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술집]익선동의 기적

작은 술집 #5



페르시아 100만 대군과 스파르타 전사 300명의 대결. 뒤늦게 영화 <300>을 보며 웃통 벗은 전사들의 복근 너머로 스파르타 교육이라는 말이나 떠올리고 있었다니, 매타작 교사들에게 강탈당한 중고등 시절의 기억을 여직 어쩌지 못하고 있었나 보다. 300명의 전사들이 실은 150쌍의 연인이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강인한 육체, 혹독한 훈육, 끝없는 경쟁이 스파르타가 아닌 제국 일본의 교육 모범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왜 이때껏 그 교육자들에게 매몰찬 거부를 드러내 주지 못했나, 세뇌가 세월보다 단단했던 모양이다.


2016년의 마지막 밤, 나는 털 달린 부츠를 신고 나오지 않은 것을 책망하며 경복궁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주변은 온통 이제껏 살던 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고, 아내는 그 확신의 부름을 받아 광화문 앞 무대에서 연주를 하고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한동안 근방을 서성이다 한 해의 마지막 시간에 임박, 어딘가에 자리를 잡기로 했다. 종각보다는 인사동이 나을 것 같았지만, 거기서도 빈자리 잡는 일은 여의치 않았다.


결국 낙원 상가 아래 찻길을 건너 익선동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곳은 내가 20대 중반, 그러니까 도시환경정비니, 강남북 균형발전이니 하던 시절 호텔이 들어온다 오피스 촌이 된다 꿈이 영글던 동네였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21세기 대경성 계획은 10년이 지나도록 삽 한 자루 꽂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 합정동, 연남동에서 보던 풍경으로 100년 골목 안이 재조합되어 있었다. 다른 동네들에서 도저히 자아낼 수 없는 그윽한 골목의 세월까지 보태졌으니, 술값이 소름끼치게 비쌀 만했다.


소름 돋은 손길로 맥주집의 메뉴를 몇 번이고 훑어 내렸다. 이런 날 어딘들 수월할까, 이미 이 일대를 몇 바퀴나 돌았다. 말린 과일 조각 한 접시를 폐백 과일 바구니 값을 주고 주문하고선 맥주잔에 남겨지는 거품 흔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 모금에 천 원쯤 하겠구나. 그러나 맥주 값 같은 건 불편하진 않았다. 팔짱 낀 남자 연인들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무심한 척 지나쳐야 하는, 여기는 익선동이었고, 나는 익선동 골목 처마, 그 어둑시근한 빛깔 같은 마음 심층의 불편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왜 불편한 걸까, 혼이라도 나서 될 일이면 기꺼이 종아리를 내줄 텐데,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 처럼.



가장 활발하게 변하고 있는 수표로 28길 일대는 철종이 둘째형 영평군에게 하사하며 아버지 제사를 모시게 한 누동궁이 있던 자리였다. 궁가의 4대 집주인 이해승은 왕가의 권세를 두루 누리다 국권 피탈 시 일제 귀족 2등급 후작 작위를 받은 인물이지만, 빚 40만 엔을 어쩌지 못해 조상 제사상을 잡혀 먹고 서대문으로 이사했다. 천황이 하사한 작위 수여자 76명 중 가장 높은 작위를 받았고, 공로금이 지금의 수십억에 달했다고 하는데, 조상 제사상을 잡혀 먹은 사람이라니 분명 꽤나 격정적인 드라마를 살았을 거다.


누동궁은 1930년 조선인 건축 사업가 정세권에게 넘어갔다. 이해승은 송병준, 윤덕영, 박영호 공동 명의로 누동궁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담보로 잡히고 빚을 정리했다. 정미 7적 중 하나인 송병준 공작에 자작 윤덕영, 친일의 모범 박영효 후작까지 면면이 화려한 귀족들은 한갓 집장사 정세권에게 조선 왕의 궁가, 지금의 수표로 28길 일대를 통째로 넘겼다. 그렇다고 빚잔치로 손을 터는 게 귀족의 진면목일 순 없었다. 왕실에서 하사 밭은 논밭과 선산이 홍은동에 널려 있었고, 돈이 좀 남았던지 그 일대의 땅을 더 사들였다. 이곳에 그의 며느리가 정원여자중학교를 지어 스파르타 정신을 계승했고, 그녀의 아들은 그랜드 힐튼 호텔을 지어 스파르타 인들의 예방을 바랐다. 그리고 누동궁은 귀족의 품을 떠나 모던 조선의 신세기로 들어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익선동이 되새겨 준 나의 문제는 그 불편한 감정이 어디서 오는지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2011년 아내와 종로 아트 선재에서 게이들의 생활을 담은 다큐멘터리 <종로의 기적>을 보았고, 동성애에 관한 몇 권의 책을 읽었다. 퀴어 영화제도 몇 회 관람했다. 제가 알고 있는 세상 지식이란 것들 모두가 이성애처럼 증명할 필요가 없었을 뿐, 증명하기 어려운 사실들뿐이었습니다, 회개하고 나니 천국이 보이는 듯했다.


안쓰럽게도, 그해 여름 종로의 기적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이성애가 유일한 사랑의 형태가 아니라는 근거가 쌓여갈수록, 이성애자로서 누려왔던 생각의 맞춤들이 헐거워질수록 내가 당연한 듯 누리고 섰던 믿음의 반석이 갈라지고 뭉텅이로 떨어져 나가는 두려움이 일었다. 열등한 무리, 도덕의 파괴자, 정신 이상자. 국기 문란, 내란 선동의 낙인과 악다구니. 왕으로 태어난 자는 왕이어야 하고, 선생은 선생이어야 하고, 선배는 선배여야 하고, 남자는 남자여야, 여자는 여자여야, 연애는 이 둘이 해야 한다고 이를 악물 만큼 곤두박질치진 않았다. 그저 오래 전 누군가가 내 마음에 드리워 놓은 음습한 그늘이 한두 발치 정도 남아 있다는 게 수치스러웠다.


정세권은 누동궁을 헐고 스무 평 단위로 필지를 나누어 대형 주택 단지를 조성했다. 그가 지은 집은 조선인들이 생각해 오던 한옥이 아니라 개량된 신식 가옥이었다. 벽에는 타일이 발렸고 대청과 창틀에는 유리문이 달렸다. 단지를 조성할 때가 개별 주택을 지을 때보다 공사 단가가 낮았으므로 그는 서민들이 감당할 수 있는 값에 집을 내놓을 수 있었다. 북촌, 서촌, 보광동, 혜화동. 그는 사람 수가 힘이라고 믿었고, 한 해 300채 가까운 집을 지어 조선 사람을 한 데 모아 놓았다. 청계천 남쪽에 몰려 있던 일본인 거주지를 북촌까지 확장하려던 총독부의 계획이 어그러졌다. 그 거슬리는 집장사가 물산장려운동과 조선어학회의 재정을 이끌어 간다는 첩보까지 들어왔다. 권위의 화신들은 여전히 그들대로 잘 먹고 잘 살고 있었지만, 눈에 거슬리는 것을 그냥 흘려보낼 만한 아량은 없었다. 정세권의 허약한 권세, 육체, 재산은 강탈당하고 수탈당했다.



2017년 여름의 막바지. 더위와 습기에 버거운 걸음으로 모던 조선의 골목을 걸어 다녔다. 서촌에서 해야 할 일이 있었고, 익선동에서 민어회를 먹자는 호사스런 약속도 있었다. 그리고 종로 세무서 근처 국제구호 단체에서 일하는 고등학교 동창이 선물할 책이 있다 하여 찾아간 익선동의 오후. 재개발 없이도 생기를 찾은 익선동 166번지엔 찾아와 거니는 사람들의 은은한 자취가 이어지고 있었다. 낙원동, 인사동, 익선동에서 술을 과하게 마시던 민주 투사들 중 몇이 혁명 정부의 작위를 받았다는 소문도 들려 왔다. 작위를 받은 누구 하나 아직 익선동을 사랑의 해방구로 지정해 주지 않았고, 나도 마저 해소해야 할 불편한 감정을 남겨 두었지만 100년 전 풍운아가 실험하고 저항한 조선의 골목의 풍경은, 어쩌면 이 모든 게 기적일지 몰라, 습기와 열기에 나른해진 기분을 북돋아 주고 있었다.


몇 시간 뒤 학교 강의가 있다는 친구와 익선동 골목의 열기 속을 함께 걸었다. 함께 배운다는 동학이 아니라 선배, 후배를 나누는 질서가 있다면 그 질서가 죄겠지, 그가 말했다. 왕이 죄를 지었나 안 지었나가 문제가 아니라 왕이란 게 정말 있어도 되는 것인가가 문제겠지, 내가 말했다. 내가 한 말이었으면 좋았겠지만 프랑스 대혁명 당시 혁명가 생쥐스트가 한 말이었다. 겸연쩍었다.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질서가 있다면 그 질서가 죄겠지. 어느 연인이 내게 회초리를 들 것 같았다.


나의 허물은 끝내 어디 가지 않을지 모른다. 뒤엉킨 좁은 골목을 차례차례 파악해 가며, 어렵사리 더위를 견디며, 불현듯 다가 올 익선동의 기적을 기다렸다. 그런 날이 오더라도 우쭐하진 말아야지, 근육은 내가 알아서 만들어 보기로 하고. 셔츠 등이 젖어갔지만, 여름도 이렇게 가는구나 싶었다.





글/사진 이주호

여행 매거진 BRICKS의 편집장. 여행을 빌미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며, 『오사카에서 길을 묻다』, 『도쿄적 일상』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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