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여분의 리뷰: 2021년 4월

월간 여분의 리뷰: 2021년 4월



여분의 책방 인스타그램에서 매주 소개한 책을 모아 월간 '여분의 리뷰'를 발행합니다.

2021년 4월에 소개한 책 세 권을 모아 보았습니다.



1.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거실 하나에 방 두 개, 35제곱미터의 아파트. 파리의 중심부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5구에 있어 살기에 좋고, 창문 밖으로는 작지만 정원도 보입니다. 입지조건이 좋은 곳이지요. 제롬과 실비도 처음엔 이 아파트를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점점 답답해집니다. 온갖 가구와 물건이 뒤죽박죽 섞여 있고 천정은 너무 낮습니다. 벽이며 기둥이며 모든 게 낡았습니다. 대대적인 인테리어 보수 공사라도 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공간을 만들어 내고 싶지만, 두 사람은 그러지 못합니다. 그럴 돈도, 의지도 없습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그들은 상점가나 벼룩시장을 배회합니다. 온갖 음식이며 가구, 골동품, 옷과 액세서리, 책과 음반이 제롬과 실비를 유혹합니다. 두 사람은 잡지에서 눈 여겨 보았던 상품들을 기억하고 있어 무엇을 사는 게 합리적이고 지적이며 유행을 따르는 일인지 잘 압니다. 아니, 부자로 사는 법을 잘 안다고 하는 게 맞겠네요. 문제는 두 사람이 부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리 전문적이지 않은 프리랜서로 일하며 항상 돈이 부족한 편입니다. 두 사람은 진열장 안을 바라만 봅니다. 벼룩시장 같은 곳에서야 얼마 안 되는 돈을 탕진하며 안 그래도 꽉 찬 집안을 물건으로, 사물들로 더 채워 넣을 뿐입니다.


『사물들』은 20대 초반, 이제 막 사회로 나온 청춘의 이야기입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이 사는 법은 물건, 사물, 그러니까 뭔가를 ‘사는’ 것입니다. 아직 취향이 없으니까 다른 사람의 취향을 따라해야 하고,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으로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그 시기이지요. 두 사람은 돈이 필요하지만 반복되는 일상에 얽매이긴 싫습니다. 그래서 학업도 중간에 그만두었고 매일 정해진 근무시간 동안 일하는 고정직을 얻으려 하지도 않지요. 두 사람은 소비자들의 성향을 조사하는 프리랜서로 일하며 그때그때 일감을 따냅니다. 불안정한 직업이지만 한때는 꽤 일감이 많았고, 무엇보다 자유시간이 많이 주어지니까요. 때때로 그들은 노력 없이 일확천금을 얻길 꿈꾸기도 합니다. 그게 이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방법으로 보였습니다.


저자 페렉의 말을 빌리면 “오늘날 물질과 행복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두 사람은 일 때문에 프랑스 전역을 다니며 많은 풍경과 많은 사람, 많은 사물을 스칩니다. 처음엔 이 거대하고 매번 새로워지는 세상에 감탄하고 고양되지만, 이내 그 무게에 짓눌립니다. 두 사람이 지금껏 살아오던 방식으로는 중독처럼 점점 역치가 커져가는 ‘행복(에의 욕망)’을 더 이상 채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서 인지도 모릅니다. 결국 두 사람은 파리를 떠나 튀지니에서 새 삶을 시작하려고 하나 작고 무미건조하고 황량한 소도시로 떨어지게 됩니다. 아파트 천장은 어마어마하게 높고 방은 세 개에 거실은 홀이라 해도 될 만큼 큽니다. 하지만 죽은 공간, 그들이 파리에서 이고 살던 짐을 다 가져놔도 채울 수 없어 결국 그들의 물건이 놓인 본래의 35제곱미터만 한 공간만 살아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권태를 느끼다가 이윽고 고독해지고, 마침내 무기력해집니다. 이후 에필로그에서 두 사람은 젊었을 적 원하던 것들을 살 수 있을 만한 직업과 지위를 얻게 되지만, 이미 그들은 청춘의 시기를 지나 현대사회의 일원이 되는 법을 배워버렸습니다. 이제 밋밋하고 무감각한 삶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이상하리만치 달콤하게 빠져드는 부푼 몽상과 달리 실제로 그들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객관적 필요와 재정 상태의 절충을 꾀한 어떤 이성적 계획도 끼어들지 못했다. 무한한 욕망만이 그들을 압도했다. _26~27p.

자신들이 가장 불행한 것은 아니라고 자위했다. 아마 옳은 말일 것이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타인의 불행을 지워버림으로써 본인의 불행을 확대해 보여 주기 마련이다. 그들은 별 볼 일 없었다. 겨우 벌고, 프리랜서로 일하며 뜬구름 잡는 축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어떤 의미에서 세월이 그들 편인 것은 사실이었다. 감정을 자극하는 이미지의 세상이 온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보잘것없는 위안이었다. _65p.

무엇인가, 아주 천천히 파고드는 조용한 비극과 같은 것이 그들의 느려진 삶 한가운데 자리 잡았다. 아주 오래된 꿈의 파편 가운데, 형태 잃은 잔해 가운데 그들은 방향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
그들은 (…) 어느 곳으로도 인도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은 우유부단한 탐색의 끝에 서 있었다. _126p.



2. 『1973년의 핀볼』, 무라카미 하루키



정말 마음에 든 작품이 아닌 한, 같은 책을 다시 읽는 덴 몇 년의 공백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1973년의 핀볼』을 다시 읽은 건 약 2년 반 만. 그럴 만한 시간이었던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하지만, 이유가 있었습니다. 지금 편집하는 책에 이 소설이 나오거든요. 원고에서 흘러나오는 『핀볼』의 분위기에 흠뻑 젖어들었는데 조금 이상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소설 내용은 가물가물했거든요.


『1973년의 핀볼』 속 화자인 ‘나’는 친구와 함께 번역 사무소를 운영하며 매일 똑같은 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한 가지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일이 있다면, 어느 날 술을 마시고 눈을 떠 보니 쌍둥이 자매가 옆에 있었고 그 길로 두 사람과 함께 살게 됐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주인공인 ‘쥐’는 화자가 고향에서 만난 친구이며 아직 그 도시에 머물고 있습니다. 화자나 쥐나 학생운동이 맹렬하게 벌어지던 60년대 후반에 대학에 들어갔고, 성인의 관문을 넘던 그 시기에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이 소설이 어려운 점은 그 상처의 이유가 명확한 듯하면서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잘 읽고 있는데 뭔가를 놓치고 있는 기분이랄까요. 이 작품과 더불어 등장인물들이 겹치는 하루키 초기 3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양을 쫓는 모험』에서 단서를 찾을 수도 있겠지만, 『핀볼』을 독립된 작품으로 본다면 주어진 텍스트 안에서 모든 의문을 해결하긴 어렵습니다. 아, 그게 이 작품의 매력이라고요? 네, 그렇긴 하지요.


화자는 대학 시절 사랑하던 여자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그것이 화자의 권태와 염세를 전부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한편 쥐의 고뇌는 ‘나’로서 말하고 있는 화자보다 오히려 더 지독해 보입니다. 불면, 마음에 둔 연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과의 거리, 극복 불가한 고독, 정체 혹은 침전. 두 사람이 자기 문제에 반응하는 양상에는 온도차가 있지만, 어쨌든 낙담을 넘어 절망에 가까운 고립감은 과거에서 온다는 게 분명합니다. 그래서 소설 후반부에 두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과거와 결별하거나 혹은 대면합니다. 쥐는 자신이 살던 쥐덫 같은 도시를 떠나고, 화자는 한때 미친 듯이 플레이했던 핀볼 기계를 찾아 나서지요. 1973년의 핀볼 기계는 게임 센터와 함께 갑자기 사라졌지만, 화자는 수소문 끝에 가까스로 ‘그녀’와 재회합니다. 어떤 수를 써도 다시 만날 수 없는 대학 시절 죽은 연인을 대신하여 핀볼 기계를 찾았던 건지도 모릅니다.


100% 공감할 순 없는 인물들의 방황, 관조적이고 수동적인 태도가 시대의 아픔과 청춘의 열병 때문이라면, 제가 그만큼 치열하지 못한 채 20대를 보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도 누구에게나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이유로 괴로운 시절이 있기 마련이지요. 그럴 때, 73년의 핀볼을 찾아 나선 소설 속 인물의 마음에 가까워질 수도 있겠습니다. 어쨌든 첨벙거리는 상실과 무력감 위로 기묘하고 핀트가 엇나간 사건들, 농담 같은 상황이 벌어지며 밸런스를 맞추는 특유의 구성은 줄거리보다 오래 기억에 남을 만큼 인상적입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이 소설에서 화자와 쌍둥이 자매가 집 뒤에 있는 골프장을 산책하는 장면이 가장 좋습니다. 화자의 말대로 그런 작은 장면들이 우리가 죽을 때까지 함께할 작은 빛일 것 같아서 말이지요.


모두들 채 감당하지 못할 문제를 껴안고 있는 모양이었다. 문제는 비처럼 하늘에서 내려왔고, 우리는 열심히 그것들을 주워모아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왜 그렇게 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무슨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_76~77p.

그렇게 나는 핀볼을 그만두었다. 그럴 만한 때가 오면, 모두들 핀볼을 그만둔다. 그저 그뿐이다. _149p.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것은, 오래 전에 죽어버린 시간의 단편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그 따스한 상념의 몇몇 편린은 오랜 빛처럼 내 마음속에서 지금도 여전히 헤매이고 있다. 그리하여 죽음이 나를 포획하고, 다시금 무의 도가니로 던져질 때까지의 짧은 순간을, 나는 그 빛과 함께 할 것이다. _201p.



3. 『평일도 인생이니까』, 김신지 지음



참 좋은 제목입니다. 제목만으로 이 책이 필요한 사람들이 “아, 그게 나구나?” 하고 알 수 있으니 말이죠. 더 좋은 건 내용이 제목에 참 잘 부합한다는 점입니다. ‘행복’ 전부를 바라기보단 ‘ㅎ’을 먼저 줍고, ‘빅 픽처’ 대신 ‘스몰 픽처’를 즐겨 그리는 김신지 작가다운 에세이이거든요.


사실 저는 주말만큼이나 평일도 아낍니다. 아낀다기보단 필요로 합니다. 주말엔 나태해지기 쉬워서 해야 할 일들을 내팽개치고 시간을 보내다 일요일 끄트머리쯤 굉장히 불만족스러울 때가 잦거든요. 평일에 공적으로 하는 일은 제가 사적으로 하려는 일의 연장선이라고 할까, 같은 결이랄까, 그래서 ‘해야 할’ 것을 제대로 못해도 ‘자기 합리화’가 가능합니다. 자랑스럽게 할 말은 아니지만요. 게으르고 집중력이 약하다는 건 저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평일도 인생이니까』를 읽으면 부러운 것들이 생겨납니다. 이 페이지에서 작가도 일종의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건데! 왜 내 게으름과는 질적인 차이가 느껴지는 거지? 시간의 흐름을 그대로 놓아두는 일,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일, 곁에 있는 사람들과 온전한 시간을 보내는 일, 미친 듯이 바쁘게 살다가 갑자기 한숨 돌릴 때 그 휴식의 의미를 오롯이 아는 일. 그게 저라는 독자에게 턱없이 부족한 면입니다. 소박하고 긍정적인 성격과 놀라운 ‘자기반성’ 혹은 ‘자기 설득력(?)’이 말이죠.


삶을 긍정하라거나 당신을 위로하고 싶다는 책을 잘 읽지는 않습니다. 이 책도 그런 장르에 속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여기엔 종이 한 장 두께만큼 얇은 차이가 있습니다. 삶의 태도와 삶으로 쓴 문장이 바로 그것입니다. 대부분 내 인생이 왜 이 모양인지 이유를 알고, 그게 내 안에 있는 이유라면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실천하는 게 무지막지하게 어려울 뿐이지요. 하지만 작가는 그걸 해내고 있습니다. 단번에, 큼지막한 덩어리로는 안 된다는 걸 알아서 작은 변화부터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신기한 건 그렇다는 게 문장에서 읽힌다는 점입니다. 책에는 저자가 선생으로부터 “재능이 70점”이라고 평가 받는 에피소드가 나오는데요, 이런 문장력은 70점 이상의 재능이겠지요. 조곤조곤, 작가의 관찰과 유머와 자책이 흘러가는 문장을 여러분도 만나보셨으면 합니다. 평일도 인생이라는 걸 아는 마음으로 사는 일, 좋은 책을 쓸 수 있다는 게 바로 그 증거일 것 같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무엇일까? 어쩌면 우리는, 어린 우리가 그토록 바랐던 것을 스스로에게 주려고 어른이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과자를 사 먹지 못했던 아이는 나에게 과자를 사 주는 어른으로 자라고,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 못했던 아이는 원하는 장난감을 나에게 다 사 줄 수 있는 어른으로 자라고, 좁은 시골마을에서 살았던 아이는 낯선 나라를 여행하는 어른으로 자란다. _66~67p.

내가 머물렀던 곳의 풍경 하나라도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사라진 세계에 대한 예의라고 믿는다. 그래서 문득 걸음을 멈추게 하는 풍경을 만나면, 더 자주 보려 하고, 사진을 찍어 두고, 그럴 수 없는 곳은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그림을 그리듯 일기를 써 둔다. 언젠가 사라질 세계를 미리 기억해 두려고. _91p.

그러다 누군가는 마침내 원하던 곳에 닿고 누군가는 닿지 못하겠지.
하지만 그건 여전히,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닐 것이다. _195p.




글 신태진

여행 매거진 BRICKS의 에디터. 『꽃 파르페 물고기 그리고 당신』을 냈고, 『홍콩단편, 어쩌면 익숙한 하루』를 함께 썼다.

https://www.instagram.com/ecrire_lire_vivre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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