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미야]When a man is tired of London

카페 미야 #7



When a man is tired of London, he is tired of life.

런던이싫증난 사람은 인생이 싫증난 것과 같다.



영국의 시인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은 런던의 삶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고민하는 사람들, 혹은 고민할 겨를도 없이 바삐 사는 사람들을 위해 런던에선 항상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줄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다. 무엇이 벌어지는지는 아쉽게도 런던에 살아봐야만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그중 내가 가장 사랑했던 것은 바로 단연코 런던의 공원이었다.


런던에서의 석사 생활이 시작되고 나는 엄청난 공부량과 자괴감으로 마음 쓸리는 날들을 보내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근처의 리젠츠 파크Regent’s Park를 걷다가 이곳에 살고 싶다, 홀딱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얼마 뒤 공원 앞 하얀색 빅토리안 하우스를 구해 이사를 했다.


피크닉 온 런던 시민들


나의 주말은 늘 리젠츠 파크 산책으로 시작했다. 낮은 돌담을 따라 꽃가게와 작은 카페를 지나면 캠든Camden을 가로지르는 리젠츠 카날Regent's Canal로 이어진다. 알록달록 작은 배들이 정박한 좁은 수로를 건너면 아름드리나무가 시원하게 뻗은 공원의 입구가 나온다. 공원에 들어서고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은, 놀랍게도, 펭귄이다. 리젠츠 파크는 런던 동물원과 담을 맞대고 있다. 담이라고 해봐야 낮고 듬성듬성한 철창이어서 동물들이 훤히 보인다. 철창에 꼭 붙어서 풀 안으로 첨벙첨벙 뛰어드는 펭귄을 보며 키득대다 보면 내 뒤로 무슨 재미있는 구경이 있나 덩달아 기웃대는 사람이 한둘은 꼭 있다. 무심하게 계속 뭔가를 씹어대는 낙타와 라마를 지나쳐 목이 좀 마르다 싶을 때 아담한 식수대가 나타난다.


리젠트 카날


목을 축일 수 있는 식수대


한가한 라마


식수대를 기점으로 오른쪽으로 길을 들면 드넓은 잔디밭이 펼쳐진다. 공원 지리에 익숙하지 않았을 때는 잔디밭 끝이 보이지 않아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갈대밭 진흙탕 길로 잘못 들기도 하고, 집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해 구글맵을 켜고 찾아오기도 했었다. 잔디밭에는 구획을 알맞게 나눠 맹렬하게 축구를 하는 사람들, 동그랗게 모여 그룹 운동을 하는 사람들, 세련된 운동복을 갖춰 입고 조깅하는 사람들, 애완견과 산책 중인 사람들, 피크닉을 나온 사람들까지 주말 아침이 참 부지런하다.


잔디밭을 에둘러 공원을 크게 도는 아웃터 서클Outer Circle을 따라 걷다 보면 보트 호수Boating lake로 이어진다. 호수에는 페달로Pedalo(페달을 밟아 앞으로 나아가는 보트)와 오리, 백조가 서로 길을 내어주며 한가롭게 물 위를 떠다닌다. 호숫가 버드나무 아래 빛바랜 나무 벤치는 쉬어가기 딱 좋은 목이다. 이러한 기념 벤치Memorial Bench는 영국 전역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을 기리며 그들이 생전에 좋아하던 곳에 세우는데, 벤치에는 “사랑하는 수잔을 기리며”, “줄리안과 모니카는 여기에서 행복했어요” 등의 짧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벤치를 세우려면 정부에 승인뿐만 아니라 2백만 원이 훌쩍 넘는 설치비까지 내야한다. 내게 기념 벤치는 “Love is all around”의 상징이었다. 떠난 사람과 남은 사람의 생사를 초월하는 애틋한 사랑도, 행인의 지친 다리를 잠깐이나마 쉬어가게 하는 마음도 은근히 외로움 타던 그때의 나에게는 적지 않은 위로가 되어주곤 했던 것이다.


아우터 서클, 보팅 레이크


보팅 레이크 피크닉


호숫가 풍경


하늘에 낮게 드리운 구름이 천천히 흘러간다. 인상주의 화가의 그림 속 구름은 사실적인 묘사였구나 싶을 정도로 유럽 하늘의 구름은 유난히 아름답다. 오죽하면 영국에 구름감상협회Cloud Appreciation Society가 다 있을까. 구름을 “자연의 시Nature’s poetry”라고 표현한 낭만도 참 멋들어진다. 호숫가에서 일광욕을 하는 오리와 백조 사이로 조심조심 발을 디뎌 호수를 가로지르는 철제 다리를 건너 이너서클Inner Circle로 들어선다.


리젠츠 파크가 가장 아름다운 때는 장미가 만발하는 5월에서 6월까지다. 수백 종의 장미가 산책로를 따라 가득 메운다. 장미꽃 길은 퀸메리 장미 정원Queen Mary’s Rose Gardens에서 절정에 이른다. 세상에 이런 장미가 다 있었나 한 번 놀라고, 장미마다 꼭 맞는 이름을 지어준 사람들의 감성에 한 번 더 놀란다. 장미의 이름과 생긴 모양을 대조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꺄르르 웃다 보면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아기 얼굴처럼 고운 장미를 두 손으로 살짝 감싸 향기를 맡으면 아찔한 향, 은은한 향, 달콤한 향 등 저마다 다른 향기가 밀려들어 온다. 장미가 꽃의 여왕이 될 수 있었던 건 화려한 겉모습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너서클 산책로의 메모리얼 벤치


장미만발


다양한 장미들


느릿느릿 한 시간에 걸친 산책은 가든 카페, 더 리젠츠The Regent’s의 크림티Cream tea로 마무리된다. 막 구워 나온 포슬포슬한 스콘Scone에 클로티드 크림Clotted cream을 바르고 딸기잼을 살짝 얹는다. 입안에 쏙 넣고 진하게 우린 홍차 한 모금을 머금으면 고소, 달콤, 상큼한 맛이 한데 어우러져 입안에 퍼진다. 미네랄이 많이 함유되어 있는 영국의 물은 차 맛을 더욱 묵직하게 만들어준다. 아무리 좋은 홍차 잎을 우린다 해도 한국에서는 그와 같은 맛을 낼 수가 없다.


카페에 앉아 다이어리를 끄적이기도 하고, 멍하게 앉아있기도 한다. 아기를 데리고 산책 나온 젊은 부부, 신문을 정독하는 머리 희끗 어르신, 다들 여유로운 주말을 보내고 있다. 어느새 나의 마음도 푸근해져 지금의 고민과 좌절이 아무것도 아닌 듯 느껴졌다. 주말이어도 대부분 도서관에 처박혀 끝나고 말았지만, 주말 아침만은 이렇게나 나른하고 산뜻했다.


카페 내부


아기와 하는 산책


그리운 장면


얼마 전 친구의 결혼식을 핑계로 다시 런던을 찾았다. 무심히 길을 걷다가 문득, 런던 특유의 비를 잔뜩 머금은 공기의 냄새를 느꼈다. 어깨 위를 후둑이는 빗방울의 세기도,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의 소리도, 마치 내 몸 안에 안테나가 있는 듯, 잊고 있었던 일상의 오감이 무의식적으로 감지되었다. 이성적인 기억은 점점 흐릿해졌어도 감각은 아직 또렷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그다지 향수에 젖어 지내지는 않았지만, 싱그러운 공기를 머금은 공원을 산책하며 새로이 피어난 꽃향기를 맡아보고, 호수 위 솜털이 막 자라난 난 아기 백조에 웃음 짓다 카페에 앉아 차 한 잔 마시던 시간들만은 정말 그리웠다. 비행기로 12시간이나 날아가야 하는 곳이지만 일상에 찌든 내가 아니라 일상을 즐기는 나로 만들어 주는 곳 하나쯤 있다는 것 자체가 참 감사한 삶이다.





글/사진 miya

런던대에서 석사를 마치고 옥스퍼드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 지금은 서울 체류자. 대륙을 가리지 않고 오지를 휘젓고 다녔지만, 이제는 카페에 나른하게 앉아 일기를 쓰고 엽서를 쓴다. 창밖을 바라보는 맛이 더욱 좋아져 걷기도 싫어져 버린. 아니, 아니, 나이 때문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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