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서점들]삼양 원당봉과 나이롱 서점

제주의 서점들 #1



제주를 마지막으로 찾은 것은 10년 전쯤이었다. 대학 졸업반을 앞뒀던 나는 숨 고르기를 위해 제주 한달살이를 택했다. 그리고 2019년. 나는 다시 쉬어가기 위해 제주에 왔다. 제주는 내가 보지 못했던 풍경들로 가득했다. 가장 많이 달라진 것은 자본의 힘으로 변해버린 자연이었다. 또, 그만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동네마다 생긴 작은 책방들이었다.


아무런 계획도 없던 나의 두 번째 제주살이는 책방 투어로 생기를 찾았다. 내가 이토록 책방을 좋아했나 싶을 정도였다. 외출하는 게 한없이 귀찮아도 책방 갈 생각만 하면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언젠가 책을 한 권 써보기로 한 결심과 책방주인이 되고 싶다는 로망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전 조사를 빙자한 취미생활이랄까. 그렇게 제주 동네 책방 투어를 시작했다.



아침부터 비가 왔다. 오늘은 삼양 해변 근처 나이롱 서점에 가기로 했다. 삼양동 동네 어귀에서 ‘책’이라는 입간판이 어렴풋이 보였다. 빨간 벽돌 서점의 알루미늄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서 오세요”라는 인사가 나를 반긴다. 바쁘신지 사장님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의 인기척에 인사는 잊지 않고 챙겨주신다. 동네책방 주인들은 대부분 이렇게 아주 친근하진 않다. 하지만 난 나와의 거리를 유지해 주는, 그래서 편히 쉴 공간을 내어주는 동네책방이 좋다.


들어서자마자 채식에 관한 책이 보였다. 밖에서는 좁아 보였는데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한쪽에서는 사장님이 커피와 차를 만들고 있었다. 점심을 거하게 먹은 탓에 소화를 좀 시키려고 따뜻한 차 한 잔을 주문했다. 중고책 진열대엔 카프카의 삶과 문학을 다룬 책이 있었다. 카프카가 쓴 책은 읽어봤지만, 그의 삶을 들여다 본 적은 없었다. 얼핏 들춰봐도 꽤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것 같다.


“나의 머릿속에 있는 세계는 놀라운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나를 해방시킬 것이며, 어떻게 나를 괴롭히지 않고 그것들을 해방시킬 것인가. 오히려 그것을 내 속에 간직하거나 묻어두고 괴로워하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카프카에게 완벽히 공감할 수는 없지만 이 문장만큼은 묘하게 와 닿았다.



동네 책방에 가면 책장을 여러 번 둘러본다. 신기하게도 볼 때마다 흥미로운 책들이 새로이 발견되는 곳이 동네 책방이다. 카프카의 책을 다 읽고 다시 책장을 훑자 역시나 아까 보지 못했던 책들이 보인다.


출판계에서는 우울증에 관한 에세이가 열풍이었다. 나이롱 서점에도 우울증에 관한 책이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또, 곳곳에 페미니즘 관련 서적이 보였다. 한편으론 나무막대로 커튼을 받쳐놓은 깜찍함에 괜히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이 모든 것으로 말미암아 주인의 취향을 알 것도 같았다.



여러 권의 책을 들었다 놨다, 읽다 덮다를 반복하다가 『파도 아래 선한 눈』이라는 책에 눈길이 갔다. 도형이 그려진 표지도, 책 소개도 마음에 들었다. 아무렇지 않게 꺼내든 책은 선 자리에서 단숨에 읽혔다. 시인데 짧은 소설 같고, 구절구절 마음에 닿았다. 홀린 듯 『파도 아래 선한 눈』을 사고 사장님께 주변에 갈 만한 곳을 물었다. 원당봉을 가보라 한다. "책방 정말 좋았어요"라는 인사를 남기고 책방을 나왔다.



*   *   *


겨울이라 해가 짧아졌음에도 무슨 베짱인지 길을 나섰다. 아침에 비가 와서 제대로 걷지 못한 게 아쉬웠다. 그러다가 길을 잃었다. 하지만 덕분에 우리나라에서 유일무이하다는 현무암 5층 석탑도 봤고, 한 아주머니를 따라가다가 귤 농장에도 갔다. 거기서 길도 알려주시고 귤도 주시는 아저씨 한 분을 또 만났다. 길을 잃는다는 게 뭐가 두렵겠어, 종국엔 길을 잃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은 채 발걸음이 경쾌하기만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원당봉으로 가는 길은 너무 험난했다. 사실 ‘원당봉’이라고 쓰인 표지판은 내려올 때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주변을 유심히 살피지 않는 성격이라 그랬을 수도 있지만, 이번에는 정말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해가 지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사람은 보이지도 않고 새소리만 들렸다. 주변이 스산해졌다. 자꾸 떠오르는 재난영화를 떨치고자 정신 똑바로 차리고 너덜너덜해진 다리를 계속 내딛었다. 한차례 가벼운 슬라이딩까지 구사한 후 정확히 여섯 시 반쯤 인적이 있는 곳으로 나왔다. 사람들의 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얼른 버스정류장에서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서점 사장님은 원당봉까지 가는 데 30분이면 충분하다고 했는데, 나는 도대체 어디를 유랑했던 걸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지만, 덕분에 나이롱 서점과 원당봉은 잊을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소박한 교훈도 얻었다. 해가 지는 시간에는 섣불리 오름에 오르지 말자고.





글/사진 chantrea

오랫동안 글을 쓰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오래오래 집을 이고 다니며 생활하고 싶습니다. 4년 동안의 캄보디아 생활을 뒤로 하고 지금은 제주에 삽니다.

http://blog.naver.com/rashimi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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