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서점들]세화해변과 제주 풀무질

제주의 서점들 #2 



아침부터 날씨가 꾸물꾸물하다. 책방 가기 딱 좋은 날씨다. 며칠 만에 집을 나서는 것인지 모르겠다. 제주는 삼다도라고 했다. 겨울이 시작될 모양인지 바람의 세기와 공기가 달라졌다. 


오늘의 목적지는 세화 해변 근처에 있는 풀무질이다. 찾아가는 길은 꽤 간단했는데 앞에 수도공사를 하고 있어 주택인 줄 알고 지나칠 뻔했다. 젠장. 표식을 봤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또 길을 잃을 뻔했다.


날씨가 너무 추워 나도 모르게 “아우 추워” 혼잣말을 하며 들어섰다. 분명 혼잣말이었던 것 같은데 여 사장님이 그 말을 들으신 모양이다. 히터를 틀어주겠다며 안쪽 포근한 자리에 앉으라고 하셨다. 여 사장님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니 바깥과 또 다른 공간이 펼쳐졌다. 다른 동네 책방과 달리 아주 친절하셨고, 공간도 꽤 널찍했다. 내가 알던 동네 책방과는 다른 느낌에 얼떨떨한 기분으로 책방을 둘러보았다. 



한살림에서 사 오신 차를 팔기에 오미자차 한잔을 부탁하며 풀무질에 관해 물었다. 그러자 멀찍이 날 지켜보시던 남 사장님이 신이 나셔서 본인이 권하는 100권의 책이 있는 서고, 본인의 책에 쓴 구절을 커다랗게 새겨놓은 곳, 본인의 젊은 시절 사진까지 꺼내 보여주신다. 서울에서도 풀무질이라는 동명의 서점을 하셨는데, 26년간 운영하시다 젊은 친구들에게 물려주고 제주로 내려오셨다고 했다.


두 사장님은 부부셨다. 남 사장님과 내가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여 사장님이 “우리 남편은 본인 자랑을 참 잘해”라고 하신다. “자존감이 높으신가 봐요, 좋은 거죠!” 라고 답하자 “근데 옆에 사람은 피곤해”라고 하셔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나도 글을 연재하고 있고, 언젠가 책 한 권 써보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그러자 남 사장님이 쓴 책 중에 글쓰기에 대한 부분이 있다며 읽어보라신다. 원고를 쓰면 보내달라시며 출판사와도 연결해주겠다 하신다. 남 사장님 특유의 말투가 있었는데 꽤 높은 톤에 사람을 집중하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책방을 둘러보는 것도 잊은 채 한참 대화를 나누었다.


책방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서고 사이에 놓인 의자였다. 그야말로 맘껏 책을 읽어도 된다는 느낌이었고, 이것이 내가 바라던 동네 책방의 모습이 아닌가 싶었다. 물론 책을 읽기만 하고 사지 않는 것은 책방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지만, 책 읽기를 장려하고자 하는 풀무질 공간이 꽤 인상적으로 다가왔다.어쩌면 다른 서점들은 공간이 협소해 이렇게 하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외에도 어린이 동화책부터 헌책, 인문학, 독립출판, 글쓰기에 관한 책 등 서고가 잘 정리되어 있었다. 또 인상적이었던 것은 남자 사장님이 권하는 100권의 책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인 장 그르니에의 책과 버트런드 러셀의 책도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책을 누군가가 좋아한다고 하면 왠지 내 취향을 검증받는 느낌이라 기분이 묘해진다. 그 중 페다고지란 책은 언젠가 읽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여태 읽지 못하고 있는데 오늘도 왠지 읽을 용기가 나지 않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풀무질에서 두 시간 즈음 머물며 이런저런 책을 읽었다. 특히 동네 책방에 관한 책이 많이 읽혔다. 책방을 운영하는 이들을 인터뷰한 책, 혹은 실제 자신이 운영하며 쓴 책들을 보는데 그들의 치열함, 아쉬움이 전해졌다. 물론 그 책만으로 동네 책방을 꾸리는 덴 무리가 있을 터였다. 그렇지만 언젠가 한 번쯤은 책방지기가 되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책을 읽는 내내 작은 책방과 책을 한땀한땀 만드는 곳, 사람과 고양이가 함께하는 공간을 열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했다. 시간이 금세 흘렀다. 


책방 이야기를 읽으며 좋아하는 책에 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책을 어떻게 소비해야 할까? 나는 책을 읽은 후 좋은 문장들을 기억하고 싶어 블로그나 SNS에 올려두는 습관이 있다. 그런데 그 문장을 쓰기 위해 작가들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책은 사람들에게 읽힐수록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때때로 작가들이 쓰는 한 문장, 한 단어의 가치에 관해서는 잊고 지냈던 것 같다. 



제주에 온 지 한 달이 채 넘었을까. 풀무질에서 산 글쓰기 책을 포함해 벌써 다섯 권이 쌓였다. 제주에서 책방 투어를 할 것이라 생각도 않고 가져온 책 한 권, 제주 동네 책방에서 산 책 네 권. 나는 책이 짐처럼 쌓이는 것이 싫다. 물론 좋아하는, 읽고 싶은 책이 쌓여있는 것을 보면 든든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읽지 못하고 쌓아두다 보면 어느새 정말 짐같이 느껴진다. 우선 이 책들을 어느 정도 소화한 후에 다시 탐방을 시작해야겠다.


풀무질을 나와 세화해변으로 가는 길, 바람이 뺨을 사정없이 때려 해변을 잠시 둘러본 후 돌아섰다. 하지만 그 찰나에도 동네의 고즈넉함을 느낄 수 있었다. 골목 어귀에서 만난 큰 아름드리나무는 마을의 수호신 같은 느낌이었다. 오늘같이 햇살이 나오지도 못하고 안개에 갇혀있는 날 다녀왔으니, 화창한 날의 풀무질과 세화해변도 언젠가 가 봐야지.





글/사진 chantrea

오랫동안 글을 쓰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오래오래 집을 이고 다니며 생활하고 싶습니다. 4년 동안의 캄보디아 생활을 뒤로 하고 지금은 제주에 삽니다.

http://blog.naver.com/rashimi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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