 없을 테니 ‘역사적인’ 웸블리와 ‘내 사랑’ 파리는 눈물을 머금고 포기. 고단한 비행 스케줄과 현지 치안 사정 등을 고려하니 상파울루 역시 포기. 휴가를 일주일 정도 낼 수 있으니 LA, 시카고, 뉴저지 중 선택을 해야 했고, 그렇다면 오래전 우연히 본 ‘걸어서 세계 속으로’의 회색 도시 시카고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카고 콘서트 예매를 성공한 뒤 항공권과 호텔 예약을 바로 마쳤다. 구구절절한 이유나 사연 없이, 그래서 시카고여야 했다.


현지에서 국내선으로 갈아탈 때의 탑승구만큼 이방인의 위치를 자각하는 순간이 또 있을까. 속사포처럼 빠른 영어 안내를 있는 힘껏 집중해 들었다. 이제부터 더욱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내 좌석은 제일 끝 왼쪽 창가 자리. 빨리 짐을 찾아 나갈 필요가 없기에 맘 편히 가장 뒷좌석을 미리 지정해놓은 것이었다. 시카고까지 또 어떻게 피곤함을 버티나 하며 짐을 정리하는데 옆 좌석에 내 또래로 보이는 한국인 여성분이 앉았다. 인천발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에서부터 낯이 익은 분이었다. 까만 후드에 운동복 바지 차림이 ‘혹시…' 하는 마음을 갖게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슬쩍 본 핸드폰 잠금화면은 호비(제이홉), 바탕화면은 윤기(슈가)랑 태형(뷔)이다. 나는 아주 특별한 동시에 보통의 여행을 떠나온 것이다.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 도착해 우버 택시를 타고 밀워키니 인디애나니 하는 길들을 지나 도심으로 진입했다. 현지 시각 오후 6시. 시차 덕분에 시카고까지 고작 10시간만 걸린 것 같은 착각이 들었고, 그래서 모든 피로가 별거 아닌 것 같아졌다. 삐쭉 서 있는 마천루의 능선이 흐린 하늘 아래 부옇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호텔에 도착해 짐을 풀고 바로 앞에 있는 마트에 들러 캘리포니아산 와인 한 병과 간단한 안주거리를 사서 들어왔다. 역시 약보단 와인이다. 따뜻하게 씻은 뒤 보송보송한 호텔 침구에 구겨져 와인을 마시니 긴 시간을 건너 시카고에 도착했다는 실감 따위 느낄 새 없이 깊은 수마에 빠졌다.




조금 찌뿌드드한 것을 제외하곤 몸 상태가 다행히 괜찮다. 갓 구운 베이글로 만족스러운 아침 식사를 한 뒤 시카고 미술관을 찾았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보스턴 미술관과 함께 미국 3대 미술관으로 꼽히는 규모에 고흐, 모네, 쇠라, 자코메티, 앤디 워홀 등 유명 작가들의 작품들을 볼 수 있는 곳이기에 가장 기대했던 곳이었다. 미술에 관심이 많아 작업실처럼 만들어 이런저런 그림을 그려보곤 하는 태형이가 지난 투어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곳이 시카고 미술관이라 했던 것이 단박에 이해될 정도였다. 특별 전시로 꾸려진 램브란트의 자화상 코너까지 보고 나니 미술관에 들어온 지 4시간이 넘었다. 미국의 대표 작가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의 엽서를 사서 나왔다. 오전 내 흐렸던 하늘이 거짓말처럼 개어있었다. 



미시간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이스트 잭슨 드라이브를 따라 먼로항을 향해 걸었다. 가볍게 운동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사색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가 보고 있는 수평선이 미시간 호수의 것임을 알면서도 꼭 바다 같다. 육지 사람이 상상하는 바닷가 휴식 모습이 꼭 지금의 풍경 같아서다. 규칙적인 물결, 이따금씩 날아다니는 갈매기 울음과 자전거 차임벨 소리, 저만치의 대화들. 고즈넉하고 여유롭다. 노래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하고 있는 기분이다. 그러다 일어서서 사진을 찍었다. 이곳을 찾아 잠깐의 휴식을 취했던 남준이와 태형이의 모습을 함께 담았다. 그들이 봤던 풍경. 여기에 내 기억을 슬쩍 얹어 남겼다.



날이 개니 클라우드 게이트는 반짝 반짝 빛이 났다. 이런 유명 관광지에 오면 사람들이 모두 웃고 있어 좋다. 여길 찾게 한 수많은 이유들이 모여 긍정의 아우라를 형성한다. 사진으로 오늘을 남기는 저마다의 표정들이 비슷하게 밝다.




방탄소년단의 콘서트가 열리는 주말을 포함해 일주일 정도 오픈되는 <Speak yourself> 팝업스토어는 시카고의 가장 중심 거리인 사우스 스테이트 스트리트에 자리했다. 일부러 늦은 시간에 찾아왔는데, 그럼에도 스무 명 남짓의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끝자리에 섰더니 금세 내 뒤로 몇몇이 더 늘었다. 수여 분을 기다린 후 입장한 팝업 스토어는 일종의 방탄소년단 소우주였다. 정면의 대형 스크린엔 방탄소년단의 뮤직비디오가 연달아 나오고 있고, 다양한 MD 상품들이 보기 좋게 디스플레이 돼 있었다. 쇼핑을 빨리 마쳤다. 그리고 마치 실제 공연을 보는 양 떼창을 하고 춤을 따라 추는 사람들 사이에 자리 잡아 몇 곡을 감상했다. 먼저 다가와 사진을 찍어줄까 묻는 직원들 덕에 환한 웃음이 담긴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여행에 계획을 철저히 세우는 편과 무계획의 충동에 몸을 맡기는 편 중 나는 전자에 가까운 여행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이왕 떠나온 곳들을 이왕이면 좀 더 즐겨보고 싶어 욕심을 많이 낸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고 조금 더 늦게 자고 조금 더 걷고 조금 더 먹는. 시카고 셋째 날인 5월 10일 금요일, 나는 동틀 무렵 잠이 들어 점심때 느지막이 깼다. 여권에 수십 개의 도장을 찍으며 여행을 다녔지만 이 시간에 일어난 건 처음이었다.


늦은 점심을 먹은 뒤 칼바람을 뚫고 들어간 카페에서 따뜻한 말차 라테로 몸을 녹였다. 이른 겨울의 비릿함에 정신을 못 차리겠다. 챙겨 온 옷들은 온통 얇은 봄옷들뿐. 중심가완 살짝 떨어져 있지만 작은 상점들이 거리를 따라 늘어서 있는 밀워키 애비뉴로 향했다. 옷을 사야만 했다. 편집숍 한 군데에 들어와 코듀로이 바지를 고른 뒤 구경하는데 띠링- 트위터 알람이 울렸다. ‘WASSUP CHICAGO’라는 문구와 함께 제이홉과 지민이 함께 찍은 사진이 업로드됐다. 어라? 거리가 낯이 익다. 얼른 가게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로 건너편의 상호명이 사진 속 상호명과 일치하다. 고른 바지를 제대로 입어보지도 않은 채 계산해 나와 도로를 건넜다. 


이미 너다섯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콘서트를 보기 위해 이 근처 에어비앤비에 묵고 있었는데, 트위터에 사진이 올라오자마자 소리를 지르며 뛰어나왔단다. 나 다음으로 도착한 엄마랑 같이 온 어린 딸도, 그들과 호들갑을 떨며 같은 구도의 사진을 찍고 찍어주었다. 이런 반응을 알기에 이곳을 떠난 뒤 사진을 올렸겠지만, 이 사진이 업로드된 때 바로 지척에 있었다는 사실은 모든 우연이란 이름들을 불러오기에 충분했다. 바로 이 거리를 떠나고 싶지 않아 근처 카페의 창가 자리에 앉아 오랜 시간 앉아 있었다.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무엇을 하러 왔는지,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명제에 수렴하고 있단 사실이 피부로 느껴졌다. 


늦은 점심을 먹어 저녁을 걸렀더니 갑작스레 허기가 몰려왔다. 호텔 근처에서 초밥을 포장했고, 샴페인 한 병을 샀다. 첫날은 호텔 앞 마트 다녀온 거 말곤 한 게 없었으니 고작 어제 하루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을 뿐인데 왜 이렇게 오래 있었던 것 같지. 내가 하는 여행이란 게, 보통 이런 것 같다. 모든 오감을 열고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즐기니 보통의 일상보다 훨씬 더 잘 살아낸다. 게다가 이번엔 걸음걸음에 덕질 대상의 추억도 추가로 덧입히고 있다. 다 잊었다 생각하다가도 돌아오면 분명 기시감에 허덕일, 충분함으로 가득한 하루가 지나고 있다.




글/사진 백지은

지역 방송국에서 일하며 덕질하는 게 유일한 취미인 3n살 덕후. 종종 여행하고, 가끔 글을 씁니다. <규슈단편>을 함께 썼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cantabile.j
덕질에 관한 상세한 보고서는 이곳, https://brunch.co.kr/@cantabile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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