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미야]안데르센의 오덴세

카페 미야 #6



“그 중에서도 육지의 세계를 가장 동경한 공주는, 가장 오래 기다려야 할 뿐만 아니라 말은 없고 생각이 많은 막내였다. 밤마다 막내 공주는 열린 창가에 서서 물고기들이 지느러미와 꼬리를 흔들며 지나가는 검푸른 바닷물을 올려다보았다.”


할머니 댁은 남해의 조그만 어촌 마을이었다. 지금은 독일마을로 유명세를 타게 된 곳이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외지 사람은 거의 찾아오지 않는 바닷가 마을이었다. 동 트기 전 통통배를 몰고 나가 어망으로 생선을 낚아 내다 파는 게 마을 사람들의 생업이었다. 나도 가끔씩 아빠를 따라 밤낚시를 나가곤 했지만, 드리운 낚싯줄엔 입질 한 번 없었고, 물고기가 도망간다고 떠들지도 못했다.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뱃머리에 턱을 괴고 앉아 깊이도 알 수 없는 검은 바다 속을 들여다보는 일이었다.


어쩌면 저 아래 아름다운 산호 성벽 뒤로 은은한 광채가 흐르는 진주로 뒤덮인 궁전이 있을지 몰라. 배 아래 인어공주가 얼굴을 빼꼼 내밀지는 않을까. 바다 위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거품을 보며 인어공주도 이렇게 사그라져 갔던 걸까 생각하기도 했다. 인어공주를 떠올릴 때면 언제나 가슴에 구멍이 생겨났고, 그 사이로 냉랭한 바다 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인어공주


북유럽 여행길에 잠깐 런던에 들린 G는, 홍대에서 커피나 한 잔 하자는 말투로 다음 주 토요일 점심 코펜하겐København에서 만나는 거 어때, 하고 말했다. 일주일 후 나는 홀린 듯 코펜하겐 중앙역에 내려 스타벅스에 앉아 따뜻한 머그잔으로 손을 녹이고 있었다. 그 사이 수염이 거뭇하게 자란 G에게선 제법 여행자다운 분위기가 풍겼다. G와 나는 머릿속에 막 떠오르는 생각들을 뱉는 정도의, 음…, 나른한 사이였다. 오덴세Odense로 가는 기차 안, 우리는 말을 거두고 차창을 두들기는 빗방울 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


코펜하겐에서 한 시간 남짓 달려 안데르센의 고향 오덴세에 도착했다. 겨우 4시였는데 안데르센의 생가도, 박물관도, 기념품 가게마저도 Close 표지판을 내걸고 있었다. 이 마을의 여행자는 G와 나 둘뿐인 것 같았다. 비는 톡톡, 우산 쓸 맛이 날 만큼 내리치고 있었다. 파스텔 톤의 돌바닥은 비를 머금어 반들반들 했다. 돌길을 따라 지붕 낮은 집들이 줄줄이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창문을 기웃댈 뿐이지만 여행은 그대로도 좋았다. 그리고 너무 단출해서 눈에 띈, 안데르센이 유년시절을 보낸 집을 지났다.


얕은 지붕 집 ⓒG


언젠가 무대 위 눈부신 백조가 될 거라는 꿈을 안고 코펜하겐으로 상경했을 때, 안데르센은 겨우 14살이었다. 연기와 노래보다 글에 더 재주가 있던 소년은 10년 후 동화작가로 명성을 날리게 되지만, 가난한 유년시절에 대한 피해의식은 평생 그의 발목을 잡았다. 대인관계는 서툴렀고, 정체성은 불안했다. 이를 덮기 위한 허영과 과시욕은 다시 외로움이 되어 돌아왔다.


오덴세 거리 곳곳에 안데르센 동화 속 주인공들의 조각상이 있었고, 그 사이 훤히 보이는 곳 어딘가에 그의 동상이 있었다. 벤치에 외따로 앉아 있는 고독한 모습. 망토는 휘황찬란해서 쓸쓸함을 더했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동상으로 만드는 게 어떠냐고 했지만, 안데르센은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동화로 불리고 있는 게 싫었다. 아이들은 피상적으로만 이해할 뿐 어른이 되어야만 진정한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엄지공주


어느 동화의 조각일까.


정말로 그랬다. 어렸을 때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던 것을 어느 순간 실타래 풀리듯 스르륵 깨닫는 순간들이 온다. 시간이 흐르는 대로 살아가는 대로 살았을 뿐인데, 그간의 경험이 젊음을 내어준 자리에 연륜과 나이테로 오롯이 자리하는 것이다. 감정이 휘몰아치고, 차라리 추억마저 기억에서 다 뽑아내 버렸으면 싶은 사랑을 겪은 뒤 인어공주는 더 이상 동화가 아니었다. 끝내 자신을 돌아봐 주지 않는 사람의 축복을 빌며 기꺼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마음. 바보 같다 생각했던 인어공주의 마지막 선택은, 그때는 차마 이해하기 싫었던 고결한 사랑이었다.


기념품 가게의 인어공주


5월인데도 봄은 아직이었다. 우산을 쥔 손이 제법 시렸다. G와 나는 골목 끝, 눈 여겨 두었던 펍 Lørups Vinstue으로 들어갔다. 록 밴드의 앨범 재킷과 포스터로 벽면을 가득 채운 작은 술집이었다. 토르 같은 덩치의 웨이터가 추천한 오덴세 지역 맥주 알바니Albani를 비워갈 때쯤, 바에 앉아 있던 Dan이란 사람이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다.


“혹시 방해가 안 된다면, 덴마크 전통술 한 번 마셔보지 않겠어요?”


Lørups Vinstue


우리는 감기약 같이 꾸덕거리는 가욜Ga-jol을 시작으로, 40도가 넘는 아쿠아비트Akvabitt, 슈납스Schnapps까지 연거푸 들이부었다. 센 술에 얼큰히 취기가 올라 대화는 차츰 테이블을 건너뛰기 시작했다. 시시콜콜한 수다가 흐르는 동네 아지트 같은 술집 한 구석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는 30년 전 덴마크의 전설적인 록 밴드의 리더였다 한다. 그는 맥주를 홀짝이며, 벽에 걸린 가장 큰 포스터에서 자신의 모습을 가리켰다. 벽에 붙은 포스터 속 록커와 맥주를 마시는 곳이라니, 영화 <올모스트 페이머스>에라도 있는 것 같았다. 펍을 나서자 다들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전통주, 알바니.


오덴세 조용한 카페에서 안데르센의 흔적을 찾아보자던 여행은 결국 이 술 저 술 진창 마시러 온 꼴이 되었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때로는 술 한 잔이 절실한 이유가 되리라는 것을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알게 될 테니.




글/사진 miya

런던대에서 석사를 마치고 옥스퍼드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 지금은 서울 체류자. 대륙을 가리지 않고 오지를 휘젓고 다녔지만, 이제는 카페에 나른하게 앉아 일기를 쓰고 엽서를 쓴다. 창밖을 바라보는 맛이 더욱 좋아져 걷기도 싫어져 버린. 아니, 아니, 나이 때문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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