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여행] 도쿄 12월의 풍경, 그리고…

크리스마스 특집 #4



할로윈이 끝남과 동시에 도쿄는 연말 및 크리스마스 시즌으로 돌입한다. 가로수에 꼬마전구가 설치되는 모습이 이때부터 눈에 띄기 시작하고, 제과점 앞에는 직접 만든 오리지널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예약하라는 플래카드가 내걸린다. 집 앞을 꾸미던 호박, 박쥐, 해골의 자리는 초록과 빨강이 대비를 이루는 트리와 산타, 루돌프가 대신한다. 밤이 되면 어떤 집은 반짝반짝 소규모 일루미네이션을 선사해 지나가는 사람들을 잠시나마 행복하게 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도쿄는 아직 가을을 품고 있다.


12월 초순의 신주쿠교엔. 가을이 한창이다.


기온도 영상 10도와 20도 사이. 완연한 가을이다. 이제 좀 선선하네, 싶으면 느닷없이 찾아오는 강추위 때문에 뭐가 지나간 거 같은데 그게 가을이었나 싶은 서울과 달리, 도쿄의 가을은 12월 초순까지 비교적 길게 이어진다. 자연은 아직도 가을임을 입증하고 있지만, 거리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기 위해 한껏 치장되어 있다. 노란 은행잎이 무성한 은행나무에 노란빛 전구가 반짝이는 모습을 보기도 하고, 도로를 따라 가로수 길 양옆으로 뻗어 있는 일루미네이션 밑으로 새하얀 눈 대신 빨간 단풍잎과 갈색 빛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다. 낮에는 단풍놀이를 즐기기에 여념이 없고 밤에는 일루미네이션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다. 도쿄의 12월은 이렇게 가을과 겨울이 공존한다. 참 희한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재미있기도 하고 조금은 위화감이 든다. 마치 아직은 수수한 민얼굴이 더 잘 어울리는 여고생이 무리해서 화장을 한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가을이 가고도 좀처럼 내가 생각하는 “와! 크리스마스!” 하는 기분은 안 난다. 그건 내가 크리스마스라면 환장하는 나이는 이미 훨씬 지났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으레 “크리스마스 분위기”라고 하면 흰 눈도 좀 내려서 소복소복 쌓여야 하고 양 볼이 새빨개질 만큼의 추위도 있어야 하고 “25일은 빨간 날, 쉬는 날”이라는 이미지도 있어야 하는데 도쿄는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뭔가 이대로는 안 돼!’라는 생각에 이 도시가 조금 무리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혼자 생각한다. 그 중심에는 도쿄 겨울의 꽃 “일루미네이션”이 있다. 어디를 가든지 눈앞이 번쩍번쩍한다. 평소에도 화려한 긴자, 마루노우치, 시부야, 롯폰기 같은 번화가는 말할 것도 없고, 동네 곳곳에도 주민들의 노력이 담긴 소소한 화려함이 있다. 사실, 이 일루미네이션이 없다면 새해가 오기 전까지 지금이 연말 시즌이고, 크리스마스가 오고 있다는 것을 실감조차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거리의 일루미네이션 준비 작업을 보면서 ‘아! 슬슬 겨울이 오는구나.’ 라고 새삼스레 자각한다.


바로 옆동네 시부야. 여긴 겨울이다.


잠시 딴소리지만, 일본 사람들은 왜 이렇게 반짝이를 좋아할까 궁금해서 알아보니, 일루미네이션이 일본에 등장한 것은 생각보다 오래전 일이었다. 시간은 메이지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 당시 수입품을 다루던 ‘메이지야明治屋’라는 상점이 긴자에 진출하면서 매년 일루미네이션으로 가게 앞을 꾸몄다고 한다. 메이지야는 이로써 해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되고, 1905년 신문에 실리면서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시대를 거듭하면서 지금과 같이 온 도시가 휘황찬란해졌다.


크리스마스의 롯폰기. 사치와 화려함의 극치.


어찌 됐든 도쿄에서는 거리 곳곳의 일루미네이션들과 함께 아주 평범한 12월 25일을 보내게 된다. 학교도 회사도 쉬지 않는, 그냥 어제와 같은 잔잔한 하루를 말이다. 굳이 특이한 점이라 한다면 ‘KFC 치킨을 먹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정도? 크리스마스에 KFC 앞으로 예약한 치킨을 사기 위해 줄이 길게 이어져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 흥미롭다. 집안의 가장으로 보이는 나이든 아저씨부터 다양한 세대의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약간은 상기된 표정으로 치킨을 기다린다. 개인적으로 참 일본스러운 풍경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치킨 문화가 발달해 먹고 싶을 때면 언제든지 사 먹을 수 있는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에서는 특별히 크리스마스에 치킨을 먹는 문화가 확산되어 KFC는 물론이고 편의점 치킨도 이때만큼은 예약 판매를 할 정도이다. 왜 하필 KFC냐 하면, 도쿄에서는 가라아게唐揚げ를 제외하면 KFC의 후라이드 치킨만이 제대로 된 치킨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치킨을 먹으며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모습을 상상하면 어딘가 따스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도쿄에서는 이런 게 “크리스마스”라는 날을 제대로 보내는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어릴 때는 그저 길거리에 흘러나오는 캐럴을 들으며 산타에게 선물을 받는 날인 줄로만 알았지만.


소소한 일루미네이션. 큰 규모보다 어쩐지 더 따뜻한 느낌이다.




글/사진 정인혜

‘앞으로의 삶에 후회를 남기지 말자’ 라는 생각에 돌연, 평소 동경하던 도시인 도쿄에의 유학길에 올랐다. 여행하며, 산책하며, 사진 찍는 것을 가장 큰 즐거움으로 여기고 있다.
인스타그램 : http://www.instagram.com/37mid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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