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미야]런던의 연말

카페 미야 #10



겨울이 왔다.


너무하다 싶을 만큼 두터운 회색 구름은 연일 틈새 없이 하늘을 꽉 메웠다. 런던에서 겨울을 한 차례 겪은 후에야 영국인의 우울함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하늘은 햇살 한 자락 내리는 데에 그토록 인색하면서도, 오후 4시면 제 할 도리 다 했다는 듯 서둘러 노을을 내리깐다.



그래도 겨울의 노을은 근사한 정찬의 애피타이저 같았다. 구름에 흠뻑 젖은 해는 온 도시를 깊고 고운 금빛으로 포근하게 물들인다. 노을이 한바탕 도시를 훑고 나면 새카만 어둠이 채 밀려들기 전에 늙은 가로등이 총총히 불을 밝힌다. 이내 거리마다 화려한 조명이 환하게 타오르기 시작한다. 연말 특수를 노린 소비 요정의 유혹이라 해도, 햇살 비추는 오후가 없던 날의 우울은 화려한 조명 아래 사라지곤 했다. 특히 웨스트엔드West End의 거리 조명은 마치 “너무 우울해하지 마. 내가 있잖아.” 하는 듯 온 힘을 다해 나를 황홀경으로 이끌었다.





피커딜리 서커스Piccadilly Circus를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은 거리는 화려한 샹들리에가 내려앉기도 하고, 은빛 행성이 끝없이 펼쳐지기도 한다. 수많은 사람으로 발 디딜 틈 없는 리젠트 스트리트Regents Street를 걸을 때도 하늘 위 새하얀 건물을 누비는 천사의 모습을 바라보느라 낯선 사람의 가슴팍에 코를 부딪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층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 거리를 매끄럽게 흘러갈 때면 눈앞으로 날아드는 천사의 모습에 버스의 종착역은 천국이었던 걸까 설렘마저 주었다.




이럴진대 크리스마스에는 얼마나 환상적일까 기대를 했더랬다. 그런데 당혹스럽게도 대중교통은 끊기고, 모든 상점은 문을 닫았다. 유럽 친구들은 가족과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다들 자기 나라로 돌아가고 없었다. 흥청스럽던 연말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온 도시는 마치 고담시티처럼 우울했다.


남은 자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저가 항공이 닿지 않는 곳에서 온 친구들과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몇몇은 추위를 뚫고 한 시간을 넘게 자전거 페달을 밟아가며 찾아올 만큼 사람의 온기가 절실한 밤이었다. 우리는 셰프 어머니를 둔 로이 덕분에 칠면조 오븐 구이로 제법 크리스마스다운 분위기를 낼 수 있었다. 국적은 모두 달랐지만 타지의 삶 속의 고독이 묶어준 유대감은 가족 못지않게 오롯했다. 로이는 남은 칠면조와 구운 채소를 살뜰하게 챙겨줬다. 이야기는 깊어지고,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창밖을 넘다가도 문득 추위를 뚫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두렵기도 했던 크리스마스이브였다.




"난생처음 이토록 근사한 새해맞이를 하며, 내년도 무탈하게 지나가기를."



새해를 앞둔 마지막 날에는 한국인 유학생들이 모였다. 소호의 한식 레스토랑에서 김치찌개, 잡채, 떡볶이로 폭식하며, 비록 좌절과 눈물로 점철된 나날들이어도 한 해를 무사히 보낸 것을 자축했다.


크리스마스와 달리 소호의 골목은 넘쳐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사우스뱅크Southbank 일대의 거리는 차량이 통제되었고, 템즈강을 따라 차링크로스Charing Cross, 임방크먼트Embankment,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역 등은 ‘NYE London’ 행사로 폐쇄되었다. 새해맞이가 이정도로 기쁜 일이었나, 놀랄 만큼 들뜬 사람들 사이로 차 없는 도로를 가로지르며 우리도 무법천지(?)의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그러다 새해가 되려면 아직도 4시간이나 남았는데,  불꽃놀이를 구경하려는 인파에 휩쓸려 템즈 강변에 꼼짝없이 갇히고 말았다. 강 건너 빌딩은 이미 커다란 스크린이 되어 빔을 쏘고 있었다. 런던 시장을 비롯한 셀러브리티들의 축하 메시지가 스크린을 메우고, 커다란 크레인의 스피커에서는 신나는 음악이 흘렀다. 그리고 분위기를 돋우는 디제잉 멘트는 마치 템즈강을 거대한 클럽처럼 만들었다.


“워털루브릿지Waterloo Bridge 소리질러!”

“예에에!! “

“소리가 작은데! 이번엔 웨스트민스터 브릿지Westminster bridge 소리 질러!!”

“예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


다리를 두고 거대한 인파의 응원전에 열기는 더욱 후끈 달아올랐다.



드디어 10초를 남기고 카운트다운 시작.


“10, 9, 8, 7, 6, 5, 4, 3, 2, 1! Happy New Year!!”


함성소리와 함께 화려한 불꽃이 빅벤과 런던 아이 위로 팡팡 터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포옹과 키스를 나누며 무사히 한 해를 보냈음에 감사하고 다가오는 한 해도 행복하기를 소원하며 서로 인사를 건넸다.


난생처음 이토록 근사한 새해맞이를 하며, 내년도 무탈하게 지나가기를, 때로는 세찬 바람이 몰아쳐도 행복의 징검다리를 퐁퐁 건너가며 ‘그래도 괜찮은 한 해였어’ 하고 돌아볼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빌었다.





글/사진 miya

런던대에서 석사를 마치고 옥스퍼드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 지금은 서울 체류자. 대륙을 가리지 않고 오지를 휘젓고 다녔지만, 이제는 카페에 나른하게 앉아 일기를 쓰고 엽서를 쓴다. 창밖을 바라보는 맛이 더욱 좋아져 걷기도 싫어져 버린. 아니, 아니, 나이 때문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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