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여분의 리뷰: 2021년 6월

월간 여분의 리뷰: 2021년 6월



여분의 책방 인스타그램에서 매주 소개한 책을 모아 월간 '여분의 리뷰'를 발행합니다.

2021년 6월에 소개한 책 두 권을 모아 보았습니다.



1. 『무라카미 T』,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심플, 무지를 최고로 치는 사람들한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티셔츠엔 프린트가 되어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아무 무늬도 없는 흰 티가 훨씬 더 많지만요. 스파 브랜드에서 주기적으로 출시하는 ‘누구누구와 콜라보 티셔츠’ 같은 것도 좋지만 도대체 저런 걸 어디서 찾았을까 싶은 티셔츠는 정말 욕심이 납니다. 보통 특별한 목적으로 한정 제작된 것들이라 구할 수도 없는 것들이지요. 막상 입으면 나한텐 안 어울릴 게 빤한데 그래도 갖고 싶은 이미지들. 티셔츠, 도대체 그게 뭐라고 그럴까요?


『무라카미 T』가 그 질문의 답이 될 수 있겠습니다. 벼룩시장 같은 곳에서 마음을 끄는 티셔츠를 한두 장 사다 보니 어느덧 수백 장이 됐다는 하루키. 제조사에서 제품 프로모션으로 찍은 티셔츠, 누구도 선뜻 예뻐할 수 없는 동물들이 찍힌 티셔츠, 공연이나 앨범을 기념하는 티셔츠, 하루키의 책을 홍보하려고 각국 출판사에서 찍은 하루키 티셔츠……. 작가는 책 곳곳에 “이런 티셔츠를 실제로 입을 순 없습니다”라고 이야기하지만, 내심 저자도 책을 읽는 독자도 그 옷을 걸치고 거리를 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지 모릅니다. 티셔츠라는 복식으로, 앞판이나 뒤판에 그려진 이미지로 ‘무언가’를 표현할 수 있을 것만 같기 때문이지요. ‘무언가’가 정확히 무엇이라고는 콕 집어 말할 순 없어도 그게 티셔츠의 마력임은 분명합니다.


이 책은 오직 티셔츠에 관한 티셔츠 에세이입니다. 하루키 에세이의 매력은 이미 다른 책을 통해 이야기했지요. 거기에 딱 맞는 배경으로 찍은 티셔츠 화보가 더해져 책장이 훌훌 넘어갑니다. 이 티셔츠가 예뻐서, 이 티셔츠의 근원과 정체가 궁금해서 조바심이 나기 때문이에요. 뭐,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가 이런 책을 썼어도 이렇게까지 사람들에게 읽혔을까 싶기는 합니다만… 그럼에도 힘을 싹 뺀 문장 곳곳에선 하루키라는 작가가 빠끔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작년에 티셔츠 관련 책을 편집하고 있을 때 『무라카미 T』가 일본에서 출간됐다는 걸 알았습니다. 소재가 같아서 몹시 궁금했는데 일 년 가까이 지나 마침내 국내에도 번역이 되어 반가웠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이 티셔츠 애호가들에겐 비슷한 면이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자꾸 티셔츠를 사고 싶게 만든다는 겁니다!


특히 깊은 밤 혼자 조용히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 (…) 맥주는 너무 묽고, 와인은 너무 우아하고, 마티니는 너무 젠체하고, 브랜디는 좀 정리하는 기분이 들고…… 그렇다면 이건 뭐 위스키 병을 꺼낼 수밖에 없죠. _31p.

‘KEEP CALM AND CARRY ON’은 원래 제2차 세계대전이 막 시작되려 할 때 영국 정보부가 민심을 안정시키고 패닉 발생을 막기 위해 만든 포스터 속 문구다. 최근 재조명을 받더니 어째선지 널리 인기를 얻어 곳곳에서 사용하고 있다. 리먼 쇼크 때에는 금융기관이 이 포스터를 대량으로 발주했다(당연하지만 효과는 거의 발휘하지 못했다). _41~42p.

언젠가 여름이었는데, 출판사 관계자 초대로 긴자의 깃초에 갈 일이 있었죠. 그런데 입구에서 반바지 입은 사람은 출입을 금한다는 겁니다. 초대를 받은 내가 안 들어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알겠습니다” 하고는 가방에서 긴 바지를 꺼냈죠. 현관에서 입었더니 다들 얼굴이 파랗게 질리더라고요. _167~168p.



2. 『헤르만 헤세의 나무들』, 헤르만 헤세



먼 곳이든 가까운 곳이든 어딘가로 여행을 가거나 하다못해 산책하러 가게 되면요, 저도 모르게 눈여겨보게 되는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나무입니다. 제가 나무를 잘 구분하고 그 이름을 잘 알아서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정말 유명하고 흔한 종이 아닌 한, 나무든 꽃이든 식물을 구분하는 데 완벽히 젬병입니다. 작가 중에는 유난히 나무 이름을 자주 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수목의 이미지가 장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 하지만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알 수가 없으니 항상 반쪽 독서만 하는 것 같았습니다. 때로는 검색해 보기도 하지만, 백과사전에 첨부된 사진들도 이걸 알아보라고 찍어 놓은 건지 의심스러운 게 많더군요. 나무는, 직접 눈앞에서 보고 만지지 않는 한 내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어요.


표지마저 아름다운 『헤르만 헤세의 나무들』은 그래서 일종의 도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줄곧 나무에 눈길이 갔다는 건 그만큼 제가 그들에게 관심이 있다는 이야기겠지요. 꼭 친해지고 싶은 친구가 있는데 말은 걸지 못하고 주변만 맴돌던 어린 시절처럼요. 결론적으로 나무를 잘 모른다 하더라도 문제는 없었습니다. 헤세가 글로 다 알려주거든요. 단순한 묘사를 넘어서 어떤 나무가 어떤 기백으로 어떤 영혼을 품은 채 서 있는지까지 전부요.


헤세가 정원 가꾸길 좋아하고 자연을 즐겨 그렸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졌습니다. 헤세의 삶과 그가 그린 풍경을 주제로 삼은 전시도 두 번인가 열려 성공을 거두었던 거로 기억합니다. 그처럼 『헤세의 나무들』도 헤세가 나무에 관해 쓴 에세이, 시, 소설(일부)을 선별해 엮은 책입니다. 헤세는 나무를 관찰하고 묘사하고 나무와 어울리며 동시에 삶에 관해 사색합니다. 문학에서 나무는 줄곧 인내, 변화, 순환, 생명의 상징이었지요. 그 역시 나무들에서 인간이 모범으로 삼을 만한 미덕을 발견합니다. 본인의 삶에 대한 확신도 얻고요.


흔히 ‘선집’이라고 하는 이런 책들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어렸을 적에 책장에 꽂혀 있던 『세계의 시선詩選』 같은 낡은 책을 뒤적이던 기억은 좋게 남아 있습니다. 아마 거기엔 헤세의 시도 있었겠지요. 봄부터 겨울까지 계절의 변화에 따라 엮인 글을 읽고 있으면 사계절을 온전히 자연과 벗 삼아 보낸 기분이 듭니다. 책 곳곳에 그려진 일러스트도 사진보다 세밀하고 아름다워서 지금 헤세가 부르는 나무가 어떤 나무구나 알 수 있어요. 자연을 보며 ‘힐링’하는 문화가 정착된 지금, 정작 자연을 어떻게 경험하고 음미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는 저 같은 사람에게 여기 헤세의 문장이 현명한 길잡이가 되어 줍니다.


한그루 나무는 말한다. 나의 힘은 믿음이다. 나는 조상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해마다 내게서 생겨나는 수천의 자식들에 관해서도 전혀 모른다. 나는 씨앗의 비밀을 끝까지 살아낼 뿐 다른 것은 내 걱정이 아니다. _10p.

늙은 사내 하나가 서서 뽕나무에 가위질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늙은 사내는 뽕나무 잎사귀들을 쉽사리 따낼 수 있게 나무를 땅 가까이 머물도록 평생 동안 가지들을 잘라내는 수고를 해왔다. 이 여러해, 수십년간 나무들은 해마다 가지가 잘리고 베어져도 다시 일어나서 자랐고, 시간이 흐르면서 승리를 했다. 그들은 더 높이 자랐으니 칼과 톱을 든 이 사내는 나무들을 제대로 제압하지 못한 채 죽게 될 것이다. _113p.

모든 꽃은 열매가 되고자 하고
모든 아침은 저녁이 되고자 하며,
변화와 시간의 흐름 말고
지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_144p.




글 신태진

여행 매거진 BRICKS의 에디터. 『꽃 파르페 물고기 그리고 당신』을 냈고, 『홍콩단편, 어쩌면 익숙한 하루』를 함께 썼다.

https://www.instagram.com/ecrire_lire_vivre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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