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술집]서교동 이자카야 카즈, 잊혀지는 풍경들

작은 술집 #3



나의 신혼집은 6호선 망원역 1번 출구에서 멀지 않은, 서울올림픽 즈음해서 지어진 2층 양옥집이었다. 철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로 왼편에 녹색 페인트로 칠해진 철계단이 매우 급박한 형세로 2층을 향해 있고, 거기서 서너 걸음 떨어져 주인 할머니 현관에 이르는 다섯 칸 대리석 계단이 다소곳이 놓여 있었다. 계단과 계단 사이에는 합판 몇 장을 순식간에 덧대 만든 듯한 개집 하나가 있었고, 진돗개라고는 하나 리트리버보다 덩치가 큰 하얀 개 한 마리가 몸 반을 걸치고 누워 있었다. 개집에서 대여섯 걸음 앞에는 김장 때 말고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수돗가가 있었고, 그 오른편에는 길가와 면해 오래 전 장독대로 쓰였을지 모를 창고가 있었다. 수돗가 왼편에는 마당보다 한 단 높은 흙더미 작은 동산에 나무와 풀들이 자라 있었고, 마당 구석 감나무는 퍽 나이 들어 보였다.


오래된 집답게 천장이 높아 형광등 대신 아래로 늘어뜨리는 조명을 달 수 있었다. 그 아래 커다란 6인용 테이블을 놓았다. 사방 합판 벽에 짙은 색 바니시를 새로 칠하자 침침한 전등 빛을 품으며 집안 허술한 구석을 그럴싸하게 가려주었다. 봄가을이면 테이블을 창가로 옮겨 그 위에서 일도 하고 밥도 먹고 맥주도 마셨다. 볕이 좋은 날엔 옥외 베란다 난간에 이불을 널어놓고 커다랗고 하얀 아이가 심드렁하게 꾸물대는 모습을 내려다보기도 했다.


두 번째 가을엔 베란다에서 딴 감으로 곶감을 만들어 보려 했으나 그대로 상하기만 했다.


여름과 겨울이면 낡은 양옥집이란 걸 감안해도 믿을 수 없을 만치 바깥 날씨에 민감해져 안방으로 살림살이를 모조리 옮겨와 결혼과 동시에 청산한 줄 알았던 원룸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내 책상이 있던 작은 방은 11월부터 3월말까지 엄마가 가져다 준 김장 김치를 보관하기에 알맞은 온도로 유지되었고, 이 정도면 스케이트를 타도 되지 않을까 싶어 아이스링크라고 불렀다. 그래도 침대에 누워 귤을 까먹거나 아이스크림을 퍼 먹으며 영화를 볼 때면 이 집에 사는 일이 더 없이 만족스러웠고, 오랫동안 이런 날들이 지속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하지만 이사 온 날부터 이런 만족이 오래 가지 못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집 주변의 마당 있는 옛 건물들은 하나 둘 철거되어 원룸 오피스텔로 변해 갔고, 콘크리트 벽 무너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우리 집 골목으로 좁혀 오고 있었다.


골목을 나서면 화덕이 있는 피자집이 하나 있었고, 피자가 싫으면 외식을 하지 말거나 합정까지 걸어가야 했으므로 이사 오고 얼마 안 있어 쿠폰에 20개 도장을 가득 채울 수 있었다. 하지만 도장을 채운 바로 다음 날 아침 출근하다 말고 피자집 화덕이 철거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러 계단을 다시 뛰어 올라야 했다. 그 판국에 쿠폰 도장을 찍어 주는 뻔뻔함이라니, 분노를 곱씹으며 어떤 가게가 새로 들어올지 조석으로 기웃거렸다. 공사가 시작되고 얼마 안 되어 문을 연 가게는 일본 요리 학교를 나온 주방장이 선어회를 반짝반짝하게 썰어 내어 주는 일본식 주점이었다. 나는 괘씸한 화덕쟁이들이 어디로 이사 갔는지 찾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수월히 날려 버리고 개업 날부터 수시로 그곳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내 책상이 있는 방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이자카야 카즈


커다랗고 하얀 개는 처음 집을 보러 오던 날 그 자리에서 발을 못 뗄 만큼 표독하게 짖어대더니 집을 보고 내려오는 순간부터는 줄곧 시멘트 바닥에 엎드려 한쪽 눈만 치켜떴다 감을 뿐이었다. 골목 할머니들 말로는 그 개가 동네 사람들 발자국 소리를 전부 기억해 낯선 사람이 지나칠 때만 짖는 영물이라 했다. 실제로 그 녀석은 아무리 많은 사람이 대문 앞을 서성대도 짖지 않았지만, 골목을 처음 들어선 사람이 문 앞에서 얼쩡대면 대문 건너 사람이 놀라 팔짝 뛸 정도로 맹렬하게 짖어댔다. 그 아이가 짖는 날엔 동네 할머니들도 누가 왔나 일제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나는 마트에서 스틱 모양 강아지 간식을 사서 현관에 두고 아침에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하나씩 그 아이의 입에 넣어 주었다. 아무리 그래도 같이 사는 처지에 기척이 나면 일어나는 척이라도 하라는 바람이었다. 이후 아침마다 내 구두가 철계단을 울리면 그 아이는 계단 입구에 두 발을 들고 서서 나를 맹렬하게 덮쳤다.


커다랗고 하얀 그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먹을거리는 족발이었다. 이사 오던 날 할머니가 두 가지를 당부했는데, 이 집에서 재밌게 살다가 나갈 때는 꼭 집을 사라는 것과 혹시 족발을 시켜 먹게 되거든 남은 뼈는 절대 버리지 말고 꼭 이 아이에게 주라는 거였다. 우리는 밥을 해 먹는 일이 드물었고, 오늘 이 음식 아니면 안 될 기분이라며 누군가 우기지 않는 한 되도록 족발을 시켜 먹었다. 동네 사람 발소리 다 아는 비상한 아이답게 족발 배달 아저씨가 다녀가면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안절부절 계단 위를 흘끔거렸다. 그러다 철계단이 울리면 환호에 몸을 떨며 허겁지겁 삼킬 기세를 보였지만, 영특한 아이답게 내가 계단을 올라가고 주변에 아무도 없다 싶으면 화단 흙을 파내고 뼈 몇 조각을 숨겨 놓았다. 그걸 언제 꺼내 먹었는지 본 적은 없지만, 아마 적절한 때에 잘 꺼내 먹었지 싶다.


커다랗고 하얀 그 아이



"그 아이의 눈하고 입 봤어? 반달 모양을 하고 활짝 웃고 있더라."



계절을 고루 두 번씩 지나 우리는 새 집을 구해야 했다. 할머니 역시 집을 내놓았고 언제 팔리든 팔릴 때까지 편히 지내라 하셨지만, 한 달일지 일 년일지 편하긴 힘들 것 같았다. 침수지라는 거 말고는 알려진 바 없는 한강 가까운 골목으로 집을 찾아 나섰다. 그해 겨울은 그리 춥지 않아 생면부지 남의 방을 기웃거리는 품이 덜 처량 맞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이 탓이었나, 하얗고 커다란 아이는 겨울 초입에 일찌감치 감기에 걸려 모포를 감고 몸져누웠다. 할머니가 매일 고깃국을 끓여 먹였지만 한 달이 지나도 마당으로 나오지 못했다. 나는 저 영특한 녀석이 집안에 있는 게 좋아 저러는 게 아닐까요, 할머니를 은근 떠보기도 했다.


병이 오래 가자 할머니는 이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라 할 수 있는, 목줄 없이 마당에서 지내는 일을 허락해 주었다. 할머니가 더 이상은 힘에 부쳐 산책을 시켜줄 수 없게 되면서부터 마당에서나마 편히 지내라고 목줄을 풀어주었는데, 시도 때도 없이 탈출을 감행하는 바람에 다시 목줄을 채 놓았다가, 1년 전부턴 휴가 없이 목줄에 매여 살고 있었다. 이렇게나 오래 앓았으니 목줄을 풀어준다 해도 괜찮을 거라 생각하셨는지, 어느 볕 좋은 날 할머니는 뜨거운 고깃국 한 사발과 함께 그 아이를 마당 양지에 뉘어 놓았다. 그게 사단이었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오니 할머니가 목줄만 덩그러니 들고 마당에 서서 이놈이 집을 나갔다고, 할머니가 시장에 다녀오시며 문을 여닫는 아주 잠시에 마당을 가로질러 할머니를 밀치고 순식간에 골목 밖으로 사라졌다고 했다.


지난 두 번의 탈출에서 내 나름 파악해 놓은 이 아이의 동선이 있었는데, 서교동엔 아직 마당에서 개를 키우는 집이 꽤 있었고, 이 아이의 행로는 그 집들을 찾아다니는 것이었다. 나는 그 중 한 집 앞에 아내를 서 있게 하고 평소 개 짖는 소리가 들렸던 집들을 찾아 다녔다. 몇 집 지나치지 않아 수학학원 간판을 달아놓은 빨간 2층집 앞에서 커다랗고 약간 누렇게 변색된 몸뚱이가 닫힌 대문 아래 코를 대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기겁을 하고 울부짖는 개소리가 담장을 넘어 멀리까지 들려왔다. 나는 조용히 다가가 그 아이의 목을 움켜잡으려 했다. 하지만 동네 사람 발자국 소리를 다 기억하고 있는 아이답게 거리가 거의 좁혀졌다 싶을 때쯤 유유히 자리를 떴다. 나는 한 손에 목줄을 남은 한 손에는 매일 아침 건네는 간식을 들고서 다정하게 그 아이의 이름을 불렀지만, 10미터 정도의 간격을 두고 붙으면 떨어뜨리고 떨어지면 붙이면서 나를 이곳저곳으로 유인해 다녔다.


이자카야 카즈에서 바라본 풍경


그 동안 그 커다란 몸집은 지나던 행인 스무 명 정도를 공포에 질리게 했고, 비명을 지르며 주저 않는 여자들, 집 현관에서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 주인 품에 안겨 가다 기겁을 하고 도망쳐 주인을 애타게 만든 강아지 한 마리 등 온갖 소란을 만들어냈지만, 너무나도 사뿐히 발을 놀릴 뿐 사람들 따윈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등 뒤로, 점퍼 속으로 목줄을 숨기며 이 아이와 전혀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추격을 이어갔으나 한시도 태연하지 못했다.


얼마쯤 지나 드디어 이 커다란 녀석이 아내가 기다리는 집 앞 골목으로 들어섰다. 저만치 누가 서 있는지 당연히 짐작했겠지만 침착하고 도도하게 거리를 좁혀 갔다. 아내는 다정하게 그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길을 막아섰고 나는 목줄을 들고 포위망을 좁혔다. 아내와의 거리가 가까워진 순간 이 아이는 속도를 약간만 높여 유유히 아내 옆을 지나쳤다. 그 아이의 눈하고 입 봤어? 반달 모양을 하고 활짝 웃고 있더라. 정말로 행복한 얼굴이었어. 아내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이 아이에 이끌려 밤이 되도록 동네를 헤매 다녔고, 아니 대체 어느 집 개가 저렇게 돌아다니느냐는 말이 들릴 때마다, 이 근처 카페 없나, 맥주나 한 잔 할까, 개만도 못한 연기를 주워 삼켜야 했다.


우리가 이사를 하고 5년이 지난 지금까지 집은 팔리지 않고 있다. 이자카야 카즈는 그간 세 번 인테리어를 바꿨고, 합정역 앞에 2호점 냈다. 카즈 옆의 주택가는 카페와 주점, 요릿집으로 개조되었고, 새로 지어진 매끄러운 상가 건물 사이에서 아직 몇 채 남은 옛 건물들이 뜨악한 풍경처럼 서 있다. 나는 아직도 종종 카즈의 창가에 앉아 철계단이 끝나는 바로 앞 아이스링크의 창문을 바라보며 그 안에 놓였던 빨간색 조악한 가구들을 떠올려보고는 한다. 하지만 나의 발소리를 잊었을지 모를 그 아이는 내가 대문 앞에 서성여도 짖지 않으며 그렇다고 간식을 달라 보채지도 않는다. 내가 그 마당을 나서기 며칠 전 그 아이가 먼저 영영 그 마당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 밤의 산책은 약간은 수척해지고 털빛이 누렇게 바랬던 그 아이의 마지막 나들이가 되었다. 감기는 끝내 낫지 않았고, 있는 힘을 짜낸 마지막 탈출 뒤엔 고기국물마저 삼킬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가끔씩 걸어 본 동네 길, 얼굴은 모르지만 목소리로 기억하고 있던 대문 저편의 친구들에게 두루두루 인사를 남기고 그래도 아쉬워 자신의 체취가 남았을지 모를 전봇대, 봉고차 바퀴를 기웃대고선 이만하면 되었다 싶었는지 집으로 돌아가 수돗가에서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모포에 싸여 할머니 집 현관에 누웠다. 이사 가는 날 우리 집 신발장 위엔 그 아이를 주려고 사 놓았던 간식이 반 봉지 정도 남아 있었다.



망원동으로 온 지 5년, 나는 마흔이 되었고, 이 동네는 많은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와 거니는 홍대거리 일부가 되었다. 생활 반경이란 건 변하기 마련이라 나도 내년 겨울쯤 이 동네를 떠나야 할 것 같다. 애써 기른 장미와 뽕나무는 두고 가야겠지, 지난여름 오디는 정말 달콤했는데. 이제껏 마냥 생각난다고 해서 어느 때든 계단을 내려와, 길을 건너 카즈에 앉아 회 몇 점에 맥주를 마시는 일도 없을 것이다. 변해서, 사라져서 잊히는 풍경이 많아질수록, 나이를 먹을수록, 아쉽고 그리운 것들이 늘어간다. 하지만 아직은 그게 슬픈 일이라 말하고 싶지 않다. 슬프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그래도 그립고 애잔한 기억으로만 남겨둘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글/사진 이주호

여행 매거진 BRICKS의 편집장. 여행을 빌미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며, 『오사카에서 길을 묻다』, 『도쿄적 일상』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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