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으로 기억하는 여행 #3



부르고뉴 전경


프랑스로 여행을 떠날 때마다 가고 싶은 와이너리를 방문하는 일은 원한다고 다 되는 일은 아니다. 특히 즐겨 찾는 부르고뉴 지방은 상업적으로 발달한 대형 와이너리가 많지 않아 상시 방문이 더 어려운 편이다. 농가에서 농사짓기도 바쁜데 일반 방문객까지 받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게다가 1년 중 휴가를 많이 떠나는 8월 한 달은 프랑스 역시 바캉스 시즌을 맞아 와이너리도 대부분 문을 닫아버리고, 이후 돌아오는 가을 수확 철은 농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니 일반인의 방문을 잘 받아주지 않는다. 


수확 후 남은 샤르도네 포도


와이너리 방문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처음에는 많이 낙담했었는데, 생각해보니 와이너리에서 업계 종사자도 아닌 일반인을 굳이 시간 내서 받을 이유가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억지를 써서 될 일도 아니어서 인연이 닿으면 가보고 안 되면 말고 식으로 마음을 비우고 있다. 아쉬운 대로 아예 상업적으로 발달한 곳을 방문해보기도 하였으나 큰 의미를 찾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시작한 부르고뉴 자유 여행은 제대로 하려면 운전이 필수적이긴 하지만, 생각보다 위험하거나 어렵지 않았다. 파리나 리옹, 마르세유 같은 대도시에 비해서 운전하기도 훨씬 수월하고 주차도 쉽다. 


본 Beaune 마을


머스터드로 친숙한 디종Dijon 마을을 지나 D974 국도를 타고 내려가다 보면 부르고뉴에서 와인으로 유명한 마을 대부분을 만날 수 있다.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을 바라보며 아무 곳이나 조용하게 걸어보는 여유로움. 작은 마을들을 포도밭이 둘러싸고 있고 곳곳에 작은 와인 가게, 카페와 피크닉 장소를 찾아볼 수 있다.


에스프레소 한잔 @뉘생조르쥬 Nuit-Saint-Georges 마을


적당히 차를 주차해놓고 천천히 즐기는 에스프레소 한잔. 와인 산지의 마을들이 모두 크지 않아 걸어서 한나절이면 충분히 돌아보고 내 취향에 맞는 자리를 선택할 수 있다. 술이 들어가면 이동이 어렵고 그게 아니더라도 조명의 거의 없어 초행길 야간 운전도 쉽지 않으니 하루로는 부족하다. 


동네 피자와 와인 한 잔 @본 마을 숙소


많은 상점들이 이른 시간에 문을 닫고, 그렇게 남는 시간에는 대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고요함을 즐기며 다시 한 잔하기에 좋다. 시골 마을의 밤은 길고, 고요하다. 


투르뉘 Tournus 마을 야경


여행의 목적을 와이너리가 아닌 와인 자체로 바꿔 나가면서도 유일하게 재방문을 계속 시도해 ‘성공시킨’ 곳은 도멘 그로 프레르 에 쇠르 Domaine Gros Frere et Soeur. 지금까지도 사진처럼 머릿속에 방문의 순간이 남아있는 마지막 와이너리이기도 하다. 


4년이 지나서야 다시 방문해 볼 수 있었지만, 여전히 같은 위치의 같은 집, 이전과 꼭 같은 표정을 한 할머니가 천천히 걸어 나오는 이 살갑지 않은 장면이 오히려 더 반갑다. 지하의 꺄브와 테이스팅룸, 위에 와인이 도열해 있는 그랜드 피아노도 그대로였다. 


변함없는 표정의 할머니는 변함없이 아무 설명도 안 해주고 열심히 와인을 따라주었지만 빈티지가 달라진 와인들은 여전히 맛있었다. 사실 이전에 왔던 기억에 이미 취해서 맛없게 느껴질 수도 없었을 것 같다. 테이스팅을 즐겁게 마친 후에는 언제 다시 돌아오겠나 하는 마음에 그랜드피아노에서 한곡 쳐 보고 싶다는 말까지 꺼냈다.

 

지난 번 방문 때 할머니가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은 한 곡 해달라는 말에 대답을 할 수 없었던 것이 아쉬워서 내심 다음에는 꼭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돌아온 뒤에 몇 년을 틈날 때마다 연습을 해왔으니 완벽히 칠 수 없다고 마다할 수는 없었다. 


@그로프레르에쉐르. 제일 오른쪽이 마담 그로


할머니의 흔쾌한 끄덕임 후에 딱 한 곡을 쳤는데, 악보 없는 아마추어의 연주는 그야말로 정신없이 끝나버렸다. 와인이 올라가 있어 뚜껑을 열지 못하는 그랜드 피아노는 생각보다 소리가 작게 나서 조금 안심했으나 손은 엄청 떨었고 심지어 중간에 악보를 일부 잊어버렸다. 할머니는 피아노를 좋아하는 것 이상으로 클래식에 조예가 깊다고 들어 끝나고는 미안함이랄지, 머쓱한 기분마저 들었는데 의외로 감사의 말을 건네 왔다. 게다가 저장고에서 일하는 모두에게 들려줘야한다고 문까지 활짝 열어두셨다는 말에는 약간의 따듯함까지.


원대한 계획을 그리며 떠난 것이 아닌 여행에서 차곡차곡 추억이 쌓여가는 순간들. 단순히 술을 한잔 마신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것. 매년 이곳으로 발길을 이끄는 여행의 이유다.





글/사진 이원식

본업은 영상콘텐츠를 만드는 PD. 애호하는 것은 와인, 프랑스, 그리고 프랑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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