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술집]별 헤는 밤, 적선동 작은 술집

작은 술집 #4



이제 내가 추억하려는 이의 모든 것은 처음부터 살아 있지 않았다. 그의 형제도, 친구도, 그와 마주쳤던 잎새, 그를 스쳤던 바람. 모두가 사라졌고, 나는 그 죽어간 것들의 끄트머리조차 목격하지 못했다. 추억 없이 솟은 감정에 그저 애틋한 굴곡 하나 그어 보자 싶어 그의 무덤을 찾아가려 했다. 그의 삶은 내게 어떤 추억도 될 수 없었으나 시인 윤동주의 묘詩人尹東柱之墓, 그 묘석을 바라보는 것은 오래도록 내 절절한 추억이 될 것이었으니.


용정시 대성중학 옛 교사에 세워진 윤동주 비. 신사참배 문제로 평양 숭실을 자퇴하고 돌아온 윤동주는 친일계 학교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한다.


중학교 2학년. 교내 백일장 2등 부상은 1980년대 후반 출판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였다. 중학생의 눈높이에도 남 보는 데서 펼쳐보기 불편한 그림들. 일단의 소녀가 좋아하리라 배려한 마음은 알겠으나 내 또래 소녀들은 하나같이 나보다 어른스러웠고, 그 소녀들에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그런 그림책을 펼쳐선 안 된다는 것을 알 정도로 나도 청소년기의 급물살을 앓고 있었다. 그날 저녁 의정부 중앙로 네 거리 숭문당 서점으로 가서 1991년 미래사에서 간행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샀다. 중간 중간 끼어드는 한자 때문에 결국 시화집을 다시 꺼내야 했지만.


백일장 1등 상은 3학년 어느 선배에게 돌아갔다. 그의 집 책장에 무엇이 꽂혔는지, 그가 이후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사랑과 배려가 가득했던 나의 시화집마저 어느 때 어디에서 사라졌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별밤지기 이문세가 어느 코너에선가 별 하나의 사랑과, 하던 시가 이거였구나 설렜고, 김일성을 만나고 왔다던 문익환 목사님이 그의 벗 ‘동주 형’을 추억하던 글이 실려 있어 이거 읽으면 빨갱이가 되는 게 아닌가 두려워도 했었다. 시인 윤동주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정체 모를 주사를 맞으며 죽어갔다던 내용을 아마 그 글에서 본 듯하고. 그러면서도 내게 시인 윤동주는 오래 전 사라진, 정말로 나와 같은 시공을 누리다 갔는지 의심스러운, 모든 죽어간 것들의 형해로만 스칠 뿐이었다.



간도 땅 용정 명동촌. 그가 살았던 집 뒷마당엔 아직 성숙하지 못한 열매들을 잎사귀로 숨기듯 감싼 살구나무 한 그루와 한눈에도 단물이 빨갛게 오른 앵두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러나 사실 그곳은 시인 윤동주 가족이 발을 벗던 앞마당이었고, 두서없이, 추억 없이 복원하느라 앞뒤가 바뀐 줄도 모르고 기둥이 내려졌다.


시인 윤동주를 기억하는 세상에 ‘시인윤동주지묘’ 묘비를 처음 알린 일본인 학자 오무라 마스오 선생이 처음 용정을 찾아갔던 1984년, 그곳 사람들은 동주가 시인이었다는 것도, 그의 시를 모르면 남조선에선 대학 갈 생각을 말아야 한다는 사실도 모르고 살고 있었다. 윤동주, 그의 이름이 새겨진 묘비엔 자랑처럼 풀만 무성했다. 앞뒤가 바뀌었다, 이 드넓은 중국의 벌판 어디쯤에서 그건 아무 일도 아니었다. 윤동주의 시를 모르는 세상에선 첨탑도, 십자가도 사라진 휑한 하늘이 그제나 저제나 속절없이 살아온 하고 많은 나날, 그 하늘이었다.


복원된 윤동주 생가.


추억 없이, 감정의 애틋한 굴곡 없이 명동 학교 건물이 다시 세워지고 있었다. 나는 그때껏 입에 우물거리던 앵두 씨 다섯 알쯤, 질퍽한 공사장 마당에 뱉어 버리고 땅속 감촉이 포근히 느껴질 만큼 중력을 보탰다. 앵두나무 한 그루 자라날 수 있으려나, 시를 쓰는 그의 마음이 이랬을까?



그의 무덤은 찾아가지 못했다. 일행이 있었고, 저마다의 목적과 또렷한 당위, 적잖은 피곤. 그리고 비가 왔다. 맑은 날에도 그의 무덤까지는 온통 진창을 밟아야 한다고, 그러니 비 오는 저녁 신발 밑창을 기어오를 흙더미를 생각한다면. 가져간 묘비 사진을 들썩이다 덮었다. 차마 못한 고백, 처럼.


호텔 방에 누워 그의 시를 읽었다.


"강물이 자꼬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우에 섰다"


당신이 딛고 섰던 언덕, 발밑은 정말 반석이었을까. 곧 닥칠 시대의 풍파를 어쩌지 못해 눈물과 회환뿐인 마지막 아침, 외마디 비명으로 마칠 인생이었으면서 그 숱한 각성 다 무엇이라고. 허나 자꾸만 불어나는 강물, 시를 쓰던 육첩방 안으로 침투하던 시대의 바람이 교토 강가의 한 청년을 현해탄의 재로 휘몰아 가도록 열열이 창문을 열어젖힌 것도 당신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용정에서의 마지막 식사. <사랑의 전당>에 등장하는 순이, 그 정겨운 이름을 곱씹는다. 간도 벌판만큼이나 크고 서늘한 냉면 그릇의 바닥을 보진 못했다. 몸이 시렸다. 순이랭면, 그 정겨운 이름, 끝끝내 무표정한 얼굴. 잘 가라 인사 한마디 못할 만치 단단하게 단절된 추억들.


순아 너는 내 전에 언제 들어왔던 것이냐 …. 우리들의 전당은 고풍한 모습이 어린 사랑의 전당. 정다운 이름, 순이 랭면.


묘비를 못 보았으니, 그에 상응하는 뭔가를 해야 하지 않나. 집으로 돌아온 다음 날 인왕산 수성동 계곡, 단단한 언덕 우에 올랐다. 누상동 9번지, 소설가 김송, 본명 김금송이라는 이가 1939년 두 번째 부인과 폐가를 사들여 일궜던 살림집이다. 그곳에 하숙을 하던 윤동주는 아침이면 산책 삼아 계곡을 따라 인왕산 중턱까지 올랐다. 계곡물에 세수를 하고 내려오면 김송의 부인 조성녀가 아침 밥상을 내 왔다. 윤동주는 이 집에 5개월을 머물렀고, 김송은 6.25 때 피난을 갔다 돌아와 이 집을 팔고 서소문으로 옮겨 갔다. 그 이사는 세 번째 부인이 함께했다.



계곡 물에 얼굴을 담그고, 머리를 담그고, 산책길이 찻길과 만나는 산중턱에 섰다. 사대문 안이 품 안에 모여 들었다. 약수터 푯말이 보여 모기에 물려 가며 5분 정도 오르니 수도꼭지가 알뜰하게 물을 가둬 둔 약수터가 나왔다. 물맛은 기대 안 한 그대로였다. 가져간 얼음 생수로 달아오른 얼굴을 문대고, 퇴근 뒤 저녁 산책에 나선 인근 주민들과 마주치며 서촌으로 내려 왔다. 세수를 한 번 더 한 탓에 젖은 머리카락이 셔츠 앞섶을 흠뻑 적셔 놓았다.


물소리가 맑아 수성동이라 이름 붙었다. 겸제 정선이 이 모습 그대로의 그림을 남긴 곳에다 1971년 아파트를 지었다. 지금은 일부를 복원해 두었다.


인왕산 중턱에서 내려다 본 문안 풍경.


전차에서 내려 집집마다 불 밝힐 시간이 되면 적선동 서점에 들어가 책을 보았다고 했으나, 이제 적선동에는 서점이 없었다. 젊은 시인 윤동주는 술을 즐겨 하지 않았다지만, 나처럼 마흔이 되도록 살아남았다면 서점대신 적선동 작은 술집에 들어가 표고버섯 안주와 맥주를 시켰을지도 모를 일. 가게는 금세 가득 찼고 등 뒤에서는 쉼 없이 문어가 튀겨지는데, 나의 셔츠는 말라간다는 기별조차 없었다. 이름마저 적선동 술집. 뜨거운 물에 살짝만 들어갔다 나온 표고버섯은 정말 그대로 표고버섯 맛이었고, 접시를 내려놓는 남자 주인의 머리가 나보다 길었다. 나의 머리카락은 수성동 계곡물에 젖었고, 테이블 다섯의 적선동 작은 술집 주인은 긴 머리를 뒤로 묶었다. 나는 어쩐지 그것으로 안심이 되었다.



더위 탓인가, 맥주 한 병에 현기증이 일었다. 또 한 병의 마개를 열고, 나이가 만들어 주는 허울 좋은 변명, 시대가 천명하는 안락한 노후 대책에 모가지를 드리우지 말자, 맥주는 맥주인 채, 표고는 표고인 대로. 허나 나는 왜 이 나이까지 그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할 수 없었을까. 지난겨울 이 거리의 터무니없는 추위, 혹독한 분노는 다 잊혔건만, 나의 가슴앓이, 이 성냄은 대체 무엇일까. 나는 아직 나의 추함을 고백해선 안 된다. 나와 같은 시대의 병을 앓고 있는 얼굴들을 마주치며 성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저들의 병이, 그리고 나의 병도 속히 낫길 바라지도 않을 거다.





글/사진 이주호

여행 매거진 BRICKS의 편집장. 여행을 빌미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며, 『오사카에서 길을 묻다』, 『도쿄적 일상』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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