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분의 책방: 리뷰]월간 여분의 리뷰: 2020년 12월

월간 여분의 리뷰: 2020년 12월


여분의 책방 인스타그램에서 매주 소개한 책을 모아 월간 '여분의 리뷰'를 발행합니다.

이번엔 2020년 12월의 책 중 네 권을 소개합니다.



1. 『별빛이 떠난 거리: 코로나 시대의 뉴욕 풍경』, 빌 헤이스 지음



작가이자 사진가인 빌 헤이스는 미국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하기 시작한 3월부터 이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의도는 팬데믹으로 변해가는 도시와 사람을 재빠르게 스케치하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의 심장부, 뉴욕의 한복판에서 말이지요.


코로나19 확산 초기, 미국 전체 사망자의 1/3이 뉴욕 시민이었을 정도로 상황은 최악이었습니다. 저자는 뉴욕의 시내를 다니며 사진을 찍고 사람을 만나지만, 정말 철저하게 거리두기를 지킵니다. 두 달여 만에 한 도시에서 2만5천 명이 넘게 죽었다면, 그 공포감이 어떨까요? 그리고 외로움. 빌 헤이스는 몇 년 전 오랜 파트너와 사별하고 혼자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게 멀쩡하던 직전 크리스마스에 막 새로운 인연을 만난 참이었지만, 관계가 더 깊어지기도 전에 생이별하는 처지가 됩니다. 빌은 고위험군에 속하는 나이이기도 하거든요.


하지만 이 책은 두려움이나 절망만 주지는 않습니다. 팬데믹 이전의 사진과 에피소드도 병치하며 우리가 서로 거리낌 없이 관계를 맺고 어울리던 시절을 계속 환기합니다. 그리고 다른 뉴욕 시민들과의 대화를 옮기며 그들이 자신과 타인을 위해 재난을 어떻게 이겨내는지 조명합니다. 우리가 코로나19 속에서 잊고 잃어버린 것들을 기억 속에서, 그리고 언젠간 현실에서 되찾길 희망하면서요. 그 점이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이 슬픈 책이 동시에 ‘아름답게’ 읽히는 이유입니다.


아직도 분명히 기억하는데, 좋은 느낌이 홍수처럼 날 덮쳤다. 그건 어떤 예감 같은 것이었다. 앞에 놓인 새해는 정말 즐거운 한 해가 될 것 같았다.
틀려도 이렇게 틀릴 수가. _36p.


우리는 부두의 끝까지 걸어가면서 만족스럽게 대화를 나눈다. 하지만 어색하고 부자연스럽다. 무언가를-누군가를-너무나 가까이에 두고 싶은데, 그리고 정말 원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 하지 않을 것이고, 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을 기회가 다시 올지 알 수 없다는 것이. _119p.


텅 빈 거리와 인도, 셔터를 내린 상점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한 친구가 말한다. 이걸 연대의 표시로 보자고. 모두들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라고. _173p.



2. 『배달의 민족은 배달하지 않는다』, 박정훈 지음



어제도 배달 음식 드셨나요? 주문을 넣고 바닥을 뒹굴거리다 보면 딩동, 벨이 울립니다. 문을 열면 꽤 따뜻한 음식 ‘봉다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먹고, 리뷰를 남기고, 분리수거도 하면 또 한 끼가 해결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이 음식을 누가 가져다주었을까요? 목이 빠져라 기다리지만 문을 여닫는 순간 잊히는 존재는 누구일까요?


『배달의 민족은 배달하지 않는다』의 저자 박정훈은 오랫동안 여러 회사에서 배달 라이더로 일했고, 그 과정에서 ‘배달 노동자’를 누구도 나서서 보호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라이더 노동조합 ‘라이더 유니온’을 만들었습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플랫폼 산업, 그중에서도 배달 플랫폼 노동의 실체를 드러냅니다. 러프하게 결론부터 내리자면 이렇습니다. 최소한 한국의 배달 플랫폼은 회사가 근로자에 대한 책임은 최소한으로 적게 지면서 의무는 최대한으로 많이 지우고 싶은 쪽으로 나아가려 한다구요. 그러기 위해 배달 대행사들이 얼마나 갖은 노력을 다해 실제론 ‘근로자’나 다름없는 라이더를 근로자가 아닌 존재로 만들고 있는지 여러 사례를 들어 설명합니다. 읽고 있으면 ‘이제 배달을 시키지 말아야 하나’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건 배달 라이더들에게도 결코 도움이 될 해결책이 아니겠지요.


세상은 ‘혁신’이라는 말을 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새로운 전략이 실제로 혁신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런 와중에 이 책은 그 뒤에서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소모품으로 전락할 수 있는지 일례를 보여줍니다. 누구에게나 친숙해진 ‘배달앱’을 소재로, 저자의 폭 넓은 경험, 인터뷰를 곁들여 말이죠. 그래서 인간의 노동이란 어려운 문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피부에 빠르게 와 닿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것도 플랫폼에서 시작한 캠페인이지만 오늘같이 춥고 길이 미끄러운 날 배달 메시지에 이렇게 남겨봅시다. “늦어도 괜찮으니 안전하게 와 주세요.”


근로자에게 사고가 일어나면 아무리 수전노 같은 사장이라도 마음이 무겁기 마련이다. 책임도 져야 한다. (…) 이러한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하겠다며 배달 대행업체가 등장했다. (…) 초기에 배달 대행업체의 광고 문구는 “사고가 나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으실 수 있습니다”였다. 끔찍하지만, 진솔하고 매력적이다. _57p.


파트너든 퀘스트든 이 용어들이 만들어내는 효과는 하나다. 라이더가 하는 배달 일을 ‘노동’으로, 라이더를 ‘노동자’로 여기는 것을 방해한다. (…) 자기가 하는 일을 진지한 직업으로 받아들이는 걸 방해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여기에 근로기준법이나 사업자의 진지한 책임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재밌는 게임에 진지충이 끼어들면 ‘노잼’이다. _97~98p.


계약서를 쓸 때는 사장이라며 위탁 계약서를 썼지만, 출퇴근 시간도 정해져 있었고 휴식도 조를 이루어 취하게 했다. 심지어 다른 지역에 사람이 부족하다며 성북에서 용산으로 파견을 보내기도 했다. (…) 기업은 플랫폼을 혁신적이고 새로운 기술이라고 광고하고 다녔지만, 그가 겪은 플랫폼은 30년 전의 낡은 배달 산업과 똑같았다. _156~157p.



3. 『로시니』, 파트리크 쥐스킨트, 헬무트 디틀 지음



파트리크 쥐스킨트를, 특히 그의 『콘트라베이스』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작품 중 유일하게 읽지 않았던 작품이 바로 『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였습니다. 시나리오라고? 혼자 쓴 게 아니야? 제목은 또 왜 이래? 이걸 책장에 어떻게 꽂아둬? 당시 미성년자의 수줍은 고민이었지요. 그러다 열린책들에서 쥐스킨트 전집을 리뉴얼해 내면서 이십여 년 만에 『로시니』를 읽었습니다.


『로시니』는 은둔의 작가가 쓴 소설 『로렐라이』를 영화화하려는 감독과 제작자를 중심으로 배우, 작가, 시인, 기자, 레스토랑 주인 등 여러 인물들이 ‘로시니’라는 고급 레스토랑에 모이며 벌어지는 일종의 소극입니다. 내러티브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의 영화 판권을 따느냐 마느냐로 흘러가긴 하지만, 사실 그건 부차적인 문제이지요. 모든 인물들이 이해관계와 치정관계로 얽혀 있고, 저마다의 욕망으로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욕망을 위해 상대의 욕망을 이용하는 일도 다반사입니다. 이 작품의 즐거움은 그런 군상들을 지켜보는 데 있습니다. 좀 과장되긴 했지만 절대로 남의 이야기 같지 않거든요.


그런데 등장인물들은 서로 회복할 수 없을 만큼 상처 주고 또 상처 받으면서도 매일 밤 레스토랑 ‘로시니’로 찾아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절실해서, 싫든 좋든 옆에 있어 줄 사람이 당신들밖에 없어서 그렇다는 인상입니다. 레스토랑 ‘로시니’는 허영과 욕망으로 가득 찬 공간이자 동시에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속 간이식당처럼 지독하게 외롭고 그래서 오히려 옅은 온기가 느껴지는 공간입니다. 쥐스킨트 특유의 괴팍한 캐릭터들이 더 생동감 있게 느껴지는 건 ‘로시니’라는 공간의 힘도 큰 것 같아요.


책에 함께 실려 있는 쥐스킨트의 에세이 「친구여, 영화는 전쟁이다」도 독립적인 작품으로 읽어도 될 만큼 흥미롭습니다. 시나리오 집필 과정과 그 과정에서 얻은 통찰은 극작에 관심 있는 분들께 도움도 될 것 같네요. 영화도 유튜브에 전편이 올라와 있습니다. 공동 집필자인 헬무트 디틀이 직접 연출도 해서 시나리오가 충실히 영상화되면서도 또 다른 매력이 있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고요. 독일영화에 영자막조차도 없지만, 괜찮습니다. 이미 책이라는 ‘자막’이 손에 쥐어져 있으니까요. 시나리오를 읽고 영화를 감상하고 그 다음에 쥐스킨트의 에세이를 읽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발레리: 당신? 당신은 어린아이야! 성장이 멈춰진 어린아이! (…) 아직도 사춘기 소년의 권력욕에 사로잡혀 있지. 인생은 전쟁이다, 영화는 전쟁이다, 그리고 사랑도 전쟁이다! 도대체 당신이 사랑에 대해 알긴 뭘 알아? _174p.


라이터: 뭐가 비극적이란 말이야! 사람들은 인생이 어떻게 계속되는지를 보고 싶어 한다고. 어쨌든 인생은 이어지는 거니까. 죽은 사람은 안됐지만 말이야. 그렇지만 죽은 사람은 인생을 계속할 수가 없잖아……. _203~204p.


영화에 대해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말은 아마 이것일 것이다. 영화는 흘러간다. _374p.



4.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존 버거 지음 



잘 찍은 인물 사진은 그 인물에 관해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인물의 표정, 시선, 제스처, 옷차림, 배경이 물리적, 화학적 변화를 일으켜 평면 이미지가 화면 너머로깊어지기도 하고, 테두리 바깥으로 넓어지기도 합니다. 피사체가 유명인이라면 이미 그에 관해 알고 있는 사실이 부각되거나 축소되기도 하지요. 전혀 모르는 인물인데 잘 알던 사람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요.

존 버거는 『글로 쓴 사진』에서 인물 사진이 이룰 수 있는 예술적 성취에 글로 도전합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그가 말하는 ‘글로 쓴 사진 - 포토카피’를 통해 또 다른 성취를 이루어냅니다. 그는 사진으로 찍듯 글로써 인물과 풍경을 그려냅니다. 직접적인 묘사, 저자가 인물과 나눈 대화나 인물에 관해 알고 있는 사실, 그리고 그 인물과 겪은 사건과 그 인물을 놓고 펼친 상상을 동원해서요. 한 편 한 편이 길지 않지만 누구도 그렇게 쓰기 쉽지 않을 적확한 첫 문장은 순식간에 독자를 텍스트 안으로 빨려 들어가게 합니다. 그래서 두세 쪽, 길게는 예닐곱 쪽의 포토카피 안에서 유영시키다가 급작스레 문을 닫고 현실-챕터의 끝으로 끄집어내지요. 어떤 사진에 매료되는 데 0.1초도 걸리지 않지만 그 사진에서 눈을 떼는 덴 몇 십 초, 혹은 몇 십 분이 필요한 것처럼요.

우리 모두에겐 저마다 사연이 있습니다. 하지만 멀리서 보면 그 사연이란 게 누구도 관심 없는 무의미한 사건일 수도 있지요. 나한텐 삶이 걸린 중요한 문제라고 해도요. 하지만 존 버거는 그 소외된 인물, 이야기를 지면 위로, 빛 속으로 끌어냅니다. 이 책 안에서 만나는 포토카피의 피사체는 흡사 소설 속 주요 인물처럼 주목을 끕니다. 그게 우리 모두가 실은 유의미한 존재라는 위안을 주기도 합니다.

존 버거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말을 그의 포토카피에 옮겨 적습니다. “사진은 끝없는 응시로부터 나오는 무의식적인 영감이다. 사진은 순간과 영원을 붙든다.” 존 버거가 글로 쓴 사진들도 이 위대한 사진가의 작품과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인은 새 한 마리를 손에 올려놓더니, 머리를 흔들고 팔꿈치로 쳐내면서 다른 새들을 쫓았다. (…) 빵 부스러기를 주었으나 받아 먹지 않았다. 여인이 다른 비닐 봉지에서 무언가를 뒤적이며 찾는다. 그것은 우유가 조금 담긴 아기 젖병이었다. 비둘기의 입을 벌리더니 부리 속으로 몇 방울 떨어뜨려 넣었다. _35p.

그곳 산에서는 개연성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어떤 때는 소나무숲이 지금 막 걸음을 멈춘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은하수가 마치 모기장처럼 가깝게 보일 때도 있다. 어느 8월 아침에는, 우유 짜는 헛간에서 똥 치울 때 쓰는 외바퀴차의 손잡이가 얼어 버리기도 한다. _83p.

비슈는 영원했다. 말이 늙어 일할 수 없게 되면 또 다른 어린 말을 사서 비슈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었다.
언젠가 고삐 하나를 내 앞에 들어 보인 적이 있다.
무슨 뜻인지 알아요? 조용히 물어 왔다.
말을 보냈다는 뜻 아닌가요.
십오 년은 짧은 세월이 아니지요. 그가 말했다. _92p.




글 신태진

여행 매거진 BRICKS의 에디터. 『꽃 파르페 물고기 그리고 당신』을 냈고, 『홍콩단편, 어쩌면 익숙한 하루』를 함께 썼다.

https://www.instagram.com/ecrire_lire_vivre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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