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미야]실연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1

카페 미야 #11



“살다 보니 결혼이 제일 맘대로 안 되더라”


요코 언니는 맥주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한껏 찌푸린 언니의 눈썹에 내 관자놀이가 찌릿했다.


본격적인 논문 학기가 시작되고 도서관은 레드불 냄새로 진동했다. 나는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면 손가락까지 달달 떨리는 탓에 거기에 의존할 수도 없었다. 용량이 작은 내 머리는 점심이면 벌써 과부하가 걸렸다. 머리를 식히는 유일한 방법은 수영이었다. 학교 수영장은 센트럴 런던에서 가장 큰 수영장이었다. 길이 33m, 너비 11.5m, 깊이 3.4m의 큰 레인을 독차지하며 망망대해에서 수영하는 나를 상상했다. 이 지긋지긋한 논문만 끝나면 진짜 바다에서 수영하리라, 나는 다이어리에 끼워놓은 스플리트 행 비행기 티켓을 들여다보며 애써 마음을 다잡곤 했었다.


스플리트에서


스플리트에 도착한 지 3일째 되던 날, 늘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 앉아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고 앉아있던 내게, 카페의 주인은 흐바르 섬에 가보라고 했다. 그날 오후 나는 당장 짐을 싸 흐바르로 향하는 배에 올라탔다.


흐바르 섬에서 할 일은 구불대는 골목을 쏘다니고, 내 발가락 끝이 선명히 보이는, 깊이를 도저히 알 수 없는 영롱한 바다 끝을 헤아리다가 바닷가에 누워있는 것 외에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흐바르 전경


이 작은 섬에 관광객이 머무는 곳이란 뻔해서 하루에도 몇 번을 똑같은 사람들과 마주쳤다. 그중 요코 언니는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언니 얼굴에는 일본인, 내 얼굴에는 한국인이라 쓰여 있는데도 마주칠 때마다 눈길이 머무는 시간은 다른 사람보다 더 길었다.


언니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두 달간 동유럽을 여행 중이었다. 일본인은 낯선 사람에게는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던데, 그것도 아닌 말인가 보다. 아니면 온종일 뜨겁던 태양이 물러가고 귓불을 살랑 스치는 바닷바람 때문인지, 차갑게 내려앉은 공기에 담긴 은은한 라벤더 향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연거푸 들이부었던 맥주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흐바르에도 젤라또가 많다


흐바르의 블루 케이브


“대학? 결과는 노력했던 것만큼 나왔어. 직장도 열심히 하다 보면 웬만한 자리에 올라가 있었어. 그런데 결혼은 말이야. 나 혼자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더라고. 일종의 운명 같은 게 작용해야 되는 것 같아.”


“언니, 나도 딱 그래. 나는 연애를 할 때마다 항상 결혼을 생각했어. 서로가 ‘내 사람’이 되기까지 그렇게 품을 들였는데, 헤어지고 나면 너무 허무하더라. 실연의 상처도 크고, 누구를 또 만나서 지난한 과정을 겪는 게 지겨워지기 시작했어. 그래서 점점 연애하는 게 힘들어지더라.”


“나도 나이가 들수록 사랑이 두려워지더라. 아마도 사랑에는 필연적으로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럴지도 몰라. 우리 자그레브에 가보지 않을래? 거기 실연 박물관이 있대. 도대체 사람들은 어떻게 헤어지는 걸까?”


낮 동안 뜨겁게 달궈졌던 성 스테판 광장의 대리석 바닥은 딱 알맞게 식어 있었다. 얼큰히 취한 우리는 신발을 벗고 대리석 위를 걸었다. 크로아티아의 남쪽에서 목격한 로마 시대의 영화는 한때 으리으리했을 건축물이 아니라 도처에 깔린 반들반들한 대리석 길바닥에 있었다.


흐바르의 해변


다음 날 아침 언니와 나는 흐바르 항구에서 만났다. 배낭 여행자답게 백팩은 언니의 머리 위로 한참 솟아올라 있었다. 스플리트에서 출발한 버스는 아드리아 해를 곁에 두고 북쪽으로 달린다. 언니는 가방에서 끊임없이 간식을 꺼내 내 손에 쥐여주었다. 빠듯한 예산의 요코 언니는 근처를 잠깐 나설 때도 언제나 큰 가방을 멨다. 가방 안에는 우유 1리터, 시리얼, 빵, 두루마리 휴지까지 없는 게 없었다.


요코 언니와 사랑에 관해 얘기를 나눈 뒤로 나는 영 싱숭생숭했다. 크로아티아의 기가 막힌 풍경을 앞에 두고도, 나는 머릿속으로 몇 안 되는 연애를 더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남기고 간 물건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사랑이 끝나면 미련 없이 물건을 내다 버리기도 하지만 나는 일종의 자학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물건을 버리지 못했다. 편지와 물건들을 꺼내놓고 수습이 안 되는 감정에 취해 눈물을 쏟는 세월을 얼마간 보낸 후, 마침내 소용돌이가 잠잠해지고 나면 물건들을 상자 속에 꽁꽁 쌌다. 그것은 사랑 끝! 이라는 일종의 선언이며 의식이었다.


요코 언니


크로아티아의 남쪽에 있을 땐 붉은 지붕, 새파란 바다, 맛있는 피자와 젤라토 때문에 이탈리아와 별반 다를 게 없었는데, 자그레브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성 마르코 성당은 그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아기자기함을 뽐내고 있었다. 명소에 얽힌 역사를 전달하는 방법도 기발했다. 당시 살았던 여러 계층의 사람들, 유명인으로 분장한 사람들은 광장을 거닐며 관광객과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어줬다. “당신은 누구세요?” 라고 물으면 자신을 소개하면서 크로아티아가 겪어온 파란만장한 역사와 당시 사람들의 삶을 들려주었다.


자그레브의 코스튬 안내원과 성 마르코 성당


여행하면서 겪어본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늘 그런 식이었다. 마치 내가 올 것을 알고 어떻게 하면 내가 진정으로 이곳을 즐길 수 있을까, 만반의 준비를 하며 기다린 것 같았다. 선셋을 바라볼 때도 파도가 즉석에서 연주하는 오르간 소리를 들려줄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이라면 실연 박물관이라는 기막힌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거란 생각을 했다. 성 마르코 성당을 따라 내려가니 카페처럼 아담한 실연 박물관이 나타났다.


자다르 선셋. 파도가 연주하는 파이프 오르간


다음 편에 계속.




글/사진 miya

런던대에서 석사를 마치고 옥스퍼드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 지금은 서울 체류자. 대륙을 가리지 않고 오지를 휘젓고 다녔지만, 이제는 카페에 나른하게 앉아 일기를 쓰고 엽서를 쓴다. 창밖을 바라보는 맛이 더욱 좋아져 걷기도 싫어져 버린. 아니, 아니, 나이 때문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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